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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12] 인연의 향기

안상근      발표시간: 2026-03-23 15:19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 남옥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사람과 사연이 있다. 인연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수십 년 동안 나를 동반하며 무궁한 에너지와 힘을 실어 주었고 소중한 정신적 유산을 남겨 주었다.

70년대 초, 나는 갓 스무살에 접어든 애숭이 처녀였다. 당과 국가의 덕분으로 조학금을 받으며 장춘재정학원을 졸업한 나는 현 인사국의 배치로 첫 사업터인 태양향 공소사에 자리 잡았다.

당시 나는 주동적으로 제일선인 영업 매대에 서겠다고 조직에 제출했다. 행정 사업을 제쳐 두고 힘든 영업실에서 일하겠다고 하니 조직에서는 흔쾌히 허락하고 나에게 문구 매대를 맡겼다. 나는 연필 한 자루, 필기장 한 권, 고무지우개 한 개일망정 보배처럼 다루며 맡은바 사업터에서 책임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날,영업조 조장이 나를 불렀다.

조양천신화서점에서 도서 발행을 책임진 김재권 선생님이 오셨는데 잠간 모여서 도서 판매와 그 대책에 대하여 토론해보자고 했다. 나는 두말없이 영업조 조장과 함께 당직실에 들어섰다. 첫눈에 마흔 살쯤 돼 보이는 멋진 남성분이 책을 구들에 펼쳐 놓고 말씀하셨다.

“오늘 첫 걸음으로 새로 출판된 책을 이만큼 가져왔는데 진렬장에 진렬하고 판매 상황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책값은 먼저 지불하지 않고 판매하는 족족 지불해도 별문제라고 하셨다. 막 출판된 귀중한 도서, 흰 종이장에 까만 글자가 깨알처럼 꼭꼭 예쁘게 줄을 지어 정연하게 서 있었다. 책장을 넘기노라니 글속에서 풍기는 특유의 글향기가 나를 끌어 당겼다. 나는 너무도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기쁜 리유는 멀리 가지 않고도 내가 직접 관리하는 매대에서 책을 구매할수 있다는 점에서였다. 덕분에 나는 촌에서는 제일 먼저 《림해설원》,《청춘의 노래》등 장편소설들을 읽을 수 있었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고 형제들끼리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소설 속 주인공들의 재미있는 사연을 풀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시절, 도서는 유일한 소통 도구이자 볼거리였다.내가 그토록 책에 흥취를 느끼고 집착하게 된 리유는 역시 김재권 선생님의 책에 대한 선전과 떼여놓을 수 없다. 선생님은 늘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가장 좋은 스승은 책이고, 가장 행복한 일은 마음대로 독서할 수 있는 조건을 창조하는 일이다" "책에는 이 세상의 모든 최고가 들어 있고 백과지식이 있다"

당시 책 한 권 값이 불과 2원 이내였지만 구매하려면 상당히 힘들었다. 김재권 선생님은 나에게 푸른등을 켜 주고 할부로 조금씩 갚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월평균 2원씩 납부하는 호조금이 년말에 나오면 한꺼번에 책값을 지불하군 하였다. 참으로 마음이 하늘처럼 푸르고 바다처럼 깊은 분이셨다.

김재권 선생님의 로고에 감동되고 보답하기 위하여 나도 책을 판매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당시 일부 생산대에는 로인독보 시설이 갖추어져있었다. 나는 생산대 대무 위원들과 협상하고 단행본 몇 권씩 사도록 약속했다. 사원들이 때때로 번거로운 로동에서 해탈되여 책 읽는 기쁨을 만긱할 수 있어서 대단히 흡족해 하였다. 다른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그 시절에 도서가 귀한 취급을 받던 진솔한 이야기다. 한편으로 나는 또 마을에 있는 모교를 찾아가 교장 선생님께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마침 학교에서는 반급별로 책을 비치하기로 하고 아동도서 일부를 사들였다. 그리고 반급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동원하여 집집마다 다니며 낡은 책을 거두어 들였다. 학생들은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날 체육시간을 볼수 없는 상황이면 실내에서 책을 읽으면서 흥미진진하게 시간을 보냈고 업여시간과 점심 휴식시간에도 책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반급마다 책을 노끈에 꿰여 학생들이 앉은 뒤켠 벽보란 밑에 걸어 두었는데 교실에 들어서면 첫눈에 안겨오는 멋진 반급풍경이였다.

김재권 선생님은 판매 수요에 따라 짬짬이 틈을 내여 책을 공급하셨는데 왕복 20여 리 길에 낡은 영구표 자전거가 유일한 운송 도구였다. 당시는 시장경제가 아니고 계획경제 시대여서 그분에게 특별히 주어지는 아무런 보수도 없었지만 오직 도서에 대한 애착 하나로 그렇게 부지런히 산촌을 누비며 책을 보급하셨다.

사실 김재권 선생님 자신이 이동 책가게였다. 만년에도 이동 책가게를 운영하셨던 김재권 선생님이라고 하면 룡정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산골 마을 팔도로부터 시작하여 조양천 서점, 후에 룡정시문화관에서 사업할 때에도 시종일관 손에서 도서를 놓지 않으셨고 또 퇴직 후에는 진짜 2평방메터도 채 안 되는 이동 책가게를 꾸리고 밤낮으로 책에 파묻혀 사셨다. 사람들을 만나면 책에 대한 말씀부터 하셨다. 제한된 내 인생의 울타리와 사회와의 접촉 범위 내에서 나는 책에 대하여 그렇게 깊은 애착과 미련을 가진 분을 보지 못하였다. 명예나 지위, 금전은 모두 생각하지 않으셨고 오직 책에 대한 관심뿐이셨다. 책 인생, 책 집착, 앉으나 서나 책에 대한 말씀을 하셨지만 남에게 지나칠 정도로 요구하지는 않으셨다. 다른 사람이 들어 주면 기뻐하셨지만 들어 주지 않아도 별말씀이 없으셨다.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운 분이셨다.

하루 종일 고달프게 도서 판매를 위하여 동분서주하다 보면 점심 식사시간을 놓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였다. 농촌 마을에는 음식점이라는 게 따로 없었다. 쌀독에 쌀이 넘쳐 나야 인심이 후하겠는데 70년대 당시 상황으로 손님 한 분을 한 끼 식사대접하는 것도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였다. 한 번은 보다 못한 내가 어머니께 부탁하여 점심 한 끼를 선생님에게 대접한 일이 있다. 아주 소박하고 간촐한 점심식사였다. 김재권선생님은 오이랭국에 밥을 말아 드시고도 그렇게 감지덕지 하셨다.

후에 김재권 선생님은 룡정시문화국으로 발령을 받았고 나는 조양천소학교로 발령을 받다 보니 업무상 거래는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선생님의 책에 대한 특별한 애착과 정성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지나가는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고희의 나이를 먹고 보니 이미 지나간 아쉬운 일들이 많다. 편안할 때 옛 친구, 옛 동료를 만나서 회포를 풀려는 생각은 꿈과 같이 허황하다는 것을 나는 늘 느끼군 한다.

몇 년 전에 남편으로부터 김재권 선생님이 이미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슬픔을 금할 수 없었다. 제한된 인생이 안스럽고 원망스러웠다. 도서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고 산촌에 책을 보급하려고 오르막길, 내리막길 마다하지 않으시고 힘들게 오르내리던 선생님의 모습이 흑백사진처럼 지금도 내 머리속에 또렷이 각인되여있다.

옛 인연은 세월 속에 묻히고 새로 맺은 인연도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가는 상황이 재현된다. 어떤 때는 마음속으로 잊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 노력이 영구할까, 나 또한 영생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인연이란 기억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이미 영원한 것임을. 선생님이 펼쳐 보이신 책 한 권, 손수 끌고 다니시던 이동 책가게, 산길마다 흘리신 땀방울은 이미 내 삶의 뿌리가 되여 오늘의 나를 지탱하고 있다. 책향기처럼 은은하게, 그러나 결코 사라지지 않는 힘으로...

남옥란 프로필

연변작가협회 회원

수필, 수기, 소설, 시 백여편 발표

《로년세계》‘천우컵’ 생활수기 콩클 금상

《청년생활》 제5회 '계림문화상' 공모 가작상과 제6회 우수상 수상.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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