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일

1964년 1월호 《민족화보》 안표지에 실린 사진 <로소동락>(老少同乐)
책장 깊숙이 보관된 낡은 화보책을 꺼낼 때마다 나는 시간의 문을 열고 1962년 9월 3일 그날로 돌아간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주년, 여덟 살 소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축제분위기였다.
그날 아침, 엄마는 내 외태머리를 곱게 땋아 주고 직접 지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혔다. 내 손을 잡은 엄마의 손길은 따뜻했고 나는 퐁당퐁당 뛰며 연길공원으로 향했다. 거리는 이미 인파로 북적였다.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들이 붉은 기발과 꽃다발, 풍선을 들고 공원다리를 건너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 들었다. 가로수도 바람에 춤추고 구름도 덩달아 춤을 추며 우리 명절을 축하하는 듯 했다.
공원 체육장에서 열린 경축대회가 끝날 무렵, 주덕해 주장님께서 주석단에서 내려와 사람들과 손에 손잡고 춤을 추셨다. 공식 행사는 끝났지만 사람들은 곳곳에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할머니들의 환호성과 신명 나는 북소리가 우리 모녀를 이끌었다.
둥글게 모인 할머니들 가운데는 북을 메고 지휘하는 젊은 녀선생님이 계셨다.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에 맑은 미소, 그 모습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였다. 옆에서는 할아버지들이 흥겹게 퉁소를 불고 있었고 그 앞에는 앙증맞은 세 살쯤 된 남자아이가 앉아 장단을 요리조리 돌리며 두드리고 있었다. 북장단이 살아서 춤추는 듯했다.
나를 본 녀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손짓으로 들어오라 하셨다. 나는 춤추기를 좋아했지만 쑥스러움도 있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여 둥그런 원 안으로 들어섰다. 두 팔을 벌려 장단에 맞춰 폴짝폴짝 뛰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사진사 아저씨가 나타나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카메라를 들이댔다. 춤추는 소녀와 장단 치는 소년, 북을 멘 채 환하게 웃는 녀선생님, 다리를 꼬고 앉아 퉁소 부는 할아버지, 흰 수건을 두르고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장단 치는 할머니... 모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였다. 그 아름다운 력사의 순간이 사진사의 카메라에 오롯이 담겼다.
그날의 녀선생님은 북경중앙민족학원 교수님이라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였다. 자치주 창립 10주년을 취재하기 위해 북경에서 촬영가를 모시고 먼 길을 오셨다고 한다. 촬영가는 우리 민족의 축제 현장을 부지런히 렌즈에 담았고 그 사진은 1964년 1월호 《민족화보》 안표지에 <로소동락>(老少同樂)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1964년 초, 당시 연변의학원 도서관에서 일하던 오빠가 새로 들어온 화보책을 정리하다가 깜짝 놀랐다. "어머니! 동생 사진이 《민족화보》 에 나왔어요!"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엄마는 "아이유, 정말 우리 월일이 나왔구나!" 하며 화보책을 이리저리 돌려보셨다. 외할아버지부터 언니, 오빠들까지 모두 큰 경사가 난 듯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엄마는 동네방네 자랑하러 다니느라 바쁘셨다.
그 한 장의 사진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학교에서 나는 '스타'가 되였다. 해마다 6·1절 행사 때는 검열 꽃차에 앉아 주석단 앞을 지나갔고 학교 행사 때는 대표로 꽃다발을 증정하는 게 내 몫이 되였다. 그 사진 한 장은 나에게 소중한 동년의 기념이자 연변조선족자치주 력사의 한 페지로 자리 잡았다.
세월은 류수와 같이 흘렀다.
10여 년이 지난 어느 봄, 나는 농촌에 하향하여 생산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전혀 생각밖에 그날 장단 치던 소년을 만나게 되였다. 그는 벌써 고중 2학년생이 되여 모내기 철을 맞아 일손을 도우러 온 것이였다. 이름은 김훈, 별명은 '장단'이였다. 그만큼 그가 장단을 잘 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조심스레 녀선생님 소식을 물었다. 선생님은 혼란스러운 시기에 고초를 많이 겪었지만 평판을 받자마자 조선족예술인재 양성을 위해 일부러 북경에서 다시 연길까지 오셨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미 농촌으로 내려가서 선생님을 찾을 길 없었다. 그 당시 선생님을 만났으면 내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선생님께 배움의 기회를 얻었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였을까? 그 분을 다시 찾아 뵙지 못한 건 내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후 나는 39살 늦은 나이에 길림장춘 건축학원에 진학했다. 고등수학, 건축구조의 힘의 분석, 건축재료의 화학반응까지 모든 것이 낯설고 버거웠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는 그 사진 속 녀선생님을 떠올렸다. 따뜻한 미소, 북을 메고 사람들을 하나로 이끌던 당당한 모습, 그리고 나를 불러들여 춤추게 하던 그 손짓을 기억하며 이를 악물었다.
3년 3개월, 드디어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공정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그리고 지금, 고희를 넘긴 나이까지도 나는 출근하며 남은 여생을 불태우고 있다. 내 삶에 한 줄기 빛을 심어준 그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때 그 소중한 화보책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농촌에서 올라와 가정을 꾸리고 이사를 몇 번 다니는 사이에 어디선가 사라져버렸다. 엄마가 안타까워하는 걸 보고 딸이 상해의 여러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 마침내 그 화보를 찾아 고가로 사왔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사진 속에는 1962년 가을의 햇살과 바람, 북소리와 웃음소리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예쁜 소녀가 나풀나풀 춤추고, 그 옆에서 장단을 치는 소년, 북을 멘 녀선생님, 퉁소 부는 할아버지, 장단 치는 할머니... 그들의 얼굴에는 '9·3' 명절을 축하하는 기쁨과 우리 민족의 문화예술이 살아 숨 쉬듯 생생하게 기록되여있다.
그 화보 속 사진은 단순한 사진이 아니다. 한 소녀의 꿈, 한 선생님의 헌신, 그리고 한 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웃고 춤추는 모습이 담긴 소중한 력사의 한 페이지다. 오늘도 그 사진을 들여다보면 그날의 북소리가 귀가에 울리고 환호성이 눈앞에 펼쳐진다. 사진 속에는 연변 땅에 뿌리내린 우리 민족이 여러민족 형제자매들과 더불어 서로 아끼고 도우면서 살아가는 따뜻한 정이 흐르고 있다.

김월일 프로필
1954년 연길 출생
1970년 2월 하향지식청년으로 연길현 장안향에 하향
1980년 연길시주택공사 취직
1996년 길림건축공정학원 졸업
2004년 4월 연길시주택공사 퇴직
현재 석화문학원 회원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