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상호
무슨 일을 하나 시작이 중요하듯이 대학에서도 첫 학기는 자못 중요하다. 나로 말하면 더욱 그러했다. 나는 대학교 첫 학기에 분투와 노력으로 하향지식청년으로부터 대학생으로의 '과도기'를 완수했으니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아도 감개무령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바로 내가 대학에서 첫 학기를 시작하던 그때로부터 꼭 48년이 되는 날이다. 1978년3월2일,나는 20여일전에 받은 록취 통지서를 가지고 연변대학(수학학부 77년급)에 등록하여 나의 4년 대학생애의 첫 학기를 시작하였다.
비록 48년이란 시간이 지나갔지만 대학교 첫 학기에 지내온 일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대학교에 등록하여 개학식을 마치니 대학교 첫 학기 생활은 곧 시작되였고 금방 학교문에 들어설때의 신비감과 흥분된 심정은 인츰 사려져 버렸다.
농촌에서 일하던 내가 날마다 교실에 앉아 공부를 하자니 전혀 습관이 되지 않았고 바늘방석에 앉은듯 힘들었다. 농촌에서 로동을 위주로 하고 비교적 자유롭던 생활의 관성이라고 봐야 하겠다.
처음 며칠동안은 심지어 내가 공사나 현에 무슨 회의를 왔나하고 착각할때도 있었다.그래서 정신을 가다듬고 앞을 주시해 보면 선생님께서 한창 강의를 하고 있었다.
농촌에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셨기에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 때면 담배생각이 나서 책상안에 손을 넣고 담배를 말아 놓았다가 휴식 종소리가 울리면 인츰 복도에 나가 담배를 피우군 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얼마간 지나니 점차 수업시간에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정신을 가다듬고 선생님의 강의를 들을수 있었고 학교의 학습과 생활에도 점차 적응되기 시작했다.
'수학분석' 과를 강의하는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면 기억력에 영향이 있다고 귀끔해주니 인츰 담배를 끊어 버렸다.
그러나 제일 큰 곤난은 그래도 공부였다.
비록 대학입시가 회복된후 대학에 왔지만 농촌에서 중소학교를 다녔으니 실지 문화정도는 고중정도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수학으로 말하면 겨우 고중2학년 정도라고 해야 하겠다. 게다가 중소학교를 모두 조선족학교를 다녔으니 한어로 강의하는 대학교 수학의 일부 내용은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리해도 안되였다.
시내에서 자란 내가 그렇게 간고한 농촌생활에도 적응되고 심지어 그렇게 힘든 농촌 탄광일도 했을라니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공부를 못할게 있겠는가 하고 용감히 도전해 나섰다.
우선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자고 또 더 일찍 일어나면서 한편으로는 고중에서 못 배운 수학지식을 자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날 배울 내용을 먼저 예습하면서 리해가 잘 안되는 부분은 과당시간에 더 열심히 강의를 들었다.
과당시간이 끝나면 서둘러 숙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 혹은 기타 동학들한테 물어서라도 그날 배운 지식을 완전히 리해한후에야 숙제를 하였고 또 다른 참고서적 문제집에서도 그날 배운 지식에 유관되는 문제들을 찾아 풀이를 많이 하면서 배운 지식을 공고히 했다.극한과 미적분부분에서는그날그날의 숙제를 완수하는 외에 참고서적 문제집의 련습문제를 무려 3백여개나 더 풀어 보았다.
이렇게 한 학기 동안 노력하고 분투했더니 기말시험에서 여러 과목이 다행히 모두 합격되였다.비록 여러 과목의 성적들이 우수(优)나 량호(良)는 없었지만 그래도 만족되였다.
두번째 학기부터는 완전히 학교 학습생활 절주에 적응되여 기말시험에서 성적이 량호나 우수도 있었다.
두번째 곤난은 생각밖으로 배고픈 고생을 좀 하는 것이였다.
아마 지금 대학교 재학생들은 리해가 안될 것이다. 돈을 더 내고 많이 사서 먹으면 될건데 그게 무슨 문제인가고 말이다.
그시절 대학생들은 나라의 혜택으로 학비와 주숙비도 내지않았고 화식도 나라에서 내주는 조학금으로 해결하였다. 세끼 식사는 모두 학교식당에서 하였는데 학교에서 발급한 화식카드를 사용했다. 화식카드가 바로 조학금이였다. 화식카드에는 매달 날자와 그날에 해당되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개 정방형 모양으로 된 작은 칸이 있었는데 끼니마다 체크를 하고 밥을 타 먹었다. 량식은 내 기억에는 31근 표준으로 되여 있었는데 더 먹을수 없었다.
그때 우리 수학전공을 포함하여 네개 전공의 신입생들이 연변대학 중평분교에서 첫 학기를 보냈다.
중평 마을은 왕청현 중평공사 소재지였는데 그 시기에는 영업하는 식당이 하나도 없었다. 공사 초대소에 식당이 있었지만 초대소에 주숙해야만 그 식당에서 소비할수 있었다.그러니 주말에 영업하는 식당에 가서 외식을 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술을 마시는 몇몇 조선족학생들은 혹시 일요일이면 공소사에 가서 술안주로 과자같은걸 사서 매대에 올려놓고 술을 마시군 했다.
그래도 내게는 한가지 좋은 일이 생겼다. 우리 기숙사에는 연길 어느 중학교에서 교원사업을 하다가 온 대학생이 있었다. 결혼을 하고 딸까지 있는지라 주말마다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갈때마다 화식카드를 나한테 맡기군 했다.그러면 나는 카드 두개로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 아침, 점심 세끼를 두사람 몫의 밥을 먹을수 있게 되여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
그러다가 정말 울다 웃을 일이 생겼다.
그날도 일요일 아침이여서 내가 두사람 몫의 아침밥을 타다가 한창 먹고 있는데 식당에서 밥을 떠주는 아줌마가 종종걸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와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일개 대학생으로서 카드 하나로 어떻게 밥을 두몫이나 타 먹느냐고 꾸짖었다.
다른 밥상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학생들이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 보았다.
너무 망신스러웠던 나는 인츰 카드 두개를 꺼내 그에게 보이면서 우리 기숙사의 형님이 집에 가면서 나에게 카드를 사용하라고 맡겼는데 카드 두개로 두 몫을 받으면 안되는가고 되물었다.그랬더니 그 아줌마는 자기가 정황을 모르고 한 말이니 량해하라고 했다.
문제는 해명되였지만 그 많은 사람들앞에서 내가 밥을 많이 먹는 '밥통'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학교에 오기전까지도 농촌 탄광에서 몇 달간 일하던 사람이고 농촌에서 5년이나 일하다 왔으니 그야말로 밥을 잘 먹는 '밥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던 것이다.
그러나 책상머리에서 하는 공부는 필경 농촌의 체력 로동보다는 비할바가 아니므로 나의 식량도 점차 줄어들어 학기말쯤에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량식표준 화식에 기본상 적응되였다.
다른 곤난들도 있었지만 그런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중평 분교에서의 연변대학 학생생활의 첫 학기를 무사히 마치면서 농촌의 체력로동자로부터 대학생으로의 '과도기'를 마치고 학교의 학습과 생활에 점차 적응했다. 두번째 학기부터는 연길에 있는 연변대학 본부에서 나머지 대학생활을 순조롭게 마치고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1982년 1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교육사업 일터로 나갔다.

리상호 프로필
1955년 도문시 석현진에서출생
1973년 2월 하향지식청년으로 농촌에 하향
1982년1월 연변대학 수학학부 졸업
2015년 3월 퇴직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