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吉林朝鲜文报-吉林省委朝鲜文机关报
● 国内统一刊号: CN22-0030 邮发代号: 11-13
길림신문 > 기획

[나와 길림신문]특약기자라는 이름에 부끄럼이 없도록...

안상근      발표시간: 2025-07-31 13:09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 리성복

나는 가정에 환자가 있기 때문에 평소 늘 먼거리 외출을 못하고 이웃에 사는 항미원조 로전사인 임할아버지네 집에 가서 일손을 거들어주면서 보냈다. 

하루는 로전사 임할아버지가 “리동무, 내 신문을 주문했는데 참 볼만하오.”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였다.  알고보니 《길림신문》이였다. 그후부터 나는 매일 한문장도 빼놓을 세라 《길림신문》을 다 읽어 보았다.  한번은 신문에서 한국에 가서 남편이 힘들게 번 돈을 탕진해 버린 안해의 실례를 들어 지상토론을 펼치였다. 다 읽고 나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  나도 내가 생각되는바를 글로 써서 신문사에 보냈다. 당시《길림신문》연변분사 주임이였던 고 박금룡선생이 지상토론에 적극 참여해줘서 고맙다며 좋은 글들을 많이 써보내주기를 바랐다. 당시 남편을 저세상에 보내고 외부 출입도 못하고 반년동안 집에서 그림만 그리던 나에게는 남은 인생에 소중한 동반자가 생겼고 삶에 대한 용기가 생긴 셈이였다. 

글이라고 하면 늘 써오던 것이 사업총화, 학습체득, 선진재료 작성 등이였다.  사실 취재 원고를 쓰기가 쉽지 않았다. 수준 제한도 있지만 그때는 사진기가 없다보니 취재를 할때 사진사를 청해서 원고에 배합할 사진을 찍게 했다.  신문사에 보낼 사진 외에 취재 대상들에게도 사진을 인상해 주었고 또 기사가 발표되면 취배받은 로인들 집에 신문을 갖다 드리면서 닭알이거나 식료품들을 사들고 찾아갔다. 이런 일들은 반복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얻게 되였고 《길림신문》 특약기자라는 신분때문에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모두들 나를 따뜻하게 '리기자'라고 불러주었다. 

《길림신문》은 성급 당보로서 유익한 정보들을 신속히 전달하고 백성을 위하는, 대중들에게 인정받는 신문이였다. 당시 연길시 북산가두판사처 주임이였던 김광철은 가두 산하 9개 사회구역들에 《길림신문》을 주문하게 했는데 여러 사회구역 로인협회의 좋은 학습재료로 되였다. 

《길림신문》에서 백성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 사회에 보도하여 도움의 손길을 호소할 때는 물론,  취재 다니면서 어려운 사람과  안타까운 사연들을 만나면 나는 서슴없이 쌈지돈을 털군 하였다. 기실 특약기자라는 명칭에 손색없이 살아가기도 쉬운 일은 아니였다. 단순히 취재하고 원고만 쓰면 되는 일이 아니였다.  취재해보려는 우수한 인물들은 겸손하여 취재를 여러번 거부할 때도 있었다. 곤난한 이웃,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답답한 사연들이 계속하여 나를 찾아왔다. 이런 사연들은 모두 《길림신문》에 대한 믿음이였다. 어떤 때는 하루에 서너차례나 취재요청이 들어왔고 심지어는 밤에도 전화가 걸려왔다.

15년이 넘는 특약기자생활에서 잊지 못할 일이 있다. 2010년 10월 22일 아침, 손녀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들어섰는데 북산가두 당위에서 전화가 왔다. 북산가두 뢰봉반에서 연길시 의란진 금성촌 리흥국가정에 옥수수 가을걷이를 도와주러 간다는 것이였다. 부랴부랴  가두 판사처에 가서 의란으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길은 진창길이였고 밭은 산비탈에 있었다. 

나는 안간힘을 다해 제일 앞장에서 진창길을  달려가 100여명 지원자들을 렌즈에 다 담았다.  60이 넘은 나이로 지원자들의 앞장에 서야 좋은 사진을 찍을수 있으니 쉽지 않았다. 그날 한편으로는 지원자들과 함께  옥수수를 뜯는 일을 하고 한편으로는 취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취재가 끝나 집에 오려고 하니 모두들 점심식사를 하고 가라고 만류했다.  점심을 먹고 편편히 돌아오면 좋기는 하지만 이날 다른 보도매체의 기자들도 함께 취재를 했기에 나는 이 소식을 제일 먼저 신문에 내고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더는 지체할 수 없어 걷기 시작했다. 배는 고프고 수술한지 한달 되는 다리로 걷자니 맥이 풀려서 도저히 걷기 힘들었다. 길이 험해서 수차 넘어지기도 했다.  큰길까지 간신히 걸어서 뻐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오후 두시가 넘었다. 나는 밥 먹을 념도 하지 않고 인차 원고를 써서 사진과 함께 신문사에 보내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였다. 탕개가 풀리였는지 꼼짝할 맥도 없어서 자리에 누웠다. 이윽고 소학교에 다니는 손녀가 돌아와서 왜 오늘은 데리러 오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손녀는 내 사정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할머니는 이상해요. 다른 할머니들은 고운 옷 차려입고 놀러도 다니고 춤추러 다니기도 하면서 즐기는데..."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였다.  그날의 무리함때문에 내가 운신하기 어려웠기에 그후  동생이 일주일 동안 우리집에서 밥해주고 병원에 데리고 다니면서 극진히 간호했다. 

지금도 손녀는 항상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는 저에게 우수한 거울이였기에 저도 훌륭하게 자랐고 대학을 졸업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길림신문》의 덕을 많이 보았다.  《길림신문》에 열심히 원고를 투고하면서 특약기자라는 이름에 부끄럼이 없도록 활약했기에 나는 로년에 수많은 영예를 받아안았다. 나는 《길림신문》을 동력으로 더 값진 삶을 보내면서 불우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보내고 있으며 지금도 청소년 교양과 가정교육에서 《길림신문》을 훌륭한 교재로 삼고 열심히 강의하고있다. 


编辑:안상근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