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춘자

50년전 내가 살던 고향은 살기가 좋아서 해마다 이사오는 집들이 많아진 까닭에 급격히 큰 마을로 부상했다.
마을 한복판에 뽐프 한대가 보란듯이 박혀져있었는데 온 마을의 생명수를 해결해 주는 공동재산이고 보배였다. 집집마다 여기에 와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물이 어찌나 맑고 차가운지 뽐프를 잣으면 정갈한 샘물과 함께 작은 새우들도 나왔다. 여름이면 집집마다 이 물로 시원한 오이랭국도 해 먹었다.
제일 힘든 것은 아침과 점심때였다. 집집마다 크고 작은 물통들을 들고 나오는 바람에 한식경씩 줄을 서서 물을 길어야 했다. 동네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물긷는 부담을 덜려고 여름에는 바구니에 배추, 상추, 파...같은 남새들을 담아 들고 나와 씻었고 속벌같은 빨래도 빨았으며 어떤 애들은 큰 대야를 들고 나와 목욕도 하고 물장난질도 했다.
소학교에 다니는 언니가 엄마를 도와 동생의 기저귀를 빨다가 한 할머니가 “기저귀는 강변에 가 빨아야지”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대야을 들고 집으로 줄행랑을 놓은 적도 있었다. 이 일을 안 엄마는 “생명수에 오물이 들어가면 안된다. 어지러운 물건은 강에 가져가 씻어야 한다.”며 언니를 타일렀다.
춘하추동 뽐프는 조금도 쉴 사이 없었고 우리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보배였다.
겨울이 오면 뽐프대 주위는 널직한 얼음강판을 이룬다.남자애들은 좋아라 나무로 만든 스케트와 쪽박을 타고 녀자애들은 돌차기를 했다.
어느 날, 나는 친구와 같이 얼음강판우에서 미끄럼질하였다.그러다 뽐프를 보니 뽐프머리에 얼어붙은 얼음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렸다. 그것은 마치 얼음과자같아서 먹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장난치다보니 목까지 말라 반들반들한 그 얼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다. 철없는 나는 뽐프머리에 얼어있는 얼음에 혀를 댔다. 그런데 얼음을 핥은 것이 그만 혀가 얼음에 붙어버렸다. 순식간에 큰 란리가 벌어졌다. 나는 두 손으로 뽐프를 두드리며 엄마를 부르며 울고 같이 놀던 친구 까막눈 홍이는 사람살려요를 부르며 우리집으로 진동한동 달려갔다.
금방 위수술을 받고 집에서 휴양하던 아버지는 홍이의 괴상한 울음소리에 놀라 영문도 물어 볼사이 없이 맨발바람으로 달려 나왔다. 뽐프에 혀가 붙어있는 나를 본 아버지는 어쩔바를 몰라 입김으로 호호 불면서 “사람 살리오, 사람 살리오!”하며 소리쳤다.
내가 버둥거릴수록 혀는 점점 더 들어 붙었고 울음소리는 더 애처로웠다. 이때 뽐프곁 집에 살고있던 아주머니가 소래에 찬물을 담아 들고 나와 바가지로 물을 떠서는 나의 혀에 천천히 부었다. 순간, 내 혀는 거짓말처럼 얼음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혀바닥 껍질이 한벌 벗겨져 나갔다. 다른 한 아주머니는 젖힌 수건을 나의 입안에 밀어 넣어 혀를 감싼 다음 나를 둘러업고 집근처 위생소로 달려갔다. 의사는 조심히 피에 젖은 수건을 빼고 약물처치를 하고 나서 혀를 살펴보고나서 죽이랑 식혀 먹이라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새 살이 나오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급한 김에 내복바람에 맨발로 달려 나오시다보니 된 감기에 걸려 며칠동안 크게 앓았다. 나의 어처구니 는 장난질에 큰 난리를 벌렸는데도 아버지는 꾸지람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와 동네분들이 제때에 구해줬기에 나는 혀를 보존하고 장애를 면할수 있었다.
이 일이 있은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한테 여러가지 생활상식을 알려 주었다. 어렸을 때의 이 일은 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수 없는 상처와 교훈으로 머리속에 깊숙히 박혀져 생활이나 사업에서 급한 일에 부딪칠 때마다 덤비지 말고 조심하도록 채찍질 해준다.
10여년이 지난후 우리 집도 생활이 펴이여 부엌옆에 뽐프 한대를 박게 되었다. 뽐프는 우리집 보배로 되여 아버지는 오래 쓸수 있도록 해마다 정성을 쏟아 보양했다. 녹쓴 부분을 발견하면 썩썩한 알갱이천(砂布)으로 문지른 후 녹을 방지하는 은색 밑칠을 하고 칠이 마르면 파란 뼁기칠을 했다. 어머니는 매일매일 반들반들하게 닦았다. 어머니는 배가 불룩한 큼직한 오지물독 하나를 사 놓았다. 그리고 물독에 물을 채워놓는 일은 애들의 몫이였다.
우리 형제들은 하학하여 집에 돌아오면 순서를 짜가지고 뽐프물을 잣았다. 번마다 언니는 뽐프 잣는 기교를 우리에게 열심히 전수했다. 뽐프 아구리에 부어 넣을 마중물을 미리 남겨둬야 한다. 아구리에 물을 부어 넣은후 뽐프를 빨리 잣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때론 성공 못하면 옆집에 가서 물을 한대야 빌려와야 했다.....땀벌창이 되여 물을 잣아 독에 물을 채우면 어머니는 바가지로 물을 푹푹 떠서 가마에 부어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덮혀서는 설겆이를 한다, 빨래를 한다, 우리를 목욕시킨다... 하며 순식간에 독안의 물을 다 써버렸다.
그때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뽐프 잣기를 좋아했다. 그때는 약하고 키도 작아 뽐프대를 내리 누를 때는 동동 매달리는 재미가 있었다.때론 평형을 잃어 뽐프대에서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을 때도 있었지만 부모들이 잘한다는 칭찬을 해주니 아픈 줄도 모르고 다시 일어나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군 하였다. 매일 반복하는 이런 고달픈 생활은 우리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아버지는 집세를 받아 생활에 보태려고 편사를 지었다. 마침 농촌으로 하향하여 온 지식청년부부가 우리집 편사를 세맡았다. 세집은 뽐프가 없어 물을 길어 먹어야 했다. 여름에 물을 긷는 것 만 해도 힘든데 겨울에도 물통을 들고 물 길러 다니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두집사이에 벽을 구멍내고 둥근 비닐주머니를 길게 만들어 련결시켰다. 물이 수요되면 주머니를 자기집 항아리에 넣은후 뽐프를 잣으면 되었다. 이렇게 두집에서 뽐프를 같이 쓰니 편리하였다. 백성들의 지혜는 무궁무진했다.
그후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수도물을 먹으니 더는 물 길러 다니는 역사와 고생을 하지 않게 되였다.
오늘날에 와서 실용성을 잃는 그 시대의 보배, 사랑을 서로 나누고 지혜를 키우던, 넘어져 코피가 터지고 다리를 상하던 슬픈 이야기도 많던 뽐프는 인젠 박물관과 민속촌에 관람용으로 진렬되여 떠나간 한시기 력사를 설명하고 기록해주고 있다. 뽐프는 이미 오래전 기억속의 아득한 이야기로 되였지만 뽐프와 함께 울고 웃었던 정많은 이야기들 때문에 우리는 향수에 젖어들고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