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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의 문화와 예술을 더 널리 전파하고 싶어요”

김가혜      발표시간: 2025-12-12 11:17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동네 쉼터에서 ‘시대풍상’까지...

- 연변가무단 단장조리에서 연변문예지원자협회 주석까지...

- 국가 1급 배우 임향숙, 음악이 삶 그 자체인 려정

“좋아하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이보다 큰 행복이 있을가요?” 오로지 음악이라는 한 우물만 판 임향숙 성악가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고 말했다.

“음악을 시작한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예요. 그냥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했어요.”

국내외 정상급 무대를 누빈 지 30여 년, 성악가 임향숙은 음악 인생의 시작을 묻자 어린 시절 동네 휴식터에서 어른들 앞에서 열창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칭찬받으면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불렀다고.

그 작은 ‘마을무대’에서 시작된 려정은 이후 전국을 울리고 웃게 하며, 최근에는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가 선정한 전국 20인의 ‘시대풍상’ 문예지원자로 선정되는 영예로 꽃을 피웠다.

# “사람들 앞에 선 첫 무대는 동네 휴식터였죠.”

임향숙의 음악적 재능은 유년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엄마 말씀으로는 제가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음악에 특별히 민감했다고 해요. 유치원 시절이면 나이가 어렸을 텐데 음반 가게 앞을 지나면 꼭 멈춰서서 노래를 한참 듣다가 가사를 인츰 따라 부르군 했다죠.”

여름이면 동네 사람들이 그늘에 모여 얘기를 나누던 휴식터가 있었는데 어린 임향숙은 그 사이로 파고들어 마치 콘서트를 열듯이 열창을 이어갔단다. 어린 아이가 노래를 너무 잘 부르니 동네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의 관객이 되여주었다.

딸의 재능을 눈여겨본 아버지는 아침마다 딸을 데리고 강변 산책을 나가서는 사람이 적은 합수목을 찾아 물이 흐르는 소리를 이겨내는 발성 연습을 시켰다. 특별히 음악에 조예가 깊은 것은 아니였지만 어머니를 닮은 딸의 목소리를 믿으며 흥취를 전적으로 응원했던 것이다.

자연 속에서 길러진 그 목소리는 운명적으로 한 음악교원의 귀에 닿았다.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들은 도문시철로2중(초중)의 음악교원이 “우리 학교에 와서 노래를 해보지 않겠니?”라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임향숙은 전학을 선택했고 학교에서 음악경연이나 예술절이 열릴 때마다 두각을 나타냈다.

딸이 진심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전문적으로 배울 것을 권유했다. 그런데 학업성적도 우수했기에 어머니는 처음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래도 결국 딸의 열정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당시 가정생활 형편이 넉넉치 않았지만 부모님은 주말마다 딸의 손에 용돈 5원을 쥐여주며 연길에서 개인 지도를 받게 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혼자 기차를 타고 사람들 틈에서 씨름하며 음악을 배우러 다녔어요. 왕복 기차표가 3원이였고 남은 돈으로는 밥을 사먹었어요.”

그렇게 도문과 연길을 오가며 음악을 이어가던 중, 16세 때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민족성악반(벨 칸토 창법) 모집 소식을 접했다. 그때 벨 칸토 창법을 배워주던 렴명자 선생님이 민요를 좋아하던 제자에게 시험에 도전해보길 권했다. 5명의 정원에 수백명의 경쟁자가 몰린 치렬한 시험을 뚫고 합격하며 그의 음악 인생은 전문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 순수한 즐거움에서 중국음악학원까지, 끊임없는 도전

“민족성악반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전문 교육을 받게 되였어요. 전화자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체계적으로 민요를 배우기 시작했죠.”

좋아하는 것을 배우는 나날은 순식간에 흘러갔고 3년후 졸업을 하면서 그는 연길시조선족예술단(지금의 연길시조선족무형문화유산보호중심)에 배치되였다. 바로 다음날부터 전 주 순회공연을 돌면서 독창무대에 섰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입단 이듬해인 1990년 1월에는 연길에서 열린 제1회 전국조선족성악콩클에서 임향숙은 창작곡 <산새들새 날아든다>를 불러 민족성악 금상을 수상했다.

“전국의 유명한 조선족 가수들이 대거 쏠린 대회였는데 햇내기가 금상을 받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 순간부터 그는 이 상에 걸맞는 가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후로도 륙속 크고 작은 대회에 올라 수차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1994년에는 또 중국음악학원 연수 기회를 얻었다. 엄격한 서류 심사와 층층의 선발을 거쳤다. 노력하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오고 성공은 기회가 만든다는 말을 립증했다. 

“더 큰 무대에 서 보니 부족점이 보이더라구요. 어쩜 이렇게 다들 잘할 수 있을가 싶었어요.”

넘치는 인재들 속에서 그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중국음악학원에서 주의위 교수의 학생으로 있으면서 당시 원장이였던 고 김철림 교수의 가르침도 받으면서 다양한 쟝르를 접했고 조선족민요 기법은 물론 중국민요 기법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3년 내내 ‘3호학생’이였어요. 그만큼 정말 배우고 또 배웠던 시간이였습니다.”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한어로 된 노래 <중국 대지에서>를 회보공연식으로 불렀는데 성과를 선보이며 큰 호응을 얻었다. 3년의 공부가 창법과 기교를 다듬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관을 확장하는 소중한 시간이였음을 모두에게 톡톡히 알린 셈이다.

# 대중과 하나 되는 무대,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는 일”

그러다 2000년에 임향숙은 당시 연변가무단의 단장으로 있었던 박서성 단장의 제의를 받고 연변가무단에 입단하며 고향의 대표 예술단체에서 자리를 잡았다.

10년간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 쌓은 경험과 닦은 기초를 바탕으로 연변가무단으로 전근한 임향숙은 독창무대를 중횡무진하고 눈부신 성적을 거두며 성악부 부장에서 얼마전까지 단장조리를 력임했다. 노래 뿐만 아니라 행정 실무를 경험하며 가무단에서의 20여년은 실질적인 배움의 시간이 되였다고 감사의 뜻을 전했다. 

수십년간 예술 사업에 몸담으며 수많은 대형 무대에서 빛나는 순간을 수도 없이 누렸다. 가슴 벅찬 순간들도 많았지만 수레에 앉아 산간 마을 위문공연을 갔던 기억이, 몇사람 안되는 관객들 앞에서 열창했던 추억이 여전히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종종 사람들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다녀야 하는 위문공연이 힘들지 않냐고 물어요. 그러면 전 고민 없이 이렇게 말하죠. 저는 에너지를 받으러 간다구요.”

추운 겨울 그의 손을 꼭 잡아주던 촌민들, 집에서 가져온 먹거리를 쥐여주던 순간들은 모든 려정의 고단함을 잊게 하는 감동이였다. 그중에서도 변방초소에서 근무하던 한 군인을 위한‘1인 공연’은 큰 감명을 주었다. 지금까지도 특별하게 마음속에 남았다.

“그 분은 임무 때문에 공연을 보지 못했어요. 제가 ‘노래 한곡 불러드릴게요.’라고 했어요. 그분의 감동 어린 눈빛을 보며 저도 큰 감촉을 받았던 것 같아요. 나 또한 일터를 돌아가 맡은 바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지 하는 결심을 다시 한번 굳혔어요. 서로에게 긍정 에너지를 준 순간이였죠.”

그래서 그는 매번 위문공연 길에 오를 때면 셀렌다고 말한다. 에너지를 받으러 가기 때문이니까.

#‘붉은 진달래’ 피워내며 문화를 심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2023년 5월 연변문예지원자협회 초대 주석으로 선출되며 본격적인 체계 속으로 이어졌다. 당시 회원이 1,000명도 안되던 협회는 그가 <문예지원자 관리방법>을 제정하고 스마트 플래트홈을 도입하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현재 회원 수는 7,000여명으로 성장했고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1,800여명의 기층 문예 핵심 인력을 양성했다.

‘예술로 향촌을 밝히다’, ‘무형문화유산 전승교실’ 등 특색 활동을 기획하며 지난해까지 진행된 문예지원 활동은 1,000여회, 수혜 인원은 연 100만명을 넘어섰다. 이 프로젝트는 중공중앙 선전부 ‘4개 100’ 우수자원봉사조직, 중국문련 ‘가장 아름다운 문예자원봉사 프로젝트’ 등 국가급 영예도 련이어 수상했다.

“우리는 단순히 ‘문화를 전달’하는 데만 그쳐서는 안 됩니다. ‘문화를 심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해요.”

협회는 정기적으로 예술인을 기층에 파견해 지역 예술단과 향촌 합창단을 지도하며 지난해만 200회 가까운 공연을 열었다.

조선족 성악가로서 그는 민족문화 전승을 봉사 활동에 녹여냈다. 지난 10월, 중국문학예술계련합회가 추진한 ‘시대풍상’ 문예지원자 홍보 및 선발 활동의 결과가 발표된 가운데 그는 수많은 후보자들을 제치고 전국 20명의 최종 선정자중 한명으로 되였다.

그러나 그에게 이 영예는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땀 흘린 모든 문예지원자들과 그들이 만난 수많은 대중들의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길림성문련과 연변조선족자치주문련의 적극적인 추천과 전폭적인 지지 없이는 불가능했으며 무엇보다 수년간 함께 해온 팀원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의 무대가 즐거움을 전했다면 주민들이 우리에게 돌려준 건 더 소중한 감동과 힘이였어요.”

# “좋아하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이보다 큰 행복이 있을가요?”

이제 그는 한걸음 뒤로 물러나 후배들에게 무대를 넘겨주는 것도 선배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뉴미디어 시대에 적극적으로 발맞추고 있다.

2022년부터 연변가무단 틱톡 계정을 운영하며 라이브 방송으로 조선족 가무와 무형문화유산을 알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훨씬 전부터 개인계정 틱톡 라이브를 통해 매일 새로운 무대를 만들고 가족 같은 팬들과의 소통을 이어가며 꾸준히 노래로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열정은 직업을 넘어 삶이 되였다.

“매일 무대에 오른다는 마음으로 준비해요. 팬들과 하루 일과를 나누는 게 이제 제 일상이 됐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평생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몰라요.” 어머니가 바랐던 학업의 길 대신 오로지 음악의 한 우물만 파고든 그에게 후회는 없다. 평생을 노래만 해온 그에게 음악은 직업이 아닌 삶 그 자체이다.

진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또 “본인의 마음이 원하는 길로 나아가라.”는 조언을 건넸다. “정말 사랑하는 일을 한다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딜 수 있거든요.” 그의 인생 경험이다.

앞으로도 그의 목표는 변함없다. 그리하여 “제 음악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노래를 부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나아가 음악회와 단독 콘서트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며 연변의 문화와 예술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계획도 내비쳤다.

성악가 임향숙은 여전히 무대 우에서, 그리고 무대 밖 대중 곁에서 노래로 사람들을 만나고 에너지를 나누며 ‘붉은 진달래’처럼 문화예술 분야에서 문화의 꽃을 피워내고 있다. 

/길림신문 김가혜 기자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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