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철 대련 영성(永星) 테크놀로지 그룹 회장
일본 현대 건축은 기능성과 기술 중심의 세계적 흐름을 수용하면서도, 전통적 공간 개념인 ‘마(間)’와 자연관을 결합해 독자적 미학을 형성해 왔다. 절제와 비움을 중시하며, 빛과 바람, 계절의 변화를 공간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점이 특징이다. 첨단 구조 기술과 미니멀한 형태, 섬세한 사용자 경험의 결합은 일본 현대 건축을 세계 건축계에서 차별화한다.
이러한 장인성과 세계성을 지닌 일본 현대 건축계에 중국 조선족 출신 건축가로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있다. 최영철 회장은 2000년 대련 영성(永星) 테크놀로지 그룹을 창립해 디지털화와 BIM(건축 정보 모델링) 기술을 바탕으로 최적화 설계를 실현해 왔다. 특히 건설 산업 전반의 자원 배치 효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며 일본 기업들과 상호 보완적 협력 모델을 구축했다.
창업 당시 4명에 불과하던 회사는 현재 직원 수 200명에 가까운 규모로 성장했으며, 이 중 90% 이상이 건축 설계 전공자다. 프로젝트 수요는 꾸준히 늘었고, 년 매출은 1억원을 돌파했다. 이는 신용을 중시한 경영과 전통적 설계 써비스에 지능화 기술을 접목해 온 결과다.
일본 건축계 역시 영성 테크놀로지 그룹의 디지털화 및 BIM 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다. 최 회장은 이를 기반으로 국제 건축 설계 시장을 개척하며 협력의 모범 사례로 자리 잡았다.
최영철 회장은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명예회장, 전국조선족기업가협회 집행회장을 력임했으며, 현재 대련 연변상회 회장과 연상총련합회 상무부회장을 맡고 있다.
최 회장은 기업인에 그치지 않고 ‘나눔의 천사’로 불리며, 기타 연주와 작사·작곡을 겸하는 음악인이자 예술가로도 활동해 왔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철학을 실천해 온 그는 중·한·일 언론을 통해 기업과 문화를 아우른 탁월한 인생 설계자로 조명받고 있다.
춘풍화우 속에서 길러진 사람됨의 뿌리
춘풍화우(春風化雨). 봄바람과 봄비가 소리 없이 대지를 적시듯, 온화한 말과 태도로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힘을 이르는 말이다. 한 인간의 인성이 형성되는 과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눈에 띄는 훈계보다 일상의 태도와 분위기, 말없는 본보기가 아이의 삶을 천천히 빚어낸다.
“사람의 성격 형성은 유아기와 청소년기의 성장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따뜻하고 조화로운 가정 분위기는 아이를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운다.” 최영철은 자신의 성장기를 돌아보며 이 말을 실감한다고 말한다.
그는 1963년 길림성 화룡에서 지식과 인품을 중시하는 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최성태는 중학교 교사로 출발해 교장, 화룡현 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을 지낸 교육자였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성적보다 태도를 먼저 가르쳤다. “행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며,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늘 한 걸음 양보해야 한다”는 말은 집안의 생활 규범과도 같았다.
어머니 나연순은 말보다 행동으로 삶을 가르친 사람이었다. 검소하지만 린색하지 않았고, 바쁘지만 가족을 향한 애정에는 린색함이 없었다. 자애롭고 성실한 어머니의 뒤모습은 어린 최영철에게 ‘책임’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그는 이 가정 안에서 사랑받는 법과 함께 사랑을 건네는 법을 배웠다.
청소년기 최영철은 총명함과 활달함으로 두각을 나타냈지만, 결코 튀거나 앞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학업에 성실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신뢰받는 존재였다. 성적이 좋았던 리유는 경쟁심보다는 ‘배우는 것에 대한 즐거움’에 가까웠다. 수학 문제 하나를 풀더라도 답보다 과정의 론리를 중시했고, 막히는 친구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옆에 앉아 함께 풀어보는 학생이였다.
1983년, 그는 화룡현에서 손꼽히는 수학 인재로 알려졌고, 덕·지·체를 고루 갖춘 길림성 ‘삼호학생(三好学生)’으로 선정되였다. 이는 단순한 학업 성취를 넘어, 성실한 태도와 책임감 있는 생활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이다.
같은 해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련리공대학교 공업 및 민간 건축 전공에 합격했다. 고향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향하던 날, 어머니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오래도록 놓지 않았다. “손해를 보는 것이 곧 복이니, 작은 리익을 탐하지 말거라.” 그리고 옷주머니에서 100원을 꺼내 건네며, “돈 문제만큼은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피해를 주는 선택은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 짧은 말은 대학 시절 내내, 그리고 이후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마다 그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기준이 되였다. 대학 생활 속에서도 그는 성적 경쟁보다 협업과 신뢰를 중시했고, 공동 과제에서는 늘 책임을 먼저 떠안는 학생이였다.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도 ‘무엇을 만들 것인가’보다 ‘누구를 위해 설계하는가’를 먼저 고민했다.
이처럼 그의 청소년기와 대학 시절은 성취를 향한 질주가 아니라 사람됨을 다져가는 시간이였다. 부모의 가르침은 삶의 규범이 되였고, 배움은 경쟁이 아닌 성장을 위한 도구가 되였으며, 그 가르침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평생의 처세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기업의 동사장이 된 이후에도 그가 부모의 가르침을 잊지 않는 리유다. 헌신과 나눔의 정신을 바탕으로 베풂을 통해 신뢰를 쌓고, 진정성으로 세상과 마주할 수 있었던 힘 역시 그 시절, 춘풍화우 같은 교육과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가능에 도전해 가능의 길을 열다
모든 성공에는 출발점이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최영철은 주어진 한계를 의심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온 용감한 개척자다.
1987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길림성 장춘시에 배치되여 기계전자공업부 제9설계연구원에서 공업 및 민간 건축 구조 설계 업무를 맡았다. 현장은 젊은 기술자에게 결코 만만한 공간이 아니였지만, 그는 주어진 일 앞에서 늘 한 걸음 더 고민하는 태도로 임했다.
어느 날 제1자동차제조공장 조립 작업장 설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내진 기준에 따라 세로 기둥 사이에 철골 지지대를 설치해야 했는데, 기존의 X자형 강철 지지대는 자동차 조립 생산라인의 동선을 크게 방해했다. 구조적 안전성과 생산 효률이 충돌하는 난제였다.
1991년, 최영철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익힌 기하학과 구조 역학 원리를 구조 계산에 적용하며 수차례의 분석과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그 결과, 기존 방식의 한계를 뛰어넘는 ‘사다리형 강구조 지지대’를 고안해냈다. 이 설계는 구조적 안정성은 물론, 작업 동선을 확보해 생산 공정에도 적합했고, 미관 면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혁신적 대안이였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는 처음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설계안을 제출했지만 동료들의 반응은 랭담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과장과 동료들을 수차례 찾아가 계산 근거와 구조적 타당성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설득을 이어갔다. 그의 끈질긴 집념은 결국 신뢰를 얻었고, 설계안은 현장에 적용되였다. 시행 이후 결과는 분명했다. 작업 효율은 개선됐고, 안전성 역시 검증되었다. 그해 그는 제1자동차제조공장으로부터 1등 공로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이 경험은 젊은 기술자였던 그에게 더 큰 도전을 향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는 또한 뛰여난 외국어 실력으로 한·일 번역 부문 1등상을 받았고, 소속 기관은 그의 성과와 공로를 높이 평가해 주택 한 채를 배정했다.

최영철 회장과 그의 부인 리순실
중학교 시절부터 함께 성장해 온 리순실과의 인연도 이 시기에 결실을 맺었다. 밝고 성실했던 두 사람은 각각 반장과 부반장으로 학업과 책임을 나누며 서로를 자극하는 동반자였다. 같은 해 대학에 합격해 이순실은 상하이 동화대학교 화섬 전공에 진학했고, 오랜 시간 쌓인 신뢰는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이어졌다. 1998년, 주택을 배정받은 뒤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과 며느리의 이름에 공통으로 ‘순(顺)’ 자가 들어 있다며 크게 기뻐했고, 최영철은 그 마음을 담아 큰 ‘순’ 자를 써 벽에 걸었다. 그 글자 앞에서 가족 모두가 웃음을 나눴다.
장춘에서 보낸 5년은 짧지 않은 시간였었지만, 당시 그의 월급은 한 달 57원에 불과했다. 그는 설계 실력으로 스스로를 증명하는 길을 택했다. 단순한 기관 소속 엔지니어를 넘어, 구조 설계의 본질을 꿰뚫는 전문가가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주택 구조 설계를 연구하던 중 그는 일본의 내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일본어에 능통했던 그는 선진 기술을 직접 배우고 싶다는 열망을 키워 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 초기 단계로, 일본과의 교류 자체가 쉽지 않았고 일본 유학은 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속에서 이미 다음 도전을 향한 첫발을 내딛고 있었다.
일본 연수에서 쌓은 성공의 기반
로신(魯迅)은 “세상에는 본래 길이 없지만,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된다”고 말했다. 최영철은 바로 인생의 길목에서 남들이 가지 않은 방향으로 용감하게 첫발을 내디딘 사람이였다.
1990년대 초, 그는 북경 객차제조공장의 구조 설계 업무를 맡으며 북경 출장이 잦아졌다. 그는 이 시간을 단순한 업무 일정으로 흘려보내지 않았다. 천안문 광장에 나가 건축 업계에 종사하는 일본인을 직접 찾기 시작한 것이다. 광활한 광장의 인파 속에서 그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일본인을 가려내고, 미리 준비한 명함과 련락처를 건네며 서툰 일본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렇게 스무 명이 넘는 일본인과 인연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도 그는 인연을 놓지 않았다. 안부 편지를 보내고, 명절이 되면 정성스럽게 인사를 전했다. 준비된 노력은 결국 기회를 불러왔다. 답장을 보내온 사람 가운데 한 명이 일본의 한 건축설계사무소 대표였던 것이다. 그는 중국을 방문해 직접 만나고, 최영철이 근무하는 기관을 둘러보고 싶다는 뜻을 전해왔다.
당시 최영철이 몸담고 있던 기관 역시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일본 측 인사를 초청한 그의 적극적인 시도는 조직 내에서도 높이 평가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 측 대표를 포함한 네 사람이 장춘을 방문했고, 상호 교류 속에서 신뢰와 우정이 쌓였다. 이후 일본 측의 제안으로 세 명의 직원을 일본에 파견해 연수를 진행하기로 결정되였고, 일본 측은 최영철을 직접 지명했다. 기관의 심의를 거쳐 그는 동료들과 함께 일본 연수를 떠나게 되였고, 오래동안 품어 온 그의 꿈은 마침내 현실이 되였다.
1992년 10월, 그는 일본 땅을 밟으며 또 다른 도전에 직면했다. 그의 주된 업무는 건축 시공 도면 설계였다. 중국에서는 구조 설계를 주로 담당했지만, 일본에서는 구조 설계는 물론 건축 도면 작성과 내진 설계 도면까지 모두 직접 수행해야 했다. 도면의 축척과 배치, 선 하나의 굵기와 문자 표기까지도 엄격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일본은 거시적인 문제를 미시적으로 분석해 해결하는 사회였고, 한 줄의 선에도 책임과 완성도를 요구했다. 이는 설계 기술뿐 아니라 사고의 깊이와 태도까지 요구하는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밤낮없이 공부하며 현장과 책상 사이를 오갔다. 리해되지 않는 부분은 반복해 확인했고, 작은 실수도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강인한 의지와 끈질긴 노력 끝에 그는 일본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일본인들조차 감탄할 만큼 완성도 높은 설계 도면을 완성해냈다. 그것은 단순한 기술적 성과가 아니라, 땀과 집념, 직업에 대한 책임감이 응축된 결과였다. 회사 대표는 그의 도면을 사내에 전시하며 모범 사례로 소개했다. 결국 그는 실력자들이 즐비한 일본에서 과장으로 승진하며 실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최영철은 당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기술보다도, 일에 임하는 철저한 책임감과 성실한 업무 태도였습니다.”
이 일본 연수는 그의 인생에서 단순한 해외 경험을 넘어, 이후 국제 무대에서 도약할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이 되였다.
중국 건축 설계 BPO의 문을 열다
1990년대 중반, 중국의 건축 설계 산업은 여전히 내수 중심 구조에 머물러 있었다. 해외 설계 시장과의 연계는 드물었고, ‘아웃소싱’이라는 개념조차 산업 전반에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다. 이런 환경 속에서 최영철의 선택은 개인의 진로 결정이 아니라, 산업 구조의 가능성을 앞서 내다본 선구적 시도였다.
일본에서의 연수와 실무 경험을 통해 그는 한 가지 구조적 모순을 발견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설계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높은 인건비와 만성적인 기술 인력 부족으로 설계 비용과 업무 부담이 과중했다. 반면 중국은 우수한 리공계 인재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나, 국제 기준의 실무 경험과 시장 진입 통로가 부족했다. 최영철은 이 두 시장 사이의 간극에서 새로운 산업 모델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그가 구상한 해법은 일본의 설계 주문을 중국에서 수행하는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 방식이였다. 이는 단순한 비용 절감 차원의 외주가 아니라, 설계 품질과 국제 기준을 충족시키는 고부가가치 아웃소싱 모델이었다. 당시 중국에서 건축 설계를 해외 프로젝트와 직접 연계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고, 그의 시도는 사실상 중국 건축 설계 BPO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었다.
1995년, 그는 일본 회사와의 공동 창업을 결단하고 귀국을 선택했다. 안정적인 일본 생활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돌아온 이유는 분명했다. 개인의 기술을 쌓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일본에서 체득한 표준과 시스템을 중국 산업의 토양 우에 이식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귀국 창업의 거점으로 대련을 택한 것도 전략적 선택이였다. 대련은 공업 기반과 인재 풀, 그리고 국제 교류 여건을 두루 갖춘 도시였다.
같은 해 12월, 그는 일본 측 파트너와 함께 대련리공대학교를 방문해 협력 기반을 마련했다. 교내 영빈관 내 35평 규모의 공간을 작업실로 제공받으며, 설계 BPO의 실험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이곳은 단순한 사무 공간이 아니라, 국제 설계 표준을 중국 인재들에게 전수하는 현장이였다.
최영철은 설계 업무와 동시에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주로 토목공학과 대학원생들을 선발해 일본 기준의 시공 도면 작성, 구조 계산, 내진 설계 방식 등을 직접 지도했다. 학생들은 실무에 참여하며 수입을 얻는 동시에 국제 프로젝트 경험을 쌓았고, 이는 중국 건축 설계 인재 양성 방식에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이 과정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이후 중국 각지의 설계 기관과 기업에서 핵심 인력으로 성장했다. 이는 개인 차원의 교육을 넘어, 중국 건축 설계 산업의 기술 저변을 넓히는 효과로 이어졌다.
이 밖에도 그가 직접 길러낸 수많은 제자들이 현재 중국 각지와 해외의 건축 설계 현장에서 핵심 인력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성장 이야기를 들려주며 최영철은, 인재 양성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성과라며 제자들에 대한 깊은 자부심과 감격을 숨기지 않았다.
최영철의 BPO 모델은 ‘값싼 로동력’에 의존한 하청 구조가 아니라, 기술 표준과 품질 관리, 책임 체계를 함께 수출하는 고급 아웃소싱의 형태였다. ‘최첨단 기술과 투철한 직업윤리, 합리적인 비용과 최상의 써비스, 록색 환경 보호’를 경영 슬로건으로 내건 대련영성컴퓨터설계유한회사는 이러한 인재 육성과 기술 혁신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대련시 정부로부터 30만원의 장려금을 수여받았으며, 대련시 인사국으로부터는 ‘대학 졸업생 배치 전 지정 연수 기지’로 지정되는 등 제도적 신뢰와 공공적 평가를 함께 얻었다.
돌이켜보면, 최영철의 선택은 개인의 창업을 넘어 중국 건축 설계 산업이 세계 시장과 련결되는 하나의 통로를 연 사건이였다. 그는 일본에서 배운 기술을 ‘개인의 자산’으로 머물게 하지 않고, 산업의 구조로 전환시킨 BPO 선구자였다. 이 점에서 그의 행보는 중국 건축 설계 산업사에서 주목할 만한 전환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동아시아 분업 구조의 한계 속에서 탄생한 독자적 창업의 길
1990년대 동아시아 산업 구조는 빠르게 재편되고 있었다. 많은 중국인 기술자와 설계 인력은 ‘필요하지만 대체 가능한 존재’로 취급되곤 했다. 최영철이 몸담았던 일본 회사 역시 이 같은 구조의 축소판이였다.
그는 일본 회사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고, 실제로 회사 수익 창출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중국 직원들에게 지급된 임금은 월 200원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내 일반 임금 수준이 이미 500원을 넘어섰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임금 격차가 아니라 산업 협력 과정에서 고착된 위계와 인식의 문제였다. 그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합리적 근거를 제시했지만, 일본 측의 답변은 단호했다.
“중국의 인건비는 원래 그 정도다.”
이 말은 개인에 대한 평가라기보다, 동아시아 분업 구조 속에서 중국 인력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이였다. 그는 그 순간, 기술 이전과 협력이 상호 존중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문제는 임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실질적인 핵심 인력이였음에도, 회사 내 의사 결정 과정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직원 관리나 팀 운영조차 자률적으로 할 수 없었고, 조직을 위한 기본적인 활동조차 개인 비용으로 감당해야 했다. 이는 일본 자본과 중국 인력 사이에 형성된 비대칭적 권력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는 5년간 축적해 온 설계 자료와 성과를 남긴 채, 빈손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이는 개인의 좌절이였지만 동시에 당시 중한일 산업 협력 구조의 한계를 응축한 장면이기도 했다.
그는 이 경험을 패배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선택의 출발점이였다. 그는 일본 기업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대신, 보다 수평적인 협력 가능성을 직접 모색했다. 다음 날, 그는 자신의 경력과 설계 력량을 정리한 팩스를 일본의 몽진(梦真) 주식회사에 보냈다. 이는 하청 인력이 아닌 ‘전문 파트너’로서 자신을 제안한 행위였다.
몽진 주식회사와의 협업은 이전과 달랐다. 일본 측은 그의 전문성을 직접 검증했고, 언어와 기술을 공유하는 동등한 협력자로 대했다. 일본의 한 학교 시공 설계 프로젝트를 맡긴 뒤, 그는 단기간에 일본 기준에 부합하는 도면을 완성해 보냈다. 일본 측이 놀란 것은 단순한 작업 속도가 아니라, 중국에 이미 일본식 설계를 내재화한 전문 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였다.
이 협업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는 중·일 산업 협력이 단순한 ‘저비용 하청’ 구조를 넘어, 기술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파트너십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1996년, 그는 대련에서 개인사업자 ‘영성(永星) 컴퓨터 제도사’를 설립했다. 초기 자본은 부족했지만, 그는 대학과 련계해 인재를 양성하고 일본의 설계 수요를 중국에서 처리하는 구조를 구축했다. 이는 후날 BPO(Building Process Outsourcing)의 초기 형태로 평가될 수 있는 시도였다.
1998년 ‘영성 컴퓨터 설계 유한회사’, 2006년 ‘대련 영성 건축과학기술 유한회사’로의 발전 과정은, 개인 창업의 성공을 넘어 동아시아 산업 협력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일본의 기술 표준, 중국의 인재, 그리고 조선족 기업가의 중개 역량이 결합된 이 모델은, 중·일 협력이 대등성과 상호 이익을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하다는 사실을 립증했다.
최영철의 창업사는 한 개인의 용기 있는 선택인 동시에, 동아시아 산업 협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조용히 제시하는 산업사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영성인(永星人)은 사람의 마음·대응력·창의력을 갖춰야 합니다”
최영철의 사업은 날로 성장해 갔다. 국가의 개혁개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일에 대한 집념은 그를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회사는 ‘대련 영성 과학기술 그룹(EISEI)’으로 발전했으며, 본사는 지금도 대련에 있다. 일본의 에이세이 코퍼레이션을 비롯해 다수의 계렬사를 거느리고 있고, 일본에만 50여 개의 고정 고객사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그의 기술력뿐 아니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과 신뢰의 결과였다.
그는 회사 경영의 첫 번째 원칙을 언제나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로 정리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성인(永星人)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 대응력, 창의력’을 갖춰야 합니다. 고객이 납득할 수 있는 도면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술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어떻게 해야 만족할 수 있는지를 마음으로 느끼고 머리로 깊이 생각해야 하지요. 사람을 중심에 두고 고민하다 보면, 스스로의 경험과 지식, 사고의 한계를 깨닫게 되고, 그 지점에서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성장이 멈추지 않는 사람이 모이는 회사, 그것이 대련 영성 그룹이 지향하는 인간 성장 모델입니다.”
1995년 12월 설립 이후, 회사는 기술력과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 그리고 경험 많은 인재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 현재는 세계 각국의 건축 현장에서 협력과 제휴를 이어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일본 고객들로부터는 신속한 대응을 통한 업무 효율 향상과 대폭적인 비용 절감 효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중국 내에서는 보다 나은 근무 환경 조성과 새로운 고용 기회 창출, 나아가 건축 설계 분야의 기술·품질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창업 초기에는 자금도, 설비도, 인력도 부족했다. 직원은 고작 네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그는 “물에 부딪히면 다리를 놓고, 산을 만나면 길을 낸다”는 각오로 수많은 밤을 불빛 아래에서 보냈다. 땀으로 그려낸 도면들은 결국 그의 삶의 미래를 하나씩 설계해 나갔다.

지난 2025년 10월 19일, 일본 조선족 경영자협회와 도꾜 연변상회 회장단에서 ‘대련 영성 과학기술 그룹(EISEI)’에 찾아와서 경험 소개를 듣고 간담회를 가졌다.
그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꼈고, 직원들 역시 회사를 집처럼 여겼다. 대련에 회사를 막 설립했을 당시,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입사자에게 대련 호구 문제를 해결해 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다른 기업들은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웃었지만, 그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성장 전략이라고 믿었다. 그 선택은 결과로 증명되었다. 현재 회사에는 약 20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15년 이상 장기 근속한 직원도 60명이 넘는다. 이들은 모두 사람을 중시하는 CEO를 신뢰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는 말한다.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사람됨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돈을 빌려주고도 돌려받지 못하는 일 등 온갖 일을 겪게 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선한 마음을 지키고, 의롭지 못한 이익을 탐하지 않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를 중국식 표현으로 ‘정에너지(正能量)’라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사업에서의 신용을 매우 중시한다.
“기업과 기업 간의 신뢰, 그리고 회사와 직원 간의 신뢰는 오래 성장하는 기업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입니다.”
한 직원이 일본 연수를 마친 뒤 귀국하자마자 사직하고, 몰래 일본의 합작 파트너 회사에 입사한 사실을 알게 되였을 때 그는 그 회사와의 거래를 단호히 중단했다. 반면, 한때 직원이였다가 독립해 나간 이들과는 오히려 더 깊은 신뢰 관계를 유지하며 후날 든든한 협력 파트너가 되였다. 그 결과 일본에서 주문량이 두 배 가까이 늘어났을 때도, 오랜 파트너들과의 협력을 통해 무리 없이 이를 감당할 수 있었다.
회사는 지난 27년간 수많은 시련을 겪어 왔지만, 그는 언제나 미소로 미래를 맞이하고 있다. 초기의 2D 설계에서 출발한 사업은 3D, BIM, 영상 제작, 대형 행사 기획으로까지 확장되였고, 오늘날에는 설계에서 시공까지 아우르는 고급 시스템 써비스 기업으로 경쟁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천사와 같은 나눔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다
최영철은 공익 활동을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겨왔다. 그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삶의 태도이자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뿌리내린 가치였다.
1996년, 막 창업해 형편이 넉넉하지 않던 시기에도 그는 대련조선족학교 설립을 위해 2만원을 기부했다. 이후 장학 사업과 각종 조선족 단체 후원에 꾸준히 나섰고, 2019년에는 연변대학교 설립 70주년을 맞아 10만원을 기부하며 교육 발전에 힘을 보탰다.
일본에서 기업 활동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일본 조선족 사회의 각종 행사에 해마다 기부금을 전달해 왔다.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회장 박춘화)가 주최하는 ‘세계조선족 행사’에 지속적으로 후원해 온 것 역시 그의 나눔 철학의 연장선이었다.
이에 대해 박춘화 현임 회장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최영철 회장님처럼 오랜 기간 기부를 통해 선한 영향력을 실천해 온 분은 정말 드뭅니다. 2017년 우리 협회가 설립된 이후 지금까지 진행한 모든 행사에 한 번도 빠짐없이 후원하였고, 올해도 메인 후원자로 나섰습니다.”
그는 그동안 조선족 기업가협회 회장을 력임하며 수많은 기부와 후원으로 민족 사회의 발전에 헌신해 왔다. 이러한 공로로 2005년 전국공상련으로부터 ‘최우수 기업가 대표’로 선정되였고, 2006년에는 ‘애국 화상(華商)’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가정 역시 화목하다. 아들 최원은 일본에서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는 가정과 사회, 기업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소중히 여긴다.
그는 말한다.
“앞으로도 EISEI는 혁신을 멈추지 않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건축 비용과 첨단 기술로 국내외 고객에게 보답하겠다”고.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기자의 머리속에는 수많은 설계도가 조국의 땅 우에서 꽃피는 장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는 지금도 세계를 향한 길 우에서 중국 조선족의 자부심과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문예 창작과 사회적 나눔의 길에서
최영철 회장은 ‘성공한 기업인’이라는 수식어에만 머무르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치렬한 경영 현장 속에서도 음악을 놓지 않는다. 직접 곡을 쓰고 기타를 연주하는 그는 무대 우에서 ‘기타맨’으로 살아간다. 그가 연주하는 선률은 계산보다 감성을, 경쟁보다 공감을 말한다. 수자와 전략, 그리고 “사람이 제일”이라는 리념으로 회사를 키워 온 이성이 음악 앞에서는 따뜻한 인간미로 바뀌는 순간이다. 기업 경영과 예술적 감수성을 동시에 품은 그는 일과 삶의 균형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 주는 보기 드문 기업가다.
그는 다수의 단체 노래를 작곡·편곡하며 문화예술 발전에도 기여해 왔다. 가장 큰 호응을 얻은 작품이 김정권 작사, 최영철 작곡의〈우리는 하나다>였다. 이 노래는 엔딩 무대에서 구련옥, 임향숙, 박은화, 변강 등 연변조선족을 대표하는 네 명의 가수가 함께 불러 도꾜 무대를 장식했고, 많은 이들의 깊은 공감을 이끌어 냈다.
그의 대표적인 작곡·편곡 작품으로는 대련조선족기업가협회 회가〈뭉치자 기업가들〉, 대련시조선족문학회 회가 <바다의 사랑〉, 〈아름다운 노래〉, 〈향의 아름다움〉, 〈노래로 우리는 하나로〉, 〈고향의 풍경〉, 〈너는 너답게〉, 〈아침 찬가〉, 〈인생은 오늘이 진실이야〉, 〈상봉의 기쁨〉등이 있다.
리해란 대련조선족문학회 회장은 이렇게 호평했다.
“최 회장님의 음악은 그의 사람됨을 닮아 경쾌하면서도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선률에 머물지 않고, 박진감 있는 전개와 생동하는 리듬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 음악에는 따뜻한 정서와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으며, 공동체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힘이 있습니다.”
최영철 회장은 말한다.
“음악가는 소리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감정을 다루는 인간입니다. 음악은 인내와 집중을 요구하고, 공감과 배려를 키워 줍니다. 결국 깊은 인격이 깊은 음악으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음악과 인성은 그의 기업 문화와 성과를 함께 키워 왔다. 음악은 소통과 창의성을 높이고, 인성은 신뢰와 협업을 강화한다. 그리고 이 두 축이 어우러질 때, 기업은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한가족”이란 협회 문화로 조선족사회 발전에 기여
2014년 8월, 최영철은 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제2기 회장으로 선출됐다. 2010년 5월 21일 설립된 이 협회는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정부 허가를 받은 소수민족 상회형 사회조직이다. 당시 협회는 약 7만 명에 달하는 대련 조선족 사회를 대표하는 조직 가운데 하나로, 350여 명의 기업인 회원과 250명의 차세대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최영철 신임 회장은 취임식에서 “길이 같고, 리익을 나누며, 마음이 통하는(道相同, 利相共, 心相通) 협회 문화를 건설해 민족의 정신을 발양하고 민족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하며, 민족의 이미지를 널리 알리는 협회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솔선수범(以身作则)과 멸사봉공(廉洁奉公)의 자세로 협회와 회원 모두에 책임지는 회장이 되여, 대련을 넘어 료녕, 나아가 전국을 대표하는 브랜드 협회로 성장시키겠다”고 다짐했다.
협회 회원 기업들이 진출한 산업 분야는 석유화학, 건축설계, 봉제, 건설자재, 무역·물류, 자동차 부품, 국제 전자상거래, 선박 부품, 수산물 양식·가공, 한국 식품 무역, 항공기 임대, 의료기기, 철강 제련, IT 등으로 매우 폭넓었다. 이 가운데 연 매출 1억 위안(약 160억 원) 이상을 기록한 기업만도 20여 곳에 달했다.
최 회장은 임기 동안 ‘계승·발전·창신(創新)’을 슬로건으로 삼아 제1기 이사회의 발전 전략을 계승하는 동시에, 창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협회 개혁을 추진했다. 7개 분회와 8개 전문 공작위원회, 비서처를 갖춘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을 구축하고, 회원 발전 촉진과 권익 수호라는 두 가지 핵심 과제, 민족문화·민족교육·노인복지·차세대 발전·공익사업이라는 다섯 가지 책임을 협회 운영 강령으로 확립했다.
특히 250여 차례에 달하는 각종 활동을 전개하며 회원 기업의 성장과 조선족 사회의 화합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협회는 중국 조선족 사회 조직 가운데 최초로 AAA급 사회조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대외 협력과 경제·문화 교류에도 적극 나섰다.
한국의 기업인 단체들과 MOU를 체결하고, 일본 조선족 협회와 교류를 확대하는 등 중국 조선족 기업가들의 국제적 네트워크 구축에 힘썼다. 특히 조지아한인상공회의소, 충북 청주 기업인협의회와의 협력 등을 추진했다.

최영철 회장은 무엇보다 차세대 경제인 양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2016년 7월 대련에서 열린 ‘제7회 중국조선족기업가 경제교류대회 및 제1회 중국조선족청년지도자 심포지엄’은 조선족 기업가 협회 력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으며, 그는 이 자리에서 민족 경제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차세대에 대한 책임과 사명감을 강조했다.
청년 기업인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그는 자신의 사업 경험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그가 반복해 강조한 메시지는 단순한 성공 비결이 아니라 사람됨과 공동체 가치에 관한 것이였다.

이렇게 최영철 회장은 기술과 인재를 함께 키운 동아시아형 기업가다. 대련을 기반으로 건축 설계·BIM 분야의 아웃소싱 모델을 개척하며 한·중·일 산업 협력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그는 “사람이 먼저”라는 경영 철학 아래 인재 양성과 직업윤리를 중시했고, 기업 성장과 함께 조선족 사회를 위한 나눔과 문화·교육 지원에도 앞장섰다. 경영과 예술, 성과와 공동체 가치를 함께 실천해 온 인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글 / 동북아신문 이동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