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창군
40년전 《길림신문》에서 받은 통신원 초빙서로 인해 나와 《길림신문》은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당시 통신원으로 초빙되였지만 나는 신문 원고를 한편도 써본 적이 없었고 신문 원고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전혀 알지도 못했다. 겨우 현에서 운영되는 문학 내부 간행물에 졸작 몇편을 발표한 문학 열성자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1985년 10월경, 《길림신문》의 주최로 반석시에서 신문집필 강습반이 열렸다. 통지를 받은 나는 주저없이 강습반에 참석하였고 열심히 강의를 귀담아 듣고 꼼꼼히 필기를 하면서 조금씩 원고 쓰는 지식을 터득해 나갔다. 바로 그 강습반에서 나의 신문 원고 처녀작이 탄생했다.
내 이름이 신문에 한두편 실리면서 원고 쓰는 적극성이 더욱 높아졌다. 교원으로 근무 중이였기에 주말을 리용해 자전거를 타고 동네방네를 누비면서 신문소재 수집에 나서군 했다. 하지만 전문 지식 부족과 소재 포착 능력의 한계로 원고 투고량이 점점 줄어들어 결국 일년에 고작 몇편만을 쓰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즈음 《길림신문》의 문상화선생님이 취재차 반석에 오셨고 함께 자리하면서 담소를 나누던 중 선생님이 갑자기 “요즘 왜 글을 쓰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였다. 글감이 없어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선생님은 너무 멀리 바라보지 말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사건이나 감동적인 이야기,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종합하면 훌륭한 글감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였다.
사실 나는 성구속담을 수집하여 노트에 차곡차곡 적어두는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두툼한 노트가 여섯개나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단순히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집한 속담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유희를 만들어 《중국조선어문》잡지에 발표하군 했다. 례를 들어 세상에서 제일 겁 많은 사람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식이였다.
나의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감탄하시며 이 얼마나 훌륭한 글감이냐고 말씀하시고 선후 사연을 잘 다듬어 써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탄생한 <나의 성구 속담 노트>는 《길림신문》 응모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령감을 얻어 글감을 수집하며 원고 투고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탄생한 <새각시 짠지 장사>는 《길림신문》 소식 응모에서 2등상을 받았다.
신문 원고를 부지런히 쓰는 것은 통신원으로서의 직책 중 하나이지만 신문 발행 사업에 적극 협조하고 동참하는 것도 중요한 의무였다. 《길림신문》 창간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신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여 누구도 쉽게 신문을 주문하려 하지 않았다. 입이 닳도록 선전하고 설득해도 효과는 미미했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얼마 되지 않는 교사 봉급을 털어 신문을 주문하여 글을 읽을 수 있는 가정에 가져다주고 신문에 실린 농촌 관련 새로운 정책들을 빨간 펜으로 체크하며 읽도록 권장했다. 그 결과 일년 후에는 한부도 주문하지 않던 가정들에서 과반수 이상이 《길림신문》을 구독하는 흐뭇한 풍경이 나타났다.
《길림신문》사에서는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고 선후로 《길림신문》우수통신원, 동북 조선족신문계통 우수통신원이라는 영예까지 안겨주었다.
지금은 정년 퇴직을 몇개월 앞둔 나이지만 《길림신문》의 통신원으로서의 책임감과 긍지를 가지고 남은 여생을 《길림신문》과 함께하며 인생을 즐겁게 보내리라 다짐한다. 한편 《길림신문》은 예전과 다름없이 밝은 별빛이 되여 우리의 앞날을 환히 비추어 주길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