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 박정흡
아버지는 결혼한 이듬해, 26살에 항미원조전쟁터에 나가게 되였어요. 그때 20살난 어머니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어요. 어머니는 극구 반대하셨지만 아버지는 조선과 우리 나라는 ‘입술과 이발’의 관계라고 하면서 입술이 없으면 어떻게 이발을 보호할수 있는가고 어머니를 설득하였어요.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불덩이같은 애국열정에 감화되여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내는데 동의하였지요.
아버지는 정전협정이 있은후 큰 형님이 3살을 잡을때에야 돌아왔어요.
평소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분이셨어요. 술은 안하고 담배는 많이 피우셨어요. 소처럼 수걱수걱 일만 하시고 별로 우리와 교류하지 않으셨어요. 하지만 자식들은 자신의 눈동자처럼 아끼고 사랑했어요. 두만강반에 자리잡은 우리 동네에서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도 두만강에서 고기잡이 하고 여름이면 수영도 하면서 살았어요. 내가 6살때의 일인데 한번은 둘째형님, 셋째형님과 낚시질 갔는데 지렁이가 떨어져서 저와 셋째형님이 집에 지렁이 가지러 왔어요. 지렁이를 가지고 강가에 갔을때에는 낚시대만 있고 둘째형님은 간데온데 없었어요. 놀란 셋째형님은 울면서 집에 돌아와 부모님한테 둘째형님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알렸어요.
그 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곧추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였어요. 방목하던 동네분들도 함께 뛰여왔어요. 아버지가 옷을 입은채로 막 강물에 뛰여들려는 순간 뒤따라온 동네아저씨가 아버지를 덥썩 그러안았어요. 그 아저씨는 아버지의 정서를 눅잦히며 이렇게 성급히 행동할 것이 아니라 배를 구해서 찾아보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 아저씨가 낚시대주위를 보니 남쪽을 향해 달려간 발자국들이 있었어요. 발자국을 따라 찾기 시작했더니 아니나 다를가 인차 둘째 형님을 찾을수 있었어요.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라요. 원래 우리가 집에 지렁이 가지러 간후 둘째형님의 개구쟁이 동창이 낚시줄을 끊고 달아났던 것이였어요. 둘째형님은 그 애를 쫓아가느라 낚시대를 그대로 버려둔채 자리를 비웠던 것이였어요. 그때 아버지가 옷을 입은채로 강물에 뛰여들었다면 그 후과는 생각만해도 아찔하지요. 아버지는 목숨을 내걸고 우리를 지켜주셨어요.
어린시절 아버지와 교류했던 기억이 얼마 안돼요. 아버지는 우리가 눈을 뜨기전에 벌써 소방목을 나갔고 저녁이면 달을 지고 돌아왔어요. 겨울이면 소수레를 몰고 또 생산대의 석탄을 싣느라고 바쁜 세월을 보냈어요. 아버지와의 만남은 그냥 밥상에서였어요.
시간은 덧없이 흘러 형님,누나들도 장가들고 시집가니 집에는 나만 홀로 남았어요. 아버지가 환갑상을 받을때 나는 고중2학년이였어요. 소학교때에는 큰 누나가 교원사업을 하였기에 내 학부모회의에 참가했고 초중시절에는 둘째형님이 대신 학부모회의에 참가했기에 아버지가 참가할 기회가 없었어요. 그러나 고중에 오자 새 가정을 이룬 형님,누나들이 학부모회의에 더는 참가할수 없었지요. 원래 말수가 적은 아버지는 별수없어 제 학부모회의에 참석했어요. 후에 안 일이지만 우리 동창들은 다 아버지 어머니가 젊어서 자식들이 큰 아들 아니면 큰 딸이였어요. 하기에 그들의 부모님들 나이는 우리 큰 형님과 거의 맞먹었어요. 그러니 젊은 학부모들이 참가하는 회의에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 모습의 아버지가 들어섰으니 자연히 손자 손녀의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러 오신줄 오해받을수밖에 없었어요.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고 한평생 부끄럼없는 삶을 살아온 아버지였지만 너무 민망해서 쥐구멍이라고 들어가고싶은 기분이였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 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만 같아요. 자식위해서라면 무엇인들 못하겠어요.
먼 후날, 제가 아버지로 승급한 후에 그때의 아버지 마음을 만분의 일이라도 알수 있을 것 같았어요. 환갑이 지나 년세가 많고 또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시간도 있으니 아버지와의 정감교류도 많았어요. 아버지는 그때 처음으로 제가 어릴때 본 《상감령》영화장면의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때 아버지가 소속되여있던 부대는 상감령지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각자 고지를 지키고 있었대요. 전쟁이 치렬함 정도는 대단했는데 나무가 너무 폭격을 받아 개고기처럼 되였다고 묘사하더군요. 그리고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한 이야기도 하시더군요. 적들이 어찌나 봉쇄했는지 후방과 련계가 끊어진지 한달정도 되였다고 해요. 식량이 떨어지자 부대에서는 아버지와 다른 한 전사를 파견하여 후방으로 가서 쌀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주었지요. 구사일생으로 적들의 포위를 뚫고 쌀 한가마니씩 지고 다시 진지에 도착했을때는 많은 전사들이 희생되였대요. 쌀은 가져왔지만 희생된 전우들을 생각하니 밥을 먹을수가 없었다던 얘기를 하시면서 아버지는 자못 심각해 있었고 눈가에는 이슬이 반짝이였지요.
아버지는 신체가 아주 건강하셨어요. 혹시나 감기에 걸려도 정통편 한알이면 금새 나아지셨어요.
시간은 류수와도 같아 어느덧 나도 장가들 나이가 되였어요. 다른 사람의 소개로 지금의 안해와 1년간의 련애생활을 거쳐 1996년 2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였어요. 4월에 아버지는 인젠 막내까지 장가 보내서 한시름을 놓아서 그런지 난생처음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였지요. 페에 고름이 찼다는 것이였어요. 륵골 하나를 끊고 거기로 수출관을 넣으셔서 고름을 빼는 수술을 하였어요. 한달간의 치료를 거쳐 아버지는 완쾌되여 출원하였어요. 병환에 계시는 동안에 제가 처음으로 아버지를 뵈러 갔을때 그렇게 굳센 사나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락루하였어요. 정말 네가 공부하면서 고생했다고 말씀하셨어요. 하기야 농촌에서 태여나 초중까지 줄곧 집에서 엄마,아빠의 사랑속에서 자라 삽시에 시가지에 있는 고중에 와 공부하려니 있을 집이 마땅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집저집 옮겨다니면서 공부하다나니 졸업할때까지 열집이나 옮기면서 공부하였어요.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고 부모님이 더 수고했지 나야 무슨 고생했겠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마음은 아팠나봐요. 그해 5월에 아버지는 어머니의 배동하여 갓 세간난 저의 집으로 찾아 왔어요. 무려 반시간도 안되는 담화에서 아버지는 몇번이나 싸우지 말고 살라는 말씀을 했어요. 10월에 아버지는 충분히 휴식하고 일하지 말라는 의사와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도 마다하고 기어코 어머니를 도와 가을걷이에 나섰어요. 큰 수술을 받았고 또 년세가 많으데다 힘든 가을걷이를 하다보니 아버지는 또 몸져 누웠어요. 걸어다닐수 없게 되였어요. 정신은 말짱한데 두 다리가 말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11월도 막 가는 하순경에 저는 영광스럽게 아빠로 승급하였어요. 막내가 아들을 보았다는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모르면서 내가 기여 가서라도 당신의 손자를 보겠다고 다짐하더라는 것이였어요. 손주가 많은데 하필이면 저의 자식을 이토록 사랑한단 말입니까. 정말 아버지의 사랑은 하늘보다 더 높다고 했는가봐요. 아마 둘째누나의 말씀대로 가슴붙이를 더 사랑한다는 말이 어느정도 맞는가 봐요. 일주일후 안해가 퇴원하자 장모님한테 안해를 부탁하고 곧장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뵈러 어머니댁으로 갔어요. 아버지는 내가 30리길을 다니며 출근할라, 안해를 돌보느라 얼마나 수고 많냐고 하면서 베개를 건네주며 한잠 푹 쉬라고 하는 것이였어요. 확실히 많이 피곤하였어요. 저는 아버지 옆에서 한잠 푹 잤어요. 만약 그때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인줄 알았더라면 자지 않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텐데 한치앞도 못보는 인생이라 그냥 그렇게 지내왔어요... 그후 아버지는 일주일이 지나 돌아가셨어요.
드바빴던 그해, 나는 안해를 얻고 아들을 얻고 아버지로 승급했지만 또한 항미원조 지원군 전사였던 가장 사랑스러운 아버지를 잃었어요. 싸우지 말고 살아라, 아버지는 전사였지만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요. 아버지의 이 유언은 얼마나 무게있는 말씀입니까?! 평화를 위해 삽시다. 우리 나라마다 가정마다 싸우지 말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编辑: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