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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항일련군 교도려 박영산이 사용한 무전기와 암호책

주동      발표시간: 2025-05-19 15:03       출처: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选择字号【

중대한 력사를 품고있는 혁명 문물인 무전기와 암호책이 그 뒤에 숨겨진 조선족 영웅 박영산의 이야기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1985년 8월 29일, 흑룡강성 동녕현 수양림업국 류교구 림장의 퇴직종업원인 량용 등이 한총하림장 작업구역의 한 바위틈새에서  부품이 녹쓴 상태지만 형태는 기본적으로 완전하게 유지된 무전기와 표지가 손상되고 종이가 누렇게 변한 암호책을 발견했다. 무전기는 다섯겹 합판으로 만든 작은 나무 상자에  싸여져 있었으며 방수천으로 포장되여 있었다. 무전기 등 장치 외에도 ‘박영산’이라는 이름이 적힌 위만주국시기 학생사전도 함께 발견되였는데 이 사전이 바로 관건적인 암호책이였다.

이 무전기와 암호책은 항일련군 박영산소부대가 사용하던 것으로  당시 무전기의 배터리가 다 나가서 사용할수없게 되자 박영산은 무전기와 암호책을 잘 포장하여 산속의 바위틈에 숨겨둔 것이였다. 

무전기와 암호책

1939년말부터 1940년초 사이의 동북 항일전쟁은  곤경에 빠져 있었다. 동북항일련군의 주력부대는 쏘련경내로 이전하여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쏘련공농홍군 독립보병 제88려)가 설립되였고 일본군에 대한 정찰작업을 주요 임무로 맡게 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소부대는 정찰활동과 정보수집활동을 하여 쏘련홍군의 동북출병에 극히 중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하였는데 박영산소부대는 항일련군이 쏘련에서 집중훈련기간 파견해 귀국한 소부대 가운데 하나였다. 1941년 봄부터 1945년8월까지 30여차의 소부대가 파견되였는데 소부대 인수는 적어서 3~5명, 많을때는 20~30명이 되였다.  

박영산은 동북항일련군 제5군 부관으로서 풍부한 대적 투쟁경험과 믿음직한 정치적 소양 및 전투지역에 대한 익숙함을 바탕으로 정찰 임무를 수행할 최적의 인물로 꼽혔다. 1940년 부대와 함께 쏘련에 간후 그는 여러 차례 위험한 임무를 맡은채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귀국하여 동북의  녕안, 목릉, 동녕 일대 적구에 깊이 침투해 일본군의 병력 배치, 특무망 분포 및 비행장 위치 등 중요한 군사정보를 목숨 걸고 수집했으며 이 무전기를 통해 쏘련 원동군구 정보기관과 밀접한 련락을 유지했다.

1944년 6월,박영산은 두명의 전사와 함께 녕안현 남마장에서 임무를 수행하던중 불행히도 특무에 의해 발견되였다. 격렬한 전투중 두명의 전사가 총탄에 맞아 희생되였고 박영산은 적에게 포로되였다가 할빈에서 학살당했다.

동북이 해방된후 사람들이 박영산렬사를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건립하고 마장촌을 영산촌으로 개명해 영웅의 공적을 기리였했다. 현재 이 두 문물은 동북렬사기념관에 보관되여 있으며 1996년에 국가 일급 문물로 지정되였다.

이 문물들은 동북항일련군이 쏘련 경내로 이전한후 일본침략자와 특수한 형식으로 투쟁한 력사의 증거일 뿐만 아니라 박영산 등 항일전사들이 피와 생명으로 쌓아 만든 정신적 기념비이기도 하다.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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