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이야기4]고중시절의 일본어 복습제강
안상근 길림신문 2026-03-06 14:16:18◎ 김금단
내 태줄을 묻은 고향을 떠나 이 땅에 뿌리 내리기까지 부평초와 같은 삶을 살아왔다. 두 차례의 이사짐을 정리하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은 과감히 버려왔다. 그러나 유독 고중3학년 때의 일본어 복습 제강만은 지금도 집 서재를 지키고 있다.
고중 3학년 때 일본어 선생님은 대학 입학 준비를 위해 직접 정성 들여 준비한 복습 제강을 나누어 주셨다. 당시만 해도 인쇄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 선생님은 손으로 직접 한장 한장 유묵으로 프린트하시였다. 나는 그 소중한 자료들을 한 장도 버리지 않고 송곳으로 두 군데에 구멍을 뚫어 하나의 파일로 묶어 가방에 넣어 다녔다. 그 복습 제강에는 선생님의 열정과 노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0리가 넘는 통학길에 그날 배운 내용들을 머리속에 되새기며 복습했고, 복습 제강을 수없이 반복하여 공부한 덕분에 나는 대학 시험에서 일본어 총점 100점 만점에 92점이라는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종이가 누렇게 변하고 모서리엔 보풀이 일었지만, 그 복습 제강에는 대학 입학을 위해 준비했던 일본어 단어와 문법의 모든 지식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고중 3학년부터 지금까지 꼬박 3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나와 함께 해온 일본어 복습제강은 나를 가장 오래 동반한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사실 나의 일본어 사랑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교 3학년 때 전교에서 열린 일본어 경연대회에서 나는 10등이라는 마지막 등수를 차지했다. 비록 훌륭한 성적은 아니였지만 그 성적은 나에게 일본어에 대한 뜨거운 흥미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였다.
고중 1학년부터 나는 일본에 사는 친구 '구니야스 아키코(国安明子)'와 펜팔을 시작했고 일본어에 대해 더욱 특별한 애정을 갖게 되였다.
일본 친구는 내 편지에 답장을 보낼 때면 항상 내가 써서 보낸 편지를 복사한 후 틀린 부분을 빨간 펜으로 꼼꼼히 수정하여 함께 보내주었고 때로는 일본어로 된 소설책도 선물로 보내주었다. 그 세심한 배려와 정성이 얼마나 큰 힘이 되였는지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복사'가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나는 펜팔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였고, 일본어로 주고받는 편지 왕래는 다소 단조롭기만 했던 고중생활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또한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며 공부한 덕분에 나와 구니야스 아키코는 모두 첫해에 대학에 진학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1990년대 초, 동북 지역에서 처음으로 일본어능력시험이 실시되였다. 길림성의 시험 장소는 장춘에 있는 동북사범대학 한 곳뿐이였다. 당시 나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이였고 대학에서 2년밖에 일본어를 배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어 선생님의 추천으로 일본어능력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였다.
연변대학에서는 일본어 학부 6명, 기타 학부 6명에게 시험 기회가 주어졌는데 일본어 학부 학생들은 1, 2급 시험을, 기타 학부 학생들은 3, 4급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일본어가 전공이 아니였던 나는 3급 시험 자격을 가졌다.
약 1년 동안 일본어를 손에서 놓고 지냈지만 다행히 고중 때의 그 복습 제강이 내게 큰 힘이 되여 주었다. 다시 복습 제강을 펼쳐 놓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단어와 문법 부분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에 일본어로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탓에 청력 부분이 걱정되였다. 그리하여 일본어 학부에 청강을 신청하여 틈틈이 수업을 들으며 청력 공부를 하였다.
일본어 사전을 달달 외울 정도로 사전 공부에 몰입하였기에 꿈속에서조차 일본어로 말할 정도였다. 고맙게도 연길에서 장춘까지 왕복 기차표와 하루밤 주숙비를 학교에서 부담해 주었다. 그때 연변대학을 대표하여 동북사범대학에서 진행된 일본어능력시험에 참가한 12명 학생 모두가 시험에 합격하였다. 나는 총점 400점 만점에 359점이라는 점수로 합격의 영광을 안았다. 합격 통지서를 받던 날 나의 노력과 정성이 좋은 결실을 맺어 너무나도 기뻤다.
내가 근무했던 전 직장인 심수보양산업은 가발 기술이 세계 최고였기에 가발의 원재료인 원사를 공급하는 일본 공급업체에서는 해마다 개발자들을 보양산업에 파견하여 인모에 가까운 원사를 가지고 와서 일주일씩 시험을 진행하였다.
일본 공급업체에서 출장을 오기 전이면 나는 어김없이 고등학교 때 일본어 복습 제강을 다시 펼쳐 들고 단어부터 문법까지 공부하면서 통역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하였고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생산현장을 관리하는 남편에게 문의하군 하였다. 어느 한번 전화로 문의하기 힘들 것 같아 남편을 밖으로 불러내서 자료를 들고 문의하고 있는데 마침 인사 관리를 하는 처장님이 지나가시면서 "얘, 너희들 집에서 련애하면 됐지 회사에서까지 나와 련애하느냐?"라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나는 매번 통역 임무를 무난히 완성하였고 일본인들을 안내하여 심수의 명승고적을 유람시키군 하였다. 보양산업에는 많은 조선족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고 직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경쟁이 심했다. 해마다 급여가 오르는 날이면 어김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 올해는 급여가 얼마나 올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사장님은 이러한 직원들의 심리를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계셨기에 '일본어 통역비'라는 명목으로 내게 급여를 더 인상해 주셨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일본어는 내게 단순한 외국어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청춘과 열정,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의 기록이였다.
얼마 전 딸이 서재에서 꺼내놓은 그 복습 제강을 발견했다. "엄마, 이게 뭐예요?"라고 묻는 딸에게 나는 고중교 때 일본어 선생님의 열정, 대학 입시의 치렬함, 펜팔 친구와의 추억, 그리고 일본어능력시험을 준비하던 날들의 이야기까지 복습 제강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흥미진진하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딸을 보면서 누렇게 바랜 복습 제강이 단순한 학습 자료를 넘어 딸이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노력과 열정으로 가득 채워주는 소중한 유산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며칠 전, 하루에 4시간씩 꾸준히 일본어 공부를 하여 일본어를 놓은 지 몇십 년 만에 일본어 1급 시험에 도전하여 자격증을 새로 취득하였다는 위챗 모멘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시간이 된다면 일본어 1급 시험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서재 한편에 자리한 누렇게 바랜 복습 제강을 볼 때마다 마음은 10여 리 길을 통학하던 나의 10대와 20대, 30대로 되돌아간다. 그 시절의 간절함과 열정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일본어 복습 제강을 들여다볼 때면 그 종이장 사이에서 땀과 노력으로 얼룩진 나의 열정으로 가득 찼던 불타는 청춘을 다시 떠올려보며 내심의 미소를 금할 수 없다.

김금단 프로필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연길시 중학교 교사 력임
현재 광동성 혜주시에서 무역회사에 근무
编辑:안상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