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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왕조와 고구려의 통속 관계를 증명하는 진귀한 실물— 1,700여년 만에 돌아온 ‘진 고구려 귀의후’ 금인

5월 18일, ‘5·18 국제 박물관의 날’ 길림성 주회장 행사장에서 ‘진 고구려 귀의후’ (晋高句骊归义侯)마뉴(马钮) 금인이 집안시박물관에 무상 기증되며 1,700여년 동안 류실되였던 금인이 귀로에 올랐다. 이 금인의 귀환은 고구려에 대한 중원 왕조의 관할을 연구하는 데 진귀한 실물 증거를 제공할 뿐 아니라 대중들이 고구려와 중원 문화의 교류와 융합을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

‘진 고구려 귀의후’ 금인은 인뉴와 인신이 일체로 주조되였으며 인문(印文)은 깎아서 만들어졌다. 대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깝고 마뉴 형태로, 인뉴는 주조된 후 표면 문양을 조각했다. 전체 높이는 2.8센치메터이고 인대의 높이는 0.6센치메터이며 인면(印面)은 2.4 × 2.3 센치메터이고 무게는 약 88그람으로서 한진시기 관인의 표준 규격에 해당한다. 인문 속 ‘귀의’는 정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며 ‘귀의후’는 중국 고대에 소수민족 수령에게 하사된 작위로 그들의 ‘신복’을 인정함을 상징한다.

력사적으로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역의 고대 민족지방정권으로서 량한, 위진·남북조, 수·당 등 세개 시대를 넘나들며 동북아 력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량진시대부터 중국 중앙정부는 내부에 부속된 소수민족정권 수령에게 인장을 하사하는 전통이 있었다.

길림대학 고고학학원 왕지강교수는 “금인은 서진의 고구려 책봉을 실물로 증언한 문서이다.”라고 하면서 “문헌에는 서진의 고구려 책봉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으나 이번 ‘진 고구려 귀의후’ 금인과 앞서 발굴된 몇점의 ‘진 고구려 솔선’ 동인(铜印)이 함께 출토되면서 진나라 초기에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기미 관할하에 있었음을 립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금인은 집안시 출신인 금두그룹 김명남 회장과 부인 고금단씨가 중국가덕 향항 2025년 봄철 경매에서 락찰받은 후 집안시박물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집안시박물관 곽건강 관장은 “이 금인은 우리 박물관 최초의 금제 인감”이라고 하면서 “인장 입관 후 우리는 인장에 대한 보호 관리와 전시 연구를 강화해 이 금인이 빠른 시일내에 대중들에게 공개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근년래 길림성은 다방면으로 길림 변강 력사에 대한 연구와 발굴을 추진해왔다. 길림성문화관광청 부청장이며 길림성문물국 국장인 송미는 “앞으로 고구려 력사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발굴, 해석 작업을 더욱 중시하고 사회과학기금과 문물보호 전용 자금 등 면에서 지원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금인의 발견과 회귀는 문헌 기록의 결핍을 보완했을 뿐만 아니라 작은 인장 하나로 1,700여년전 백산흑수에서 살았던 고대 민족이 이미 중화민족공동체의 불가분의 구성부분이였음을 증명했으며 중화민족과 중화문명의 다원일체화 구조를 실증했다.

/길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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