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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병사의 이야기](6)

항미원조시기 든든한 ‘국문지킴이’

—변방검사원으로 항미원조를 지원했던 방덕용옹을 만나보다

젊은 시절의 방덕용 /자료사진

압록강변에서 맞은켠의 조선 땅을 바라보는 방덕용로인

소학생들에게 혁명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방덕용로인 /자료사진

근 70년째 중조 변경 해관촌에서 살고 있는 1933년생 동갑 부부 방덕용, 김옥순로인 .

“‘항미원조 보가위국’에서 나는 ‘보가위국’만 7년 가까이 열심히 했지요. 외동아들이라 전선에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고 중조 변경의 집안국경검사소 검사원으로 일하면서 국문을 든든히 지켰더랬지요.”

최근, 91세의 방덕용(方德用)로인은 집안시 량수조선족향 해관촌의 압록강변에서 맞은켠의 조선 땅을 바라보며 기자 일행에게 70여년전의 혁명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7살에 지원군 안내하여 전쟁터 드나들다

1946년, 13살 소년 방덕용은 고향인 조선 자강도 위원군에서 부모님과 함께 두 녀동생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큰아버지가 사는 당시의 집안현 다박지(辑安县大薄地, 현재의 집안시·集安市 량수조선족향) 해관촌에 정착했다.

1950년 10월,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되자 해관촌에서 1리 남짓 상거한 압록강 부교를 통해 집안현으로 건너오는 조선 난민과 보무당당하게 전쟁터로 나가는 중국인민지원군 전사들이 부지기수였다.

17살 열혈청년 방덕용도 영광스러운 지원군 전사가 되여 압록강을 건너 조선과 중조 변경을 괴롭히는 적군과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1남 2녀중 외동아들이였고 아버지마저 돌아가 가정의 유일한 남자식구이다 보니 어머니는 그의 군 입대를 결사반대해 나섰다. 다행히도 그는 중조 량국 언어에 능통한 우세가 있었던 터라 집안변방공안분국 해관촌파출소의 호출을 받고 군복을 입게 되였다. 그때가 1950년 11월이였다.

파출소에서 통역 일을 시작하여 압록강변에서 소통과 안치 사업을 맡아했는데 그의 출중한 능력과 듬직한 성미가 집안현공안국에까지 전해졌다. 이어 그는 3주간의 강습을 거쳐 동북군구 변방공안 모 퇀 소속 집안현통상구 변경검사소로 정식 발령을 받게 되였다.

방덕용이 근무하던 당시, 집안기차역 앞에 위치한 집안통상구에는 해관, 검역, 은행, 변경검사소 등 4개 부문의 사업일군이 진주해있었다.

방덕용은 동료들과 함께 매일 다양한 지역에서 오는 사람들과 차량을 상대하며 모든 증명서를 철저하게 검사하고 의심가는 사람이 잠입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추운 겨울에도, 무더운 여름에도 흔들림없이 일터를 고수하며 국가의 안전과 관계되는 제반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검사원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방덕용은 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국인민지원군 림시 통역관으로 오매불망 그리던 지원군의 일원으로 되였다. 지원군 부대를 안내하여 압록강을 건너 자강도 초산군을 지나 그가 태여난 위원군, 집안에서 270여리 떨어진 강겨시 등 조선전쟁 일선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적이 여러번 된다. 조선 땅을 밟은 지원군 전사들은 낮에는 적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안전한 곳에 은페해있다가 밤이 되면 전등을 끈 채 조심스럽게 전쟁터로 향했는데 방덕용은 지원군 전사들과 함께 위험천만한 경우를 여러번 겪었다고 한다.

한번은 초산군에 당도한 지원군 부대가 사전에 은닉해놓았던 석유 20통을 다른 곳으로 이송하고 있는데 갑자기 적군 비행기가 나타났다. 비행기가 연소탄을 대거 투하하는 통에 사방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방덕용은 입었던 바지가 불에 타는 바람에 하마트면 크게 화상을 입을 번했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원만히 완수한 방덕용은 조선인민군 군복을 입고 귀국해야만 했다.

근면한 사업태도와 출중한 능력이 상급의 인정을 받아 방덕용은 변경검사소 간사, 검사원을 거쳐 검사조 조장으로 발탁되였다.

7년간 고작 3번 집 찾아, 뜻밖의 희열 찾아와

변경검사소에서 사업한 7년간 방덕용은 시종 일터를 열심히 지켰고 사심없이 헌신했다. 사업의 특수성 때문에 그는 가족과 만나는 시간이 손을 꼽을 정도였는데 7년 동안에 집을 다녀간 차수는 고작 3번뿐이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검사소에까지 전해져 방덕용은 급히 휴가를 내고 한걸음에 백리길을 달려갔다. 집문을 열고 보니 다행히 어머니는 가벼운 감기에 걸렸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허탈감이 들었지만 방덕용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며칠후 어머니가 완쾌된 모습을 보고는 곧장 검사소로 돌아갔다. 헛소문으로 한번 ‘돌아가셨던’ 어머니는 80대 후반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보가 느리고 무뎠던 당시 그는 근무를 시작해서 처음으로 집에 왔다 간 이후로 자신의 결혼식과 녀동생의 결혼식까지 두번을 집에 더 다녀왔다.

그동안 홀로 가정의 중임을 떠메고 묵묵히 남편의 사업을 지지해나선 그의 동갑 안해 김옥순은 해마다 농망기가 지나야만 남편을 보러 군부대를 찾아갈 수 있었는데 이들 신혼부부의 상봉은 7월과 음력설 매년 두번뿐이였고 번마다 보름을 초과하지 않았다. 1954년 여름, 남편 만나러 갔던 김옥순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대홍수에 한달 넘게 발이 묶였고 집에 돌아온 후에야 첫아이 임신사실을 알게 되였다. 작은 생명의 뜻밖의 탄생은 방덕용에게 더 강한 책임감을 부여했다. 그는 시종 국가의 리익을 첫자리에 놓았고 개인의 득실을 뒤로했다.

그는 “가정생활을 희생시킬지라도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군인으로서의 내 역할이다. 전쟁터에서 조국과 인민의 안전을 위해 젊은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렬사들에 비하면 나는 한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젊은 시절의 ‘검사능수’, 70대 후반에는 향 당대표로

1953년에 입당한 방덕용은 1955년에 상사계급을 수여받았으며 1957년 3월에는 동북군구로부터 ‘2급 검사능수’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두달후 제대하여 귀향한 그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군대에서 쌓은 경험과 지도 능력으로 그는 재빨리 생산대대 출납과 부주임 등 직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는 장기간의 군생활에서 얻은 맹장염, 페결핵, 신우신염 등 질환에 시달리며 체중이 급격히 줄어들어 중로동에 종사할 수 없었다. 1959년 그는 조직으로부터 압록강 배사공(摆渡员)으로 임명되였다가 3년후 건강이 회복되자 생산대 대장, 회계 등 직을 맡았다.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까지 그는 20여년간을 드높은 책임심과 사명감으로 촌의 건설과 발전에 적극 참여해 촌민들의 실제 곤난을 해결해주었으며 여러가지 민생공정의 실시를 추동했다.

방덕용은 촌민들의 존경과 지지를 받는 좋은 간부가 되였다. 그의 이야기는 사회에 봉사하고 아름다운 삶의 터전을 구축하도록 더 많은 사람들을 격려했다.

군영과 특수한 인연이 있는 맏아들은 아버지를 본받아 일찍 1977년에 입대하여 4년 동안 료녕성에서 열심히 군복무를 마쳤는가 하면 큰딸은 의사 남편에게 시집가서 장사를 해왔고 둘째아들과 작은딸은 집안시 모 중학교 교장직과 교원직에서 퇴직했으며 작은 아들은 시정부에서 근무중이다.

방덕용로인은 지금도 중조 변경 압록강에서 1리 쯤 상거한 해관촌에서 동갑내기 부인 김옥순과 근 70년째 살고 있다. 2011년, 78세 고령의 방덕용은 량수향 당대표로 선거되기도 했다. 뿐더러 그는 집안시조선족소학교의 학생들에게 홍색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혁명정신을 고양하도록 후대들을 인도했다.

량수향은 통화지역의 현급시인 집안시의 유일한 소수민족향이다. 량수조선족향퇴역군인봉사소 김광오(金光伍) 부소장에 따르면 일찍 1950년에 입대하고 1953년에 입당한 방덕용로인은 현재 량수향의 154명 퇴역군인중 최고령 로병사일뿐더러 몇명 안되는 항미원조 참전 로병사중의 한명이다.

“방덕용로인이 70여년전에 피와 땀을 흘리며 청춘을 헌신하고 근무했던 집안현통상구는 현재 국내 3대 대 조선 통상구이다. 7년 동안 국문을 굳건히 지켜온 방덕용로인은 우리 향 제대군인들의 훌륭한 대표일 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족의 우수한 일원이며 후대들이 본받아야 할 본보기이다.”라고 량수향의 김해웅(金海雄) 향장은 말한다.

/유경봉, 오건, 류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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