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라는 노래가 있는데 나에게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엄마가 있었다 .
며칠 있으면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2주년이 되는 기일이여서 설겆이를 끝내고 습관대로 폰을 열고 엄마 사진에 눈길을 멈추었다. 마음이 몹시 쓸쓸하다 . 그때 마침 ‘딸랑’하고 위챗 메시지 도착음이 울린다 .매일 어김없이 문안인사를 보내오는 친구 언니가 동영상과 함께 “좋은 종목 보내니 동생 잘 봐요.”라는 글까지 달아보냈다.
‘좋은 종목이면?’ 혼자 중얼거리며 동영상을 클릭했더니 연길시문화관 무대를 배경으로 연변시랑송협회(송미자 회장) 10주년 기념 경축공연 동영상이였는데 연변의 유명한시인 리성비의 시 <다듬이>를 각본하여 무대에 등장시킨 다듬이 방치질 소리였다.
때로는 홀로 앉아 때로는 마주앉아 마을 뒤산 옹달샘 한모금씩 뿜으면 안개꽃 피여나고···
송미자 회장님이 리성비시인님의시를 선택하고 또 정성 들여 새롭게편집하여 리복자 , 김정자, 심영자 ,장선숙 , 리정희 등 다섯 어머니들이 흰 바탕에 자주색 반회장저고리 , 검정 치마에 허리끈 질끈 동이고 머리엔 흰 수건 받쳐쓰고 반듯한 방치돌과 마주앉았다 . 어머니들은 우리 조선족 녀성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근로하고 알뜰한 형상을 더한층 업그레이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는데 다듬이소리가 너무나도 정겨웠다 . 토닥토닥 토닥토닥 탁탁!
그러지 않아도 엄마 생각중에 이런 동영상을 보게 되니 마음은 저도몰래 아득한 추억 속 48년전으로 돌아갔다…
1976년, 내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연변대학 입학통지서가 도착하자 온 집안이 기쁨에 들끓었다 . 그런데 엄마만은 무슨 고민이 있는 것처럼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았다 . 이튿날 원인을 물었더니 오빠의 결혼 준비로 솜표와 천표를 다 써서 대학 가는 나에게 새 이불을 해줄 수 없다는것이다 .
“아니 엄마 , 왜 그런 걸 다 걱정해요? 집에서 덮던 이불에다가 학교가서 씻기도 불편한데 천표 안 받는 색상이 어두운 것으로 하면 되는 걸가지고···”
“그건 아니지 . 대학교 가는 것도 결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사이고 경축할 일이니 네가 학교 가서 공부잘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꼭 새하얀 이불을 해야지 .”
이튿날부터 엄마가 련속 3일간 친구들 만나며 노력한 결과 끝내 구했다. 엄마는 진짜 하늘의 별따기마냥 어려운 일을 해결했다며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이였다 . 나는 처음으로 엄마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었고 또 상점에서 산 흰 광목천을 새하얗게 바래여 첫날 이불안을 하는데 들이는 공력과 정성도 그때에 잘알았다 .
엄마는 이불 안감을 머리에 이고강가로 나가 빨래방치로 팡팡 두드린 후 강물에 헹구고 비틀어 물기를꽉 짜서 집 울안 바줄에 널고 마르면 또 걷어서 강가에 나가 두드리고···아무튼 하루에 몇번인지 모르고 좋은 해볕에 마르기만 하면 다시 들고 강가에 나가셨다 . 이렇게 며칠 반복하니 확실히 그 누르스름하던 광목천이 새하얗게 바래지는 것이 알렸다 . 엄마는 또 찹쌀가루로 풀을 쑤어 이불안에 골고루 뿜어 약간 누기가 있을 때 잡아당기고 또 접어서 밟고 나중엔 토닥토닥 탁탁 련속 이틀간 다듬이질하여 반들반들한 이불안을 만들었다 .
와! 새하얀 첫날 이불안이 이런신고를 겪어서 나오는구나! 우리민족은 참으로 깨끗하고 너무 대단해!
여름에 창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너무 신나게 두드리는 다듬이소리를 듣고 아래집 아줌마는 혹시 누가 결혼하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지만 자랑스런 우리 민족 엄마들을 내놓고 또 누가 이런 정성을 담아 자식의 이불을 해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그해겨울, 엄마는 강가에 나갔다가 바로 나의 이불을 할 때 엄마한테 솜표와 천표를 해결해준 그 집에서 아들 결혼식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 . 어떡하지? 부조를 해야 하는데··· 그때 그 집에서 자기네 집의 천표가 부족하니 또 친척집 것까지 합하여 얻어주었는데 바쁠 때 서로 도와줌이 마땅했다···
드디여 엄마의 좋은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70년대에는 결혼식을 집에서 했는데 찰떡은 하기 쉬우니 집에서 직접 할 수 있으나 신랑 신부큰상에 쓰는 증편은 웬만한 솜씨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여 아예 하지 않는 집들이 많았다 .
마침 엄마는 외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증편 만들기와 손두부를 잘 앗는 재간이 있어서 평소에 우리들에게 자주 해먹이였다 . 이 기회에 엄마는 결혼집 부조로 술 두병 하고 이외써비스로 아버지가 불을 때며 온밤증편을 한‘다라’ 가득 해드렸다 . 이튿날 결혼집에서 란리가 났다 . 이렇게 이쁜 떡을 누가 했냐며 칭찬을 하는데 바로 입소문이 나가 그후 결혼하는 집들마다 겨끔내기로 엄마한테 청을 들었다 .
허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 특히증편은 다른 떡과 달리 하기가 굉장히 까다롭다 . 먼저 증편 쉼과 쌀가루비례를 잘 맞추어 반죽을 하는데 쉼이 다되여 찌는 시간을 맞추는 것이기술이다. 또 수량이 많아 초저녁부터 한숟가락 한숟가락 찜가마에 찌기 시작하면 새벽까지 하는 것은 보통이다.
엄마라고 왜서 피로한 줄 모르고집에서 휠체어 타시며 혼자 계시는 아버지 또한 얼마나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랴! 허나 오로지 자식들을 위하는 일이고 또 한동네에서 상호간의 우의를 도모하는 일이기에 아버지 역시 자기 걱정 말고 도울 수 있는 데까지 도와드리라고 말 한마디라도 고맙게 하시였다 .
토닥토닥 토닥토닥 탁탁··· 친구언니가 보낸 동영상 속의 어머니들은 여전히 다듬이질을 잘하고 있다.그러는 사이 나는 더더욱 존경하는 엄마 사진을 보면서 나누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
엄마가 내가 대학교를 갈 때 그렇게 힘든 천표를 구해 새하얀 이불을해주고 그 은혜를 갚느라 밤을 지새우며 증편을 해준 것도 무척 감사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보물중의 보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모는 나의 거울이였다는 것이다 .
70년대초 , 집체로 농사 지을 때봄가을이면 생산대에서 집집마다에 땔나무 장만하는 시간을 정해주었다 . 그러면 무조건 꼭 그 시간내에 산으로 나무하러 다녀야 했는데 유독 우리 집만이 오빠가 군대에 나가서 엄마와 나 녀자 둘이서 15리 상거한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했다 .동북의 이른봄 , 산등성이 눈도 녹기전에 신발에 새끼를 동여매고 허리에 점심밥을 차고 산속에 들어가 조막도끼로 자작나무 뿌리를 쳐서 새끼로 단을 묶었고 또 목에 바줄을걸고 한단한단 겨우겨우 산기슭까지 끌어내린 나무를 생산대에서 소수레를 배치 못하여 도적맞혔던 일,나무를 실어오다 산길에서 소수레를 번져 다시 싣고 오느라 밤 7시넘어서야 집에 도착하던 일 , 겨울에 구새목이 얼어붙어 벼짚과 신문지를 태워 고드름을 녹이고 28년간휠체어 타시는 아버지를 모시며 소갈 데 말 갈 데 가리지 않고 궂은일 다하시면서 언제 한번 눈물 흘리거나 한마디 원망 한 적 없이 항상 힘을 돋구어주셨던 엄마, 엄마는 인생의 험난한 길을 어떻게 박차고 나가야 하는지를 명백히 지도해준 도사이고 스승이시였다 .
그런 엄마의 지극정성과 따뜻한사랑이 나를 반듯하게 키웠기에 나는 10여년간 남편이 외국에 나가있고 또 남방에 가서 10여년 있었음에도 가정을 위하여 억세게 살아왔고 맡은 바 사업을 잘 완수하고 자식 둘을 대학까지 졸업시켜 사회에 내놓았으며 지금은 나에게 속하는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 .
토닥토닥 토닥토닥 탁탁··· 핸드폰 동영상 속의 어머니들은 점점 더신나게 다듬이질을 하고 있다 . 나는두손 모아 간절히 빌고 빌었다.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깨끗하고 부지런한 미풍량속을 지켜가는 멋진 어머니들의 형상이 더 많이 선보이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