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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문화를 알리는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 조선족 문화 노래하는 김정구의 ‘진짜 나’를 찾는 려정

몇해전 해남에 갔을 때 리족 악기를 접하고 체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

“꿈이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거예요.”

2019년, 32세의 나이에 과감히 안정적인 직장을 떠나 음악의 길로 들어선 그의 선택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반면 안정적인 월급, 사회적 인정, 부러움을 사는 직장생활을 접은 그의 선택은 오로지 “노래하는 것이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였다.

그는 말한다. “꿈을 위해 모든 걸 버렸다는 표현은 어색해요. 오히려 꿈을 위해 진짜 ‘나’를 찾은 거죠.”

일전 기자는 김정구를 만나 그는 왜 공학도에서 가수가 되였으며 어떤 마음으로 조선족 문화 전파에 앞장서고 있는지를 들어보았다.

◎ 예술가 가정에서 태여나 개발자로 살다 찾은 음악의 길

“부모님 모두 예술을 하셨지만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진 않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 길을 선택한다면 혹시 자신들처럼 현실의 벽에 부딪쳐 실망할가 봐 걱정이 크셨던 것 같아요. 그제날 예술단에서 가수로 활약하셨던 아버지는 기타도 정말 잘 치셨는데 저에겐 절대 악기를 가르쳐주지 않으셨거든요.”

고배를 마신 적 있는 부모님은 그래서 아들이 음악을 취미로만 즐기길 바랐지만 ‘예술유전자’ 어디 안 간다고 김정구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학교에서 열리는 예술절은 물론 어느 곳에서 노래경연이 있다는 소리만 들려도 차표부터 먼저 끊을 정도였단다.

그러나 그는 부모의 기대대로 학생의 본분을 다했고 공부 성적 또한 우수했던 터라 대학입시에서 예술과는 무관한 대학을 지망했다. 흑룡강과학기술대학 전기공정및자동화가 그의 대학 전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도 끼를 감출 수 없었던 그는 “대학 시절 내내 무대에 있었던 기억뿐”이라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가수라는 직업은 그의 진로 선택에서 우선 사항이 아니였다. 졸업후에는 여느 취준생들이 그러했듯 전공을 살려 대기업에 들어갔고 개발자의 삶을 살았다. 운좋게 상해에서도, 광동에서도 다 대기업에 취업하면서 그는 그때 당시 동년배에 비해 월급도 높았고 대우도 좋아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그의 인생이 그렇게 순탄하게 또 잔잔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이건 진짜 배부른 흥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데 정말 그랬어요. 회사 개발팀의 일원으로 시스템을 개발하는 성취감도 컸지만 무대에서 노래할 때 만큼 마음이 뛰는 순간은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회사의 년말년시 송년회 시즌이 되면 되게 신났다.”며 멋적게 웃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그는 2019년, 삼십대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를 나왔다.

◎ 안정을 버리고 예술을 택한 새로운 도전

늦깎이 가수 데뷔라니… 사직서를 낼 때 거의 모든 사람이 반대할 정도였다. 주변의 리해 못할 시선 속에서 부모님이 오히려 그의 꿈을 지지해주었다. 아들의 열정 앞에 예술을 반대했던 부모님은 “네가 원한다면 하라”고 힘을 보태주었던 것이다.

가족의 응원을 등에 없었지만 아무런 연줄도 없었던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때 참가한 것이 한 대형 음악 오디션 프로 <중국의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자칭 순 노력파라고 밝힌 그의 집념 덕분이였는지 예선전에서 김정구의 음색을 알아본 한 음악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들어올 줄이야. 첫 ‘데뷔 시도’ 만에 계약까지 일사천리로 체결했다.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셈이다.

지금은 1인 기획사로 홀로서기에 나섰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초창기 시절 저에게 많은 배움을 준 고마운 회사”라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 조선족 문화 선양과 음악적 꿈을 향한 려정

그런데 공연을 다니며 김정구는 뜻밖의 발견을 했다. 일부 남방지역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조선족이라는 민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였다. ‘왜 모를가?’ 의문을 품다가 그는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고 나도 56개 민족에 대해 자세히 잘 모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경험은 중국 전역에 조선족을 소개하고 조선족 문화를 알리고저 하는 그의 강렬한 사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순간부터 그의 음악 려정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급하려면 자신부터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하고 자료도 찾기 시작했다. 2020년부터 구상하던 계획을 2021년에는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다.

2021년부터 청도, 천진, 대련, 심양 등 조선족 집거지를 찾아 조선족 문화를 탐방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전국 방방곡곡 60여개 지역을 누볐다. “이건 공익활동”이라고 못박은 그는 지금 한창 전국 각지에 발자국을 남기며 체계적으로 조선족 문화를 기록하고 보급중이다. 나아가 이를 대중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새로운 형식의 문화 콘텐츠를 부단히 창조해내고 있다.

◎ 음악과 문화의 선순환

김정구의 조선족 문화 선양 작업은 순수히 사비로 운영된다. “협찬 없이 사비로 진행하는 원인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좋은 음악을 열심히 창작하고 공연도 부지런히 뛰면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건 일이라기보다 선순환인 거죠.”

그의 선한 영향력은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는 흑룡강과 서장 관광부문의 초청을 받기도 했고 중앙TV방송, 산서위성TV방송 등 전국 여러 TV방송국의 러브콜을 받고 텔레비죤방송에 출연하며 점점 더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20만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는 김정구의 틱톡계정에 들어가면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행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하북성 진황도시 북대하에 있는 조선족마을을 찾아가는 영상이며 해남성, 강소성, 료녕성 등 지역을 탐방하며 조선족 문화를 기록하고 소개하는 영상들이며… 지난해 국경절을 맞아 <나와 나의 조국>을 조선말 버전으로 부르는 영상이며 대히트를 친 영화 《나타》를 직접 조선말로 가사를 붙여 부른 영상들 모두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고 지금도 여전히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조선족 음악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악기와 음악에도 관심이 많다고 밝힌 그는 다른 민족 음악인들과의 교류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계정에는 다른 민족 음악인들과 음악을 공유하고 서로 민족악기를 연주하는 영상도 있고 조선족은 물론 다른 민족의 문화를 소개하는 영상도 눈에 띈다.

“서로의 문화를 공유하고 그중에서 좋은 점을 배우는 것이 바로 민족 대융합”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 ‘외지인’의 시각으로 본 연변

흑룡강에서 나서자란 김정구는 류창한 조선말을 구사하지만 그전까지 연변에 와 본 적은 없다. 여태 전국 각지를 다니며 조선족 문화를 탐색한다고 했지만 그는 연변이야말로 조선족의 민속문화가 가장 풍부하게 잘 보존되여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직접 못 본걸 다른 사람들에게 홍보할 자격이 있을가?’ 그는 2024년초 연변행을 결심한다.

“‘외지인’의 시각으로 연변을 보고 느끼려 했어요.” 그는 첫 방문지로 연변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에서 그는 조선족 줄다리기(拔草龙), 조선족 온돌 등 여태 본 적 없는 것들을 보고 들었다. 또 부동한 시기의 전시품들을 통해 그 배후의 력사, 인물, 이야기와 백성들의 생활 정황을 자세히 료해할 수 있었다. 서시장, 하남시장, 지하상가 등 연길 사람들이 자주 가는 곳을 찾아가고 골목골목 돌아보면서 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 가장 연길다운 모습을 엿보았다.

진실된 체험을 통해 나온 그의 연변행 영상은 많은 이들에게 연변의 문화와 매력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였다.

“인터넷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제 영상을 보고 연변에 대해 알게 됐고 또 관광을 다녀왔다는 팬들의 말을 들을 때면 큰 책임감을 느낍니다.”

올해 6월 김정구는 연변의 음식, 풍경, 인문환경을 노래하는 창작음악 <연변 빛>을 발표해 그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관광도시 연변의 매력을 노래에 담았다.

◎ “꿈이요? 대표작으로 기억되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김정구’ 하면 대표작이 떠오르고 히트곡이 흥얼거려지는 그런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더불어 “가끔 저보고 ‘조선족 문화 홍보대사’라고 불러주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단지 조선족 문화를 전파하려고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명일 뿐입니다. ‘홍보대사’라는 타이틀은 너무 무거워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음악을 만드는 가수, 조선족 문화를 알리는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김가혜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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