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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길림신문》]

창간호를 받쳐들고 덩실덩실 춤추던 그날

◎ 김삼철

저자 김삼철

1985년 봄의 일이였다.

길림신문사 리금남기자(후에 사장 겸 총편집)가 《길림신문》 창간호를 들고 장춘지역 유수현(현재 유수시)에 있는 연화조선족향(이하 ‘연화향’)정부에 찾아와 《길림신문》 창간 소식을 전하자 연화향정부는 삽시에 기쁨의 도가니로 들끓었다.

그날 저녁, 연화향정부 초대소에서는 향당위와 향정부 책임일군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길림신문》 창간호 출간 축하 파티가 열렸다.

특별한 준비가 없이 차린 음식상에는 토장국에 배추김치, 마른 두부찜, 모두부 등 소박한 음식들이 올랐지만 분위기는 그 어느 축제보다 못지 않게 화끈하였다.

리금남기자가 길림신문사 설립과 《길림신문》 창간호 출간 소식을 발표하자 모두들 우렁찬 박수로 축하를 보내였다. 그 얼마나 바라고 바라던 소망이였던가? 그 소망이 이루어졌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모두들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연화향 군중들은 흑룡강성과 료녕성에 모두 조선문 성급 신문이 있는데 조선족이 제일 많은 길림성에 조선문으로 된 성급 신문이 없는 것을 아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나 역시 그랬다. 그래서 향정부 간부들은 더없이 기뻐하였다.

연화향은 설립된 지 40년에 가까워오지만 자기 행정구역에 우리 문자와 언어로 된 신문방송이 없어 아쉬움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나는 축하 파티에서 창간호 신문을 받쳐들고 흥겨운 노래소리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날 저녁 밤 늦게 집에 돌아와 안해한테 《길림신문》 창간호 출간 소식을 알리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설레는 마음 때문에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날을 밝혔다.

연화향은 당시 편벽한 시골인 데다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조선족 문화활동이 매우 적었다. 연변방송은 주파수가 낮아 들을 수 없고 《연변일보》는 거리가 너무 멀어 받아보자면 일주일이나 걸려 신문이 구문이 되였다. 그래서 가까이에 있는 흑룡강조선어방송과 《흑룡강신문》을 주로 듣고 보았다. 그런데 필경 흑룡강성은 타성이다 보니 감정과 호흡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을 알자면 속수무책으로 타성 신문과 방송이라도 보고 들어야 했다. 당시 연화향의 신문 주문 부수와 청취률이 흑룡강성 그 어느 곳보다도 높아 흑룡강신문사와 흑룡강조선어방송국에서는 연화향을 중시하게 되였다. 연화향유선방송소에서는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세차례 고음 방송으로 흑룡강조선어방송을 중계하였는데 전 향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당시 흑룡강신문사와 흑룡강조선어방송국에서는 수시로 기자들이 취재를 내려왔고 연화향에 통신원 대오도 건립하였다.

당시 《흑룡강신문》은 연화향 로인독보조의 유일한 구독 신문이였다. 그때 나는 연화향정부에서 교육보조원과 계획생육보조원 사업을 하였는데 통신원소조 책임은 내가 맡았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보도기사와 통신기사 원고를 가지고 직접 할빈으로 다녔 는데 연화향의 소식이 《흑룡강신문》과 흑룡강조선어방송에 자주 채용되였다.

나는 원래 연변에서 출생하여 20세 때부터 《연변일보》와 연변방송의 통신원으로 활약하다 보니 보도기사에 민감하였다. 당시 연화향에서는 집집마다 모두 흑룡강조선어방송을 들었는데 방송에서 연화향의 소식이 방송되면 모두들 기뻐하였고 이튿날이면 화제의 중심이 되였다. 그런 상황에서 본 지방의 길림신문사가 설립되고 창간호가 출간되였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가뭄에 단비’ 같은 희소식이였다.

그때로부터 《길림신문》은 연화향 군중들의 길동무가 되여 지금까지 정치, 경제, 문화, 생산, 생활 등 많은 분야에서 고락을 같이해왔다. 연화향 군중들은 “자기의 신문이 있게 되여 뒤심이 든든하다.”고 하면서 《길림신문》을 더욱 사랑하고 애독하였으며 본 지방의 생활, 생산 가운데서 용솟음쳐나온 아름다운 풍토인정을 《길림신문》에 소개하였다. 《길림신문》은 여러 마을 ‘로인회’의 독보물로도 극진히 사랑받아왔다.

그후 나는 자식들을 따라 연변에 돌아와서 생활하고 있는데 해마다 《길림신문》만은 잊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 주문해보고 있다. 나는 수십년간 《길림신문》을 한장도 빼놓지 않고 모두 받아보았다. 《길림신문》은 국내의 소식들과 사회의 이모저모, 나아가 절기에 앞서 농촌의 농사 준비와 형세, 농작물 자람새 등을 제때에 보도하여 광범한 농민들의 친근한 벗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리고 《길림신문》은 독자들의 길동무로, 백성들의 대변인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바 항상 군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2015년 7월 16일, 중공중앙 총서기 습근평동지가 연변을 시찰하였는데 나는 습근평 총서기의 연변 시찰 소식과 사진을 실은 7월 18일자 《길림신문》을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2017년에 《길림신문》 제1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공모가 있었는데 내가 쓴 <풍악쟁이>, <땅소나기>, <자전거 타고 결혼>, <엄마 아빠가 되던 날>, <어미지향>, <새집 짓던 나날> 등 수십편이 채용되여 발표되였고 수상의 영예도 받아안았다. 나는 《길림신문》의 수기와 인물소개 등 중요 문장들을 오려내여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지금 나는 이미 86세 고령이지만 《길림신문》을 계속 주문해 보고 있으며 가끔씩 원고도 써서 투고하고 있다. 《길림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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