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석양을 바라보며 문득 사색에 잠긴다. 석양은 왜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는가? 해가 서산에 다달은 순간, 하늘은 온갖 색갈로 물들어 마치 화가가 붓을 휘둘러 그린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다. 주황, 분홍,금빛이 어우러져 저녁 하늘을 수놓은 모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황홀하다.
석양이 강물 우로 기울면 물빛은 황금색으로 물들고 발아래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점점 흐릿해진다. 어느새 내 삶에도 이런 시간이 찾아왔다. 황혼, 이 단어를 입에 올릴 때면 저도 몰래 말 못할 담담함이 밀려오지만 동시에 익숙한 위로가 스며들어오기도 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부르하통하를 거닐면서 석양을 바라보던 기억이 떠오른다.그때 어머니는 “석양은 하루의 마무리를 예쁘게 장식해주는 자연의 선물이란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는 그 말의 깊이를 잘 리해하지 못했지만 석양이 삶의 려정을 비춰보는 거울이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지난 가을 우리 부부는 산책을 나가 모아산 아래 세전이벌을 거닐었다. 발아래로 펼쳐진 논밭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해는 서서히 지고 있었지만 하늘은 오히려 더욱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주황에서 진홍, 자주빛까지 쌓인 색이 마치 인생의 황혼 려정과 닮아보였다. 젊은 날의 강렬함, 중년의 풍요로움, 그리고 로년의 잔잔함이 한데 어우러진 듯했다.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 광경에 빠져들었다. 묵묵히 걸어가다가 슬그머니 남편의 손을 잡으며 우리도 석양처럼 아름답게 나이 들면 좋겠다며 살짝 미소를 보냈다.
어느 가을날, 락엽이 쌓인 공원 벤취에 앉아있노라니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인생의 박자가 들렸다. 급하게 걷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 멈춰서서 하늘을 보는 사람, 그 각자의 속도가 그대로의 삶의 굴곡인 듯 싶었다. 나는 이제 그 속도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 락엽 하나에 시선을 주고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 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길 여유를 찾고 싶다. 옛 사진을 넘기며 웃고 오랜 친구와 통화하며 수다도 떨고 이런저런 작은 추억 속에서도 만족감을 찾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하면서 석양처럼 은은하지만 사라지기 전 더욱 선명해지는 강렬한 빛 그 뒤에 드리운 노을을 보련다.
퇴직후 나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품고 있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그 것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퇴직후 나에게는 시간이 생겼다. 그 시간을 활용하여 나는 글쓰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막막했다. 빈 종이를 바라보며 무슨 글을 써야 할지 고민되였다. 하지만 점점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되였다. 나의 경험과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서 나는 각종 잡지사와 신문사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나의 첫 작품이 실렸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글이 세상에 나갔다는 사실이 너무나 뿌듯했다. 그후로 나는 꾸준히 글을 써 여러 매체에 발표했다. 매번 글이 실릴 때마다 나는 새로운 성취감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석양빛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느끼는 평안함과도 같았다. 석양빛은 하루의 끝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그것은 마치 나의 인생을 상징하는 것 같다. 젊은 시절의 열정과 패기는 이제 석양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 빛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하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석양이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여전히 꿈꾸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는 짬만 나면 글을 쓴다. 이제 나는 예순을 넘긴 나이이다. 젊은 시절의 패기와 열정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 자리를 여유와 지혜가 채워주었다. 그리고 석양빛 속에서 나의 글쓰기 려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석양빛처럼 불타고 싶은 마음이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질 때 하늘은 잠시 화관을 쓴 듯 찬란해진다. 예전에는 이 순간을 놓칠가 봐 안달했지만 이제는 그 빛이 스민 공기를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순간의 빛을 영원히 가둔 그림처럼 나도 매일의 노을을 마음에 담아보련다. 세월이 고여 만든 주름 속 미소를, 다 닳은 신발 밑창에 더 많은 길을 담아내면서 이제는 그 굴곡을 어루만지며 내 인생을 읽어보련다. 피부 아래로 드러난 이마의 세로줄, 눈가의 잔주름, 시간의 저축이야말로 진정한 자서전이다. 스무살의 나, 마흔살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 서로 다른 속도로 어우러져 내 발자국을 만들었다. 젊은 날의 려정, 중년의 고뇌, 지금의 평정 모두 다른 색갈이지만 어우러지면 황금빛이 된다. 오래된 와인처럼 삶도 깊어질수록 풍미가 진해진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진정 석양의 빛이 아름다운 리유가 아닐가 싶다.
오늘도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석양을 맞이한다.해빛이 창문틈으로 스며들어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마냥 스쳐지나간다. 젊은 날들의 고생과 기쁨,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과의 추억들이 석양빛에 물들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남기고 간 모든 사연들이 하나하나 빛나는 리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석양이 빛나는 비결은 아마도 그 순간의 순수함에 있을 것이다. 지는 해는 아쉬움보다는 오늘을 잘 마무리했다는 만족감으로 빛나야 한다. 그 빛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채롭게 반사되지만 석양이 아름다운 리유는 단지 화려해서가 아니라 사라지기 직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인생의 매일매일을 그렇게 살아간다면 지는 해가 주는 그 찬란한 작별 인사가 두려울 것도 없으리라!
창밖으로 어스름이 내려앉는다. 오늘도 또 하나의 석양이 저물어가지만 래일의 해돋이를 기다리며 오늘의 석양에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빛을 잃은 순간조차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석양처럼 내 인생 한구석에 남은 하얀 여백에 나의 모든 순간이 빛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