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로부부는 길림에서 살다가 지금은 절강성 대주시에 있는 아들 집에서 살고 있다.
나의 고향인 길림시 교외의 김가툰에는 고사리, 취, 두릅, 민들레, 달래, 더덕, 버섯 등 각종 나물이 흔해 빠졌지만 이곳에서는 보고 죽자고 해도 없다.
우리 식구들이 민들레무침을 즐기는지라 봄이 되면 로친이 민들레 캐러 다녀보았지만 한포기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2년전에 고향에 갔던 김에 민들레씨를 구해 아들이 경영하는 회사 앞마당에 심었더니 사시장철 푸르싱싱하게 자랐다. 그후부터 민들레를 실컷 먹게 되였고 아들은 친구들에게 민들레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볼 수 없는 영채, 깨도 심어 영채김치도 해먹고 깨잎도 먹을수 있게 되였다.
올겨울(절강의 겨울은 길림의 늦가을과 초봄 날씨와 흡사하다)에는 달래를 캐서 달래반찬을 밥상에 올려놓았더니 식구들이 맛있게 먹었다.
이렇게 타향에서도 고향의 음식들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곳 대주시에도 조선족들이 몇집 된다. 해마다 설명절이면 모여 회식을 하는데 각자 우리 민족 음식을 해온다. 어떤 집에서는 찰떡, 시루떡을, 어떤 집에서는 달떡, 송편도 만들어 온다. 고향의 음식을 먹으면서 술이 얼근하면 저가락 장단에 맞추어 노래하고 춤도 추면서 유쾌하게 명절을 보낸다.
이곳에는 흑룡강성에서 온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 있는데 부부가 식당을 경영한 지 28년이나 된다고 한다.
처음 만났을 때 어찌나 반가운지 정말 석달 장마 끝에 해빛을 본 것 같았다.
음식점에는 랭면, 찰떡, 시루떡, 송편, 소천엽도 있고 된장찌개, 김치찌개에 밑반찬으로 배추김치,깍두기 등 조선족들이 즐기는 음식은 뭐나 다 있다.
식당 복무원들은 등에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란 글을 써붙인 통일복을 입었는데 복장만 보아도 친근함이 느껴진다. 또 이 음식점에 가게 되면 조선족들을 만날 수 있어 마치 고향에 간 듯하다. 지금 우리는 이 음식점의 단골손님이 되였다.
또 길림시에서 온 한족이 운영하는 식당도 있는데 간판을 ‘동북길림시음식점’이라고 써붙였다. 간판만 보아도 반갑다.
간판에 씌여있는 ‘고향의 료리, 고향의 맛’이란 글귀 또한 내 고향 길림시의 음식맛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맛도 고향의 맛이지만 한고향 사람이라 우리가 가면 그들도 무척 반가워 한다. 우리는 외식을 하게 되면 이 식당을 자주 간다.
대주에는 산과 강, 호수가 많으며 해변가에 위치한 도시인지라 경치도 좋아 국가급, 성급 유명 풍경구가 부지기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람지들마다 또 안내판에 조선어를 곁들여 조선족들의 관광에 편리를 주고 있다.
나는 조선어로 된 문구를 볼 때마다 조선민족의 숨결을 느끼는 듯하여 반갑고 중화민족의 떳떳한 일원이라는 생각에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금년에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나의 80세 생일잔치에 로친의 74세 생일잔치를 겹쳐서 치러주었다. 그날 대주의 이름있는 호화식당에 잔치상을 차렸는데 아들의 친구들과 가족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남성들은 양복을 입고 녀성들은 조선족 치마저고리를 입었으며 어린이들은 색동옷을 입었다.
‘양상태 80생신 신영순 74생신 축수연’이란 프랑카드가 걸린 가운데 우리 로부부는 한복을 입고 왕관처럼 생긴 생일모자를 쓰고 식당 정면 좌석에 앉아 큰상을 받았다. 아들, 며느리, 손자가 올리는 술잔도 받고 기념으로 가족사진도 찍었다.
상에는 모태주도 있고 맥주, 포도주 그리고 찰떡, 시루떡, 송편 등 조선족 음식도 있었으며 우리 로부부가 생전 먹어보지도 못한 산해진미들로 푸짐했다. 생일잔치를 치르는 우리 로부부는 감개가 무량하였다.
길림의 한족은 다수가 표준말을 하지만 절강성의 한족은 방언을 쓰는 사람들이 있어 알아들을 수 없다. 그러나 정부기관, 병원, 은행, 공항, 정거장 같은 곳에 가면 표준말을 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면 마치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지금 아들 곁으로 와서 손군들까지 3대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나의 태줄이 묻힌, 부모님 산소가 있는, 그리운 친구가 있는, 입맛에 맞는 먹을 것이 많은 그리고 어린시절 나의 꿈과 청춘시절 나의 사랑의 달콤함이 있는 길림 교외의 내 고향이 늘 눈앞에 삼삼 떠오른다. 내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 있다.
/양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