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따르족은 중국의 신강과 로씨야련방, 우크라이나, 발칸, 까자흐스딴 등 나라와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민족의 다수가 중국 경외에 살고 있다. 2010년 제6차 인구조사에 따르면 중국의 따따르족은 3,556명으로 중국 경내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소수민족으로 집계됐다. 중국의 따따르족은 주로 신강위글자치구 경내의 천산 북부지역과 이리까자흐자치주, 창길회족자치주, 우룸치시에 거주하고 있다. 그중 신강위글자치구 창길회족자치주 치타이(奇台)현 대천(大泉)따따르향이 중국에서 유일하게 따따르족이 주체인 민족향이다.
따따르족은 고대 불가르인(保加尔人)과 킵차크인(钦察人), 돌궐(突厥)화된 몽골인들이 장기간 어우러져 살면서 형성된 민족이다. 불가르족은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주한 뒤 까스삐해 이북의 초원에 나타난 유목부락에서 생겨났다. 기원 7세기 전후 기타 유목부락의 잦은 습격으로 불가르 부락은 부득불 이주를 선택하게 되였고 그중 일부가 볼가강(伏尔加河) 중류와 까마강(卡玛河) 일대에 정착해 현지 토착민들과 융합되며 농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불가르인들이 그후 까잔(喀山)지역 따따르족의 중요한 한 갈래가 되였다.
20세기 초엽까지 따따르족은 자신들을 불가르인이라고 자칭했다.
그러다 13세기 중엽 서쪽 정벌을 떠난 몽골인들이 ‘볼가강-까마강 불가르부락련맹’을 소탕하고 칭키스칸의 손자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금장한국(金帐汗国)을 세웠다. 금장한국의 주민은 주로 불가르인과 돌궐어를 사용하는 킵차크인들이였다. 15세기, 금장한국이 쇠락으로 나아가며 까잔한국(喀山汗国)에 대체되였고 까잔한국의 수령은 자신을 몽골인의 후대인 따따르로 자칭했다. 그때부터 따따르가 까잔한국 및 그 린근 부락 주민들의 호칭으로 바뀌였다.
중국 경내의 따따르족은 19세기 20~30년대와 그후 잇달아 지금의 로씨야(구쏘련) 통치하의 까잔, 우빠(乌法), 쉬미레지(斜米列齐), 재상(斋桑)등 지역에서 이주해왔다.
따따르족이 중국에 이주한 시기는 대체로 세 단계로 나뉜다.
제1단계는 19세기 20~30년대이다. 19세기 이후 로씨야(구쏘련)의 농노제 위기가 날로 가심해지며 볼가강과 까마강 일대의 따따르인들의 토지가 대량으로 강점되였다. 하는 수 없이 각지로 피난을 떠나게 된 따따르인 일부는 볼가강 하류와 씨비리, 까자흐스딴을 거쳐 중국 신강 북부의 부르친(布尔津), 하바하(哈巴河)에 이르렀고 일부는 남쪽으로 이주해 중앙아시아에 이른 뒤 빠미르의 타쉬콜간을 거쳐 중국 신강 남부에 들어왔다. 지금 알타이(阿勒泰), 부르친 등지의 따따르족의 다수가 이들의 후손으로 가난한 목축민들이 위주이다.
제2단계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이다. 1851년과 1881년 중국과 짜리로씨야가 〈중로 일리바하대통상규약〉(中俄伊犁巴哈台通商章程)과 〈중로 일리조약〉(中俄伊犁条约)을 체결하면서 짜리로씨야가 신강 통상무역에서 많은 경제특권을 향유하게 된다. 따라서 많은 짜리로씨야 상인들과 까잔지역의 따따르 상인들이 신강으로 모여들게 되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신강에 남는다. 이 시기 이주한 따따르족중에는 지식분자와 성직자(宗教职业者)도 있어 이들은 신강에 학교와 청진사(清真寺)를 세우기도 했다.
제3단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서부터 20세기 30년대까지이다. 이 시기 신강에 이주한 따따르인이 가장 많으며 이주 원인 또한 다양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후 제국주의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기 위해 신강에 이주한 따따르족 청년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10월혁명 이후 따따르족의 적지 않은 소상공인과 수공업자, 농민, 지식인들이 구쏘련의 강제집단화를 피해 신강으로 이주해왔다. 이 시기 신강으로 이주한 따따르족중 일부는 자본가, 지주, 부농 등 10월혁명의 타도 대상들이였다. 최초로 신강에 이주한 따따르인 일부는 알타이 이르띄시강 류역의 까자흐족 카라카스 부락에 자리잡았다. 그 후손들은 카라카스 부락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즁갈분지 동남 끝에 이주했고 그후 20세기 초반에 짐살(吉木萨尔)과 치타이현 접경지대의 백양하(白杨河) 량안에 이주했다. 그후 또 경외와 우룸치 등지의 일부 따따르인이 이곳에 정착했다. 따따르 인구와 가축이 늘면서 청정부는 서쪽으로 소동구(小东沟), 동쪽으로 사천구(四泉沟) 일대의 목장을 따따르인에게 떼주어 그들이 유목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하여 오늘의 창길회족자치주 경내에 상대적으로 집중된 따따르 거주구역이 형성되게 됐다.
1944년부터 1949년까지 삼구(三区)혁명시기, 적지 않은 따따르족이 삼구혁명사업에 적극 참여해 큰 기여를 했다.
따따르족의 민간문학 작품은 아주 풍부하다. 신화전설, 이야기, 속담, 가요, 수수께끼 등 여러 쟝르를 아우르며 특히 시가와 민요가 신강 여러 민족 인민들 속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하여 “시가가 있는 곳에는 따따르인이 있고 따따르인이 있는 곳에는 시가가 있다.”는 설이 류행되기도 한다. 그중 따따르족의 민요 〈바라미스컨〉(巴拉米斯肯, 가여운 총각이란 뜻)은 신강 여러 민족들 속에서 널리 류행되며 신강의 류행가요가 되여 혼례식이나 명절 때 널리 불려지고 있다. 그외 〈백조진행곡〉, 〈백하강변〉, 〈나강〉(那冈) 등 따따르족 민요도 신강 여러 민족 모두 즐겨 부르는 노래이다.
신강의 여러 민족중에서 따따르족의 희극예술은 그 발전이 이른 편이다. 20세기 30년대 초반 따따르극단이 창설됐다. 따따르극단은 이닝(伊宁)과 쵸췌크(塔城), 우룸치 등 지역에서 비교적 큰 영향력을 지닌 문예단체이다. 이들은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작품외에도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고 로동인민들의 부지런하고 지혜로우며 순박하고 선량한 품성을 구가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대표작으로는 〈파서마하무〉(巴西玛哈木), 〈귀여운 사람〉, 〈하리야바눠〉(哈丽亚巴诺) 등이 있다.
따따르족의 음악은 장단이 선명하고 선률이 류창하고 화려하며 구조가 간결하고 구성지여 입에 잘 오르는 특징이 있다. 또 음악의 정서가 열렬해 듣고 있노라면 저도 몰래 흥에 겨워 춤을 추게 된다. 보통 고조부분에서는 휘파람이나 환호를 동반해 따따르족의 열정적이고 호방하며 락관적인 민족적 성격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중국국제방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