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홍광은 항일전쟁 시기 동북지역에서 활약한 동북항일련군의 주요 창시자이자 뛰여난 군사지휘관이다. 그는 1910년 조선 경기도 룡인군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린시절부터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불굴의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으며 일본인 교사의 체벌과 경찰의 억압에 맞서다 퇴학당한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항일구국의 신념이 더욱 확고히 자리잡게 했다.
1925년 가족과 함께 중국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한 그는 1927년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청년동맹과 농민동맹에 가입하며 조직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 3월, 그는 반석지역 최초의 농민혁명 무장조직인 반석농민적위대를 직접 조직하고 창설했다. 같은 해 9월, 공산국제기구의 ‘일국일당(一国一党)’ 원칙에 따라 중국내 조선공산당조직이 해체되자 리홍광은 이통현 삼도구에서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9·18사변’ 이후, 리홍광은 항일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뛰여들었다. 1932년, 그가 이끌던 적위대는 리송파의 특무대와 합병하여 반석유격대(후에 중국공농홍군 제32군 남만유격대로 개편)를 편성했다.
일본군의 빈번한 ‘토벌’의 극한 환경 속에서 그는 양정우를 도와 부대를 정돈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다. 1933년 1월부터 4월까지 양정우와 함께 유리하도(玻璃河套) 반‘토벌’ 전투를 지휘하며 네차례의 대규모 일본군 공세를 분쇄했다. 특히 륙도강전투에서는 일본군 수비대로 위장하는 기발한 계책을 사용하여 괴뢰군 영부를 습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1933년 9월 18일,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설립되자 양정우가 사장(师长) 겸 정위를 맡고 리홍광이 참모장을 력임했다. 그는 양정우를 도와 부대를 이끌고 휘발강 남쪽으로 건너가 룡강산을 중심으로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통화, 류하 일대 작전에서 그는 뛰여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지혜로운 삼원포 습격, 용맹스러운 량수하 공격 등 유명한 전투를 지휘했다.
1934년 2월, 리홍광은 남만항일군련합총지휘부 설립 준비 과정에 적극 참여하여 참모장으로 선출되였으며 여러 항일무장 세력의 통합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항상 민중과 깊이 소통하여 그들의 진심 어린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동지들에게 확고한 안정감을 주었다. 리홍광은 혹한의 환경 속에서도 늘 부하 병사들과 민중들을 먼저 배려했으며 자신에게는 엄격한 생활을 요구했다. 추운 겨울에도 낡은 모피 코트 한벌로 겨울을 넘기고 더운 여름에도 해여진 바람막이 한장으로 버티며 고난과 역경을 묵묵히 견뎌냈다.
당시 부대 병력의 약 3분의 1이 조선족 병사들이였고 많은 병사들이 지방 항일무장 세력에서 개편되여 합류한 상황이였다. 이에 리홍광은 강력한 지도부 수립과 전군의 단결이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특히 내부 단결과 통합의 중요성에 큰 무게를 두고 이 작업을 자신의 핵심 임무중 하나로 삼아 내부 단결을 철저히 추진해나갔다.
1934년 12월, 일본제국주의가 ‘방화, 살륙, 강탈’(烧光、杀光、抢光)이라는 ‘삼광정책’을 가속화하면서 부대의 식량 공급은 극도로 악화되였다. 장병들은 두주 동안이나 굶주림에 시달리며 나무껍질과 버섯으로 간신히 목숨을 이어가야 했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지휘관 리홍광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병사들은 깊은 우려에 빠졌다. 이때 압록강변 정찰을 나갔던 전련장이 20여근의 쌀을 가지고 부대에 돌아왔다. 취사병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얼른 밥 한그릇을 지어 리홍광에게 가져다주었다. 리홍광은 “이 밥을 소년영(少年营)의 병사들에게 보내주시오. 그들은 어리고 병들어 더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취사병이 밥을 소년영에 가져갔지만 소년영의 부상병들은 대표를 보내 밥을 다시 돌려보냈다. 이 광경을 본 리홍광은 밥에 버섯을 넣어 모두가 나누어 마실 수 있도록 죽을 끓이기로 결정했다.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정식으로 창설되자 리홍광은 제1사 사장 겸 정위가 되여 통화, 림강, 류하, 흥경 등지에서 광범위한 유격전을 펼쳤다. 1935년 2월, 리홍광은 부대를 이끌고 조선 국경내 동흥진 일본군 거점을 기습 공격하여 수십명의 일본군을 섬멸하고 다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다. 이번 전투에서 12명의 일본군 사병이 생포되였다. 리홍광은 한 녀성동지를 보내 그들을 심문하게 했다. 일본군은 화력 우세를 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되였다는 사실에 락담했으며 리홍광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했다. 이윽고 명성이 자자한 리홍광이 용맹스러운 ‘녀장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본군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그때로부터 일본군 사이에서는 리홍광이 ‘녀장군’이라는 신화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1935년 5월, 리홍광은 부대를 이끌고 환인으로 이동하던 중 일본군에 포위당해 치렬한 격전중에서 가슴에 총탄을 맞았다. 5월 12일,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리홍광은 부하들에게 “혁명은 언제나 피를 흘리고 희생하는 것이며 승리는 반드시 우리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 밖에 안되였다.
불과 5년간의 혁명생애 동안 리홍광은 평범한 농민에서 뛰여난 군사지휘관으로 성장했으며 동북항일투쟁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그의 혁명정신과 군사 지휘 재능은 후세에 영원히 귀감이 되고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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