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초, 17살 어린 나이에 나는 농촌에 내려가 고된 농사일에 종사하면서 농촌 청년문화활동에 참가하고 우리 촌 신문주문호들의 신문배달을 책임지면서 《길림신문》과 접촉하게 되였다. 후에는 고중시절 담임이셨던 량정길선생님(그 당시 훈춘시인민방송국 편집기자로 전근되였음)의 도움으로 신문과 방송에 통신보도를 쓰기 시작하였다.
1985년 길림신문사 편집기자였던 리원철선생님의 도움으로 《길림신문》과 인연을 맺고 많은 신문기사를 투고하였다. 비록 어수선한 기사들이였지만 많은 편집기자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논농사에 푹 재미 들여>, <신흥촌 빚낟가리 낮아진다> 등 적잖은 기사들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신문과 방송에 내가 쓴 글들이 발표되면서부터 동네 사람들은 내 글이 실릴 때마다 칭찬해주었고 하다문향당위에서는 나를 1986년도 전 향 우수통신원으로 표창하면서 만년필과 침대보를 장려해주기도 하였다. 1987년 8월에는 하다문향 하산소학교에 대리(代课) 교원으로 추천받아 자랑스런 인민교원으로 되였다. 1989년 가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촌소학교 소재지인 하산촌에서 농호마다 생산한 목이버섯을 팔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사정을 료해한 나는 <우리 촌의 목이버섯을 사가십시오>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길림신문사에 투고하였는데 이 기사가 인차 발표되면서 그 많은 목이버섯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되였다. 나는 《길림신문》에 신문기사도 자주 써보내고 본직 사업도 잘하는 한편 연변대학 언어문학학부 통신학과 공부까지 하였다. 열심히 노력한 보람으로 연변대학 졸업장까지 타게 되여 대학에 못 간 서러움을 덜기도 하였다. 후에는 대리 교원으로부터 합동간부 정식 편제로 넘게 되여 날 듯이 기뻤다.
2008년 2월에는 량수진중심소학교에서 도문시사법국 량수사업소에 전근되여 사법계통에서 일하게 되였다. 사법계통에서 근무하는 기간에도 나는 필을 놓지 않고 《길림신문》에 초요사회, 조해사업, 안치방조사업, 법률선전 등 여러 면의 보도기사들을 많이 써보냈다.
특히 인상 깊은 것은 <생전에 투옥중인 아들 만나게 해줘서 고맙소!>라는 제목으로 《길림신문》에 발표된 기사이다. 간암말기로 림종을 앞둔 량수진의 곽모모 로인이 연길감옥에 투옥중인 아들을 만나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을 량수진사법소에 반영하였는데 사법소에서 이를 도문시사법국에 반영하였고 연길감옥과 련계했더니 연길감옥에서 즉시 차를 내여 모자간이 만날 수 있게 해준 감동적인 사연을 다룬 내용이였다.
그동안 열심히 글을 써서 《길림신문》에 투고하고 신문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어오면서 느낀 바가 있다. 바로 《길림신문》이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고 《길림신문》이 나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어 지금까지 빛나게 걸어올 수 있지 않았을가 하는 것이다.
《길림신문》의 번영을 두손 모아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