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한했던 70년대 우리 집은 재봉침같은 것은 살 엄두도 못 냈다.옷을 수선하거나 만들 일이 있으면 엄마는 큰이모네 집에 가서 해왔다.
큰이모네 큰언니는 어릴 때 높은 데서 떨어지는 바람에 척주에 혹이 생겨 장애인이 되였다. 점점 커가는 딸을 지켜보던 큰이모는 손재간이라도 배워주어 밥벌이라도 시키려고 재봉침을 샀다. 70년대에 재봉침은 사기도 어려웠고 큰 재산으로 보배처럼 여겼던 터라 애들은 다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재봉침을 애지중지하면서도 큰이모는 엄마가 바느질하러 가면 재봉침을 마음대로 쓰게 했다.한번 빌려 쓸 때마다 너무 미안하여 엄마는 집식구들의 기워야 할 옷가지들과 새로 지을 옷감을 한번에 한보따리씩 들고 갔다.어머니는 진종일 재단하고 박고 고치고 하면서 밤중까지 고생해서야 일을 겨우 마무리할 수 있었다.
큰이모네 집은 서시장 부근에 있어 우리 식구들은 연길 시내로 가면 꼭꼭 들리다 보니 밥도 많이 얻어먹어 미안할 때가 많았다. 특히 엄마를 따라갈 때면 큰이모는 우리에게 점심,저녁까지 챙겨주었다.말린 언감자를 옆집 방아간에 가지고 가서 떡가루를 내서는 무우소에 돼지고기를 조금 넣고 만두를 만들었다.김이 몰몰 나는 반들반들한 언감자만두를 가마에서 꺼낼 때면 군침이 돌았다.렴치없이 배불리 먹었던 새까만 감자만두,지금도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어느 해 ‘6.1’절로 기억된다. 학교에서 집체무를 추는데 우리 치마가 너무 길어 짧게 고쳐 입고 오라고 했다. 어린 동생은 배고프다고 떼를 쓰고 언니들은 언제 치마를 고쳐주나 엄마 눈치만 보았다. 큰이모 막내딸이 우리와 한학교에 다니다 보니 이 일을 자기 엄마에게 알렸다. 큰이모는 자기도 갓 퇴근하고 와서 힘들겠는데도 엄마한테 자기가 애들 치마를 고쳐줄 테니 가져오라고 했다.무던한 큰이모가 있었기에 우리는 ‘6.1’절 집체무 활동에 이쁜 치마를 입고 갈 수 있었다.언니는 고친 치마를 입고 빙빙 돌면서 신나게 춤까지 추었다.이렇게 엄마가 힘들 때 큰이모는 항상 우리 집 뒤받침을 해주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활이 좀 펴이자 엄마는 남의 집을 다니며 재봉침을 빌려 쓰는 것이 미안하여 아껴 먹으며 모은 돈으로 ‘상해표’ 재봉침을 샀다. 피땀으로 갖춘 기물이라 엄마는 누구도 다치지 못하게 하였다.먼지가 오를가 봐 꽃천으로 씌우개까지 만들어 덮어놓았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온 큰언니가 녀자들은 재봉기술을 배워야 한다며 혼자서 재봉침 덮개를 열었다 .나는 엄마의 성질을 잘 알기에 엄마가 온 다음 엄마에게서 먼저 배우라고 권고하였다.언니는 “너처럼 다 고려하다 나면 언제 배우겠니?” 하더니 자그마한 바늘구멍에 실을 꿰여 물린 후 앞뒤로 굴리면서 다루는 련습을 하였다. 몸까지 흔들면서 말이다. 그런데 실이 엉키고 감기면서 바퀴가 돌지 않았다. 언니는 긴장하여 얼굴이 빨개졌다. 앞뒤로 당겨도 보고 밀어도 보고 했지만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몰라하더니 그대로 덮개를 닫아버리고 모르쇠를 놓았다.저녁에 바느질을 하려다 실이 감긴 채로 있는 것을 발견한 엄마는 누가 다쳤는가고 물었다. 나는 더럭 겁을 먹고 숨소리도 못 냈다. 언니는 자기가 맏이로서 엄마의 부담을 덜려고 바지를 기우려 했는데 실이 감기는 바람에 못했다고 승인하였다. 엄마는 크게 고장난 줄로 알고 “누구도 다치지 말라고 내가 몇번 말했니.” 하더니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언니를 때렸다. 그 정경을 보던 아버지가 “고장나면 수리하면 되지 왜 애를 때리는가?” 하며 엄마를 밀쳐버렸다. 좀 지나자 속이 풀렸는지 엄마가 옆집 기계수리공아저씨를 청하여 엉켰던 실을 빼고 다시 감으니 별문제없이 잘 돌아갔다. 아저씨 말씀에 의하면 고장난 것이 아니라 이런 현상은 주의하지 않거나 잘 모르면 흔히 생긴다고 했다.피땀으로 사놓은 거라 엄마는 재봉침을 딸보다 더 아꼈던 것 같다.
후에 우리도 엄마한테서 재봉기술을 배워 여간한 옷은 자기절로 기워 입었다. 공장이 해체되여 기계를 처리하자 우리 집에서도 털옷을 짜는 기계를 샀는데 이때부터 재봉침은 우리 집에서 더 큰 작용을 하였다. 털실옷들을 손으로 한뜸씩 깁던 것을 재봉침으로 기우니 빠르고 바느질도 곱게 나왔다. 시장에서 옷을 급히 수요해도 재봉침으로 인차 만들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옆집 할머니는 아들 하나에 딸 셋이였는데 아들이 한국으로 돈 벌러 가는 바람에 딸들이 와서 어머니의 생활을 많이 돌봐주었다. 딸들의 신세가 많지만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아들 밖에 없었다.큰딸이 민속촌을 꾸리면서 재봉침을 지원하라고 어머니에게 사정하였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큰 재산이라며 아들의 것이라 하였다. 사망하면서도 딸이 그렇게 욕심내던 재봉침을 며느리한테 물려주었다. 며느리는 쓸 줄도 모르거니와 수요되지도 않는다고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수요가 있는 큰시누이에게 주라고 하였다. “나는 재산이 저 재봉침 밖에 없네.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걸 아들에게 물러주려고 하네.” 시어머니의 유언이라 며느리는 할 수 없이 삼륜차 일군을 삯내여 시어머니가 사시는 5층 집에서 그 재봉침을 ‘모셔내와’ 반시간 거리에 있는 자기 집 6층으로 가져갔다. 시어머니는 그제야 만족해하더니 며칠후 세상을 뜨셨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집집마다 재봉침을 샀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기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상점에 가서 마음 드는 옷들을 사다 보니 재봉침은 집집의 장식품으로 되여버렸다.
어머니 세대의 큰 재산이요, 대물림보배였던 재봉침은 수많은 어머니들의 희망이였고 눈물이였고 전설이였다. 몇십년을 우리를 동반하고 우리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재봉침,지금은 력사의 무대에서 물러났지만 우리 아버지네는 아직도 귀물로 높이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