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길림신문》을 접촉했을 때는 1985년, 그러니까 초창기 때부터였다.
1977년 나는 당시 훈춘현 량수공사 남대중학교 고중을 졸업하고 농촌에서 농사일에 종사했다. 그때 세월에 다 그러했듯이 농촌의 문화생활은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영화 한편을 보려 해도 15리나 되는 향소재지에 걸어가야 했고 집집마다 텔레비죤도 보급되지 않았으며 조선문 잡지나 신문 같은 문화적 식량도 얼마 없었다.
어느 날 내가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술을 놓기 바쁘게 촌 민병무기고의 당직을 서려고 촌사무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항미원조 참전 2등 영예군인이며 촌에서 창고보관원 겸 출납으로 사업하셨던 집안 친척벌 되는 매형이 신문 한장을 넘겨주는 것이였다. “새로 나온 신문인데 볼 만하오.” 반갑게 받아보니 《길림신문》이였다.
그날 저녁 함께 당직 서는 친구들이 트럼프놀이로 떠들썩했지만 나는 조용히 한켠에서 새로 나온 《길림신문》을 읽으면서 홀딱 매료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장 40년 동안 《길림신문》을 열심히 구독해왔다.
2001년 도문시로 전근한 후부터 한해도 빠짐없이 《길림신문》을 주문해 보았다. 퇴직하는 해 단위 령도들이 무슨 부탁이 있는가고 물어볼 때 단위에서 해마다 《길림신문》을 계속 주문해달라고 해서 웃긴 일도 있었다.
《길림신문》은 많은 소식들이 새로웠고 산재지구의 소식들도 볼 수 있어 좋았으며 기사들이 우리와 너무 가까운 일들이여서 좋았다.
그때 촌에서 공청단서기로 일했던 나는 청년들을 동원하여 촌 식수 임무를 도맡아 활동 경비를 벌어들이고 촌지도부의 지도와 방조로 청년도서실도 꾸려 여러가지 신문 잡지도 구전히 갖추었으며 문예선전대도 건립하여 청년생활을 풍부히 했다.
향과 현, 주의 모범 공청단서기로 여러차례 표창을 받았고 공청단총지도 주선진단위로 표창받았다. 이런 성과는 《길림신문》을 비롯한 여러 신문을 열심히 구독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90년 내가 향정부에서 사업할 때도 나의 손에서는 《길림신문》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때 다각경영 부문의 특산과를 책임졌는데 늘 신문에 실린 농업과학지식편을 가위로 오려 큰 목책에 붙여놓고 하향할 때면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학습하고 농민들에게 전수했다.
1991년 내가 향당위 선전위원으로 사업하게 되면서부터 길림신문사의 여러 기자선생님들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어느 날 기관의 문서가 사무실에 찾아와 당위 서기가 부른다고 해서 찾아가 보니 50여세 쯤 돼보이는, 지식분자 틀이 다분한 낯선 분이 쏘파에 앉아계셨다. “길림신문사 리금남 사장님이요. 인사하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신문사 분들과 면목을 익히게 되였고 그후로는 허동철 부총편집, 윤성환, 최경학, 김청수, 리원철 등 많은 기자분들과 밀접한 래왕을 하게 되였으며 그분들도 량수를 자주 다녀갔다.
어느 해 허동철 부총편집이 취재를 왔다. 초대소에서 점심식사를 하다가 그 촌의 당지부 서기가 성송권 선전위원도 글을 잘 쓰는데 왜 《길림신문》에는 투고를 안하는가고 물었다. 그러면서 전번에《연변일보》와 연변방송에 나간 소식들이 반향이 좋더라고 나를 치하해주었다. 허동철 부총편집은 그런 일도 있었느냐며 그 자리에서 원고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나도 “선생님께서 저의 소원 하나 들어주십시오.” 하고 청을 들었다. 그때까지 량수진에는 진가가 없었는데 이처럼 유명한 작사자를 앞에 모셔놓고 이대로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후부터 나는 부지런히 원고를 써서 《길림신문》에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1997년 3월 11일 1면 톱에 실린 <량수진 영화촌과 연길북흥과자공장 ‘성향련합신용호조협회’ 설립> 기사가 호평을 받았다. 당시 농민들은 쌀 팔기 어려웠고 곤난호들에서는 아이들의 학비와 당해의 대부금도 못 갚아 안달아했다. 연길북흥과자공장의 김영숙 리사장은 농민들의 이런 곤난을 헤아려 상호 돕는 원칙을 기초로 이 촌과 자매관계를 맺고 촌의 곤난호에 부림소와 새해 생산물자비를 지원했으며 촌에서는 5헥타르 논에 생태유기농 찰벼를 심고 4헥타르 밭에 팥을 심어 수확한 후 몽땅 북흥과자공장에 팔기로 하였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다른 한편은 1995년 8월에 쓴 <남대촌 농업협회 저마끔 장끼>라는 기사였다. <양돈협회 남새협회 과수협회 황연협회 여덟 신선 닐리리 바다 건느네>란 제목으로 보낸 지 얼마 안돼 인차 신문에 발표되면서 ‘편집자의 말’까지 함께 실렸다.
신문, 방송에 100여편의 기사를 썼으나 이렇게 ‘편집자의 말’까지 추가된 문장은 극히 적었다. 그해 나는 《길림신문》의 특약통신원으로, 그리고 신문사의 추천으로 동북3성 조선말 방송신문 표창대회에까지 참가하여 ‘우수통신원’으로 표창받았다.
길림신문사 기자분들과 접촉이 잦아지면서 서로의 감정도 깊어졌다. 그리하여 리원철 부총편집을 모셔놓고 통신원 강습반도 여러차례 꾸렸고 허동철 부총편집이 작사하고 방룡철선생님이 작곡한 량수진 진가도 만들었다. 해마다 량수진 운동경기대회에서 몇백명의 녀성들이 색다른 고운 치마저고리를 받쳐입고 진가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정말 장관이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하향 기자들의 헌신적인 정신, 실사구시적인 사업작풍은 아직도 정말 인상깊다.
한번은 허동철 부총편집을 모시고 동산촌 탄광에 취재하러 갔는데 그냥 탄광에 내려가 보겠다면서 수직갱이 100여메터나 되는 위험한 막장에까지 내려가는 것이였다. 김청수기자가 도문시에 많이 다녀왔는데 늘 우리 향진기관 간부들과 함께 논도랑 가셔내는 의무로동에도 동참하고 빈곤호의 벼가을도 같이하면서 특수화가 없었다. 더우기 내가 좋은 기사 자료를 제공하면 당사자를 현지 취재하고 기사를 쓸 때면 꼭 나의 이름을 앞에 놓고 발표했다. 내가 쓴 원고도 깔끔하게 다듬어주고 어떤 원고는 전화까지 걸어와 자세히 대조하여 한편도 허실없이 해주시고 부족한 점도 편지나 전화로 일깨워주군 했다. 나도 연길에서 축구경기가 있을 때면 표를 부탁하군 했는데 리원철 부총편집이 점심도 사주면서 이미 퇴직한 허동철선생님과의 뜻깊은 상봉의 자리도 마련해주는 혜택도 누렸다. 나도 그 정을 못이겨 새해 신문 주문이 시작되면 적극 홍보에 나서군 했다. 그때 우리는 함께 모여앉으면 《길림신문》을 그냥 ‘우리 신문’이라 친절하게 불렀다.
새해 신문 주문은 보통 11월부터 시작된다. 농민들이 쌀을 팔아야 손에 돈을 쥐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늘 저녁 퇴근 시간에 우정국 국장의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량수진 산하의 13개 촌을 찾아다니면서 주문을 받았다. 그때는 여러 잡지사와 신문사들에서 내려오는 주문 임무가 많았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길림신문》을 비롯한 여러가지 신문, 잡지들의 주문 임무를 철저히 완수하여 몇년간 시선전부와 시우정국의 우수발행원으로 표창 받았다. 어느 해인가는 《길림신문》 주문량을 300부까지 끌어올린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감개무량하다. 《길림신문》과 함께한 나날이 바로 나의 청춘시절이였고 바로 나의 성장의 시간들이였다. 지난날 《길림신문》에 나의 저그마한 기여라도 있었다는 건 잊을 수 없는 추억이고 자랑이다.
창간 40주년을 맞은 《길림신문》이 거둔 휘황찬란한 성과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면서 향후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