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03版:민족풍정 上一版 下一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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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락부 농민악대도 있고, 촌사도 펴내고

─ 전통문화와 현대문명이 함께하는 백년 조선족 마을 서안촌

비옥한 충적평원에 논으로 둘러싸인 서안촌 전경

마을 입구에 세워진 대문

마을 광장에서 즐기는 촌민들

서안촌은 흑룡강성 해림시 신안조선족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경작지가 가장 큰 조선족 마을이다. 서안촌의 인구는 2,000명에 육박하고 경작지는 만무가 넘는다.

마을 서쪽 입구에는 서안촌이라는 글발이 새겨진 큰 대문이 우뚝 서있고 널직한 중심도로가 동쪽 끝까지 한일자로 곧게 뻗어있다. 이 중심도로와 교차하며 남북 방향으로 쭉쭉 뻗은 골목길들은 서로 맞물리며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하다. 마을 중심도로 량옆으로는 도랑물이 조잘조잘 흐르고 마을길은 하루에도 세번씩 청소해 항상 정갈한 모습이다.

촌주임 겸 당지부 서기인 최산옥에 따르면 서안촌은 서안촌과 자흥툰으로 이루어졌는데 호적에 등록된 가구수는 706호이고 인구는 1,625명, 경작지는 1만 3,675무이다. 이중에 논이 9,000무이다. 이외 기동지가 60헥타르에 달한다. 기동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물도랑, 광장, 도로 등 기간 건설을 하고 있다. 주로 벼농사가 위주이고 양계, 양어, 하우스농사도 하고 있으며 로무수출 인원이 천여명에 달한다.

서안촌의 력사는 근 100년전인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0년초에 김수산이 조선인 15가구와 함께 서안촌으로 이주해왔다. 삶의 터전을 잡은 김수산은 마을에다 학교를 세웠고 수산학교로 불리다가 해방후에 서안촌소학교로 명명되였다.

서안촌소학교는 1920년부터 2008년까지 80년간 끈끈한 맥을 이어오며 청화대학, 북경대학 등 국내 중점대학을 포함한 대학교들에 많은 학생을 수송했다. 당시 마을에서는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을 장려했고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찾은 학생은 또 한달 로임을 마을에 의연해 마을 사람들의 지성에 보답했다.

근 100년의 세월이 흐르며 이들은 고향 사투리를 거의다 잊고 현재는 함경도 방언을 구사하고 있다.

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 기간에 서안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용약 참군했다.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한 사람만 76명이고 전쟁에서 희생된 혁명렬사가 28명이며 영예군인이 7명이다.

서안촌은 문예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마을로 소문이 파다하다.

기록에 의하면 1946년 8월 15일, 일본 투항 일주년 기념으로 서안촌에서 운동회를 열었는데 악단의 15명 나팔수가 나팔을 불면서 함께 개막식에 입장했다고 한다. 그리고 낮에는 운동회를 벌이고 저녁에는 널판자로 만든 무대 우에서 노래자랑을 했다고 한다.

1950년대부터 서안촌의 문예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였는데 당시 한 사람은 연변연극단 무용배우로 뽑혀갔고 다른 한 사람은 전국소수민족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해 모택동, 류소기, 주은래, 주덕 등 중앙령도들의 접견까지 받았다.

서안촌의 자랑찬 문화예술 력사를 실증하는 명물로 1956년에 지은 문예구락부를 들 수 있다. 이 구락부는 면적이 800평방메터인데 1960년대부터 선후로 해림시문화관, 목단강시문화관과 연변연극단에서 이 구락부에 와서 공연하였다. 매번 공연단이 올 때면 관중이 너무 많아 이틀씩 공연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서안촌 문예구락부는 서안촌악대의 련습장과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흑룡강성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농촌구락부이며 서안촌악대는 중국 조선족 농촌에서 유일무이한 농민악대이기도 하다.

서안촌에서는 2004년도에 5,000평방메터 되는 문화광장을 건설했는데 해마다 여름이면 촌민들이 이 광장에서 광장무를 추고 각종 문예공연을 펼친다. 조선족 전통문화의 전승을 위해 서안촌 문화광장에는 각종 민속문화 전시물과 설명서를 갖춰놓고 촌민들과 관광객들에게 선보이고 있다.

력사가 유구한 서안촌에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으니 바로 마을 중심거리 철탑에 매달아놓은 구리종이다. 이 구리종은 1946년에 동북민주련군이 이 마을에 오면서 증정한 대포탄알이다. 대포탄알로 만든 이 종은 그때부터 마을의 각종 회의 때마다 울렸는데 종을 치는 차수와 박자에 따라 촌민들은 오늘 하는 회의가 무슨 회의인가를 알았다고 한다.

근년에 서안촌은 몇년간의 노력을 들여 720만원의 자금을 마을 건설에 투입했다. 최근 3년 사이 촌에서는 10키로메터의 마을길을 포장도로로 건설하고 2만메터의 세멘트 물도랑을 수선했으며 3,000평방메터의 레저광장을 건설하고 스크린까지 갖춘 현대풍의 공연무대를 건설하였다. 또 로인들의 문화생활에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160평방메터 되는 로인협회 활동실을 짓고 표준 게이트볼장 두개를 만들었다.

서안촌 주요 거리에는 신형의 태양에네르기 가로등이 설치돼 있고 감시카메라까지 있어 촌민들은 안정감을 느끼고 있으며 촌의 3,000메터 구간에 쇠그물 바자가 둘러있다. 서안촌은 촌으로부터 진 구역 그리고 부근의 촌에 이르는 구간이 모두 포장도로로 되였다. 촌에서는 또 각 방면의 자금을 적극 쟁취해 남새하우스 39개를 건설하였는데 매 하우스의 면적이 400평방메터 된다.

이 마을 로인협회 최경남 회장에 따르면 마을 로인협회는 1950년대에 몇분이 모여 독보조 형태로 출범했다. 인민공사 시기에는 로인독보조로 되였다가 지금은 마을 청장년들이 연해, 해외로 많이 진출한 관계로 35명의 로인이 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 마을 촌사를 집필한 최경남 회장은 1950년에 이 마을에서 태여나 생산대 대장, 촌민위원회 주임, 촌로인협회 회장을 거쳐 지금은 진로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의 고심참담한 노력과 집필을 거쳐 2020년 5월에 신안촌 촌사가 출간되였다. 마을의 력사를 완벽하게 집대성한 이 책은 조선족농촌마을에서 보기 드문 촌사이기도 하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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