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자전거타고 산따라 강따라 11] 추억의 구세동다리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8-25 11:02:34 ] 클릭: [ ]

이전에는 없던 길이 새로 나있었다.

바로 팔가자와 토산자 구간의 산길이였다. 그 길은 팔가자의 구세동을 경유해 토산자의 명산평에서 송로선과 이어지고 있었다.

팔가자진에서 서남쪽으로 5리가량 떨어진 골짜기에 구세동(救世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해방전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 이름은 지난 세기 60년대초까지 불리웠다. 그러던 것이 62년도부터는 풍산촌(丰产村)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름을 바꾸게 된데는 1960년도에 이 마을 량곡생산이 현저하게 제고되는 풍산(丰产)을 따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벼, 콩, 조와 같은 농작물이 주요생산지인 이 마을의 어떤 작물이 풍작을 따냈는지는 알바 없으나 당시 주에서 내려간 공작대가 촌민들과 상론하고 구세동을 풍산촌으로 바꾸었다고 《화룡현지명지》는 기록하고 있었다.

쌀 한톨도 귀했던 60년대 초반의 3년 자연재해시절을 감안하면 풍작이 큰 자랑거리였을테고 그러한 풍산의미를 담은 마을이름에도 어떤 이야기가 깃들어있을 법하다. 그런데 마을이름은 바꾸었으나 사람들은 습관처럼 이곳을 그냥 구세동이라고 부르기 좋아했다. 그래서 그곳에 놓여있는 철교도 항간에서는 그냥 구세동다리라고 불리웠던 기억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다리는 해란강에 세워졌다고 해란철교라고 불렀다. 부근에 또 해란하역이라는 작은 기차역전까지 있었다.

 

구세동 다리

지난 주말 연길에서 화룡까지 자전거려행을 한 일이 있었다. 갈 때는 송로선을 따라 갔는데 돌아올 때는 명산평부근에 나있는 산길을 따라 팔가자를 경유하게 되였다. 기분 좋은 내리막길을 만나 질주하고 있을 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풍경 하나를 만나게 되였다. 바로 구세동다리를 만난것이다. 길 오른쪽켠에 높은 교각의 오랜 철교 하나가 움직이는 풍경처럼 불현듯 나타난 것이다. 그때 문뜩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과 함께 멀어져간 옛추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아, 구세동다리! …

내 인상속의 구세동다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한폭의 그림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보고 있는 눈높이에서의 평범한 다리가 아니라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넓은 시야와 다리, 강물, 골짜기들이 하나로 조화된 멋진 풍경화 같은 것이였다.

철교우로 팔가자에서 풍산촌에 간다는 행인 두사람이 건너가고있다

내가 다니던 북대소학교에서 봄, 가을철 원족으로 가장 많이 다니던 곳이 바로 평강벌 상류에 우뚝 솟아있는 기대봉이였다. 일명 초대봉으로도 불리웠는데 해발고가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60리평강벌 상류에서는 그래도 가장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옛날 고구려,발해시기에는 이 산마루에서 하늘에 제를 지냈고 산아래 끝자락엔 고려장유적도 있었다고 한다.    

소학교 1학년 가을원족이였을 것이다. 학교에 처음 입학해 원족갔던 기대봉에서 뻗치면 손 닿을 듯 지척으로 보이는 산아래 구세동다리를 굽어보게 된것이다. 그때 그 느낌을 어떻게 적으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산골짜기에 조용히 서있었던 그 다리는 이상하리만치 신비했고 또 사람을 끄는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어언 40여년 세월이 흐른 1978년도의 기억이지만 지금도 내 기억속에는 구세동다리의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세상의 신비로움이 아름답고 또렷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호기심으로 몇몇 개구쟁이들은 가파른 산도 용케 타고 다가가보았던 기억이다. 정작 가까이에서 보니 엄청 크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철교였다. 그리고 어른들로부터 이 다리는 해방전에 일본사람들이 놓았다는 말도 들었다. 소학교 3학년때인 80년대초, 북대소학교가 서성진중심소학교와 합병되면서 옮겨가다보니 그후로는 오래동안 기대봉에 가보지 못했다.

철교 너머로 절벽이 보이는 산이 바로 기대봉이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구세동다리는 일제침략자들이 화룡, 나아가 안도지역의 풍부한 자원을 더 많이 략탈해가고 더욱 효과적으로 이곳의 반일무장투쟁을 탄압하면서 저들의 식민통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부설한 《룡청선》철도연선의 한 철교였다. 사료에 따르면 룡정에서 시작하여 화룡 청두구까지 이르는 《룡청선》철도는 총길이가 52키로메터에 달하는데 1938년 5월에 착공을 시작해 1940년 7월부터 정식으로 통차되였다.

철도가 부설되는 기간 일제의 철도부설에 반대해 싸운 많은 항일전설들도 전해지는데 바로 구세동다리에서 벌어졌다는 “십장님을 삭도바가지에 모셨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간단히 적어보면 철도부설시 이곳 철교부설을 책임진 일본인 십장이 인부들가운데 항일유격대원들이 숨어들어 공정의 진전을 파괴하고 항일부대에 폭파약 같은 물자를 조달하는 걸 눈치채고 은밀히 감시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겨울밤 삭도를 타고 기대봉쪽으로 떠난 항일유격대를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게 된다. 위기일발의 시각, 삭도운전수가 놈들이 탄 삭도가 산봉우리 중간에 이르렀을 때 삭도를 멈춰세우고 기계부속들을 뜯어버린 후 도주하여 공중에서 오도가도 못한 침략자들이 몽땅 얼어죽었다는 내용이다 …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핍박에 의해 철도부설에 동원된 로동자들이 소극적으로 일하거나 파업을 단행하여 일제침략자들의 철도부설계획을 저애하고 파괴하였다는 기록은 많다. 1940년 2월에는 팔가자역부근에서 모래파기작업을 하던 로동자들이 침략자들을 위해 일하기 싫어서 앞장서 파업을 단행하자 연선의 모든 로동자들이 일제히 파업행동에 가담하여 일제침략자들의 기염을 꺽어놓았다는 문사기록도 있다.

《룡청선》철도부설개요의 불완전한 기재에 의하면 1938년부터 1939년사이에 일제는 항일련군부대로부터 선후하여 34차의 습격을 받았으며 군경 10명이 격사되고 7명이 상했다고 한다.

룡청선을 부설해놓고 오래동안 연변의 자원을 략탈해가려고 윽별렀던 일제의 야망은 《룡청선》철도가 정식개통된지 5년만인 1945년 8.15해방과 함께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룡청선》이 개통된 후 일제침략자들은 이 일대의 농산물과 림산물, 광물자원을 대량적으로 략탈해갔다고 한다. 단 1941년 한해에만 해도 《룡청선》을 통해 실어내간 물동은 51만 4000톤이나 되였으나 실어 들여온 물동량은 2만 7,979톤밖에 안되였다고 하니《룡청선》은 일제의 탐욕스런 식민지침략의 대동맥이였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구세동다리로 아직도 기차가 오가고 있었다.

손꼽아 세여보니 《룡청선》철도가 정식 개통된지 올해로 만 80년 세월이다.흘러간 세월속 구세동다리는 아직도 남아있는데 먼 추억처럼 기차의 고동소리가 지척에서 울려와 바라보았더니 놀랍게도 기차 한대가 화룡방향에서 힘차게 달려오고 있었다. 오래된 철교에 아직도 칙칙폭폭 기차가 달리는 모습은 너무 신기하고 또 반가왔다. 옛날의 이 《룡청선》은 현재 이미 저 멀리 료녕성 단동에까지 이어져 우리 나라 동부변경지역의 중요한 철도연선으로 되고 있었다.

문뜩 어릴적 추억을 따라 기대봉에 올라 구세동다리를 굽어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받았다. 평면적인 시각의 구세동다리보다는 어린시절 아득한 추억속에 담겼던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보고 싶었다.

기대봉에서 굽어본 구세동다리

그날 나는 기어이 기대봉까지 올라가고야 말았다.“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40년 세월도 넘는 강산변함에 정작 어릴 때 원족갔던 기대봉의 양지바른 기억은 그 어데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잡초가 무성한 숲을 간신히 헤치고 이곳이였나, 저곳이였나 하고 두리번 거렸으나 어릴 때 느껴보았던 신비롭고 감격스런 풍경은 만나지 못했다. "지난해 산불이 나서 산이 온통 타버렸지요..."구세동다리에서 지나가던 길손이 아쉽다는 듯이 한마디 던졌던 말이 떠오른다.

산을 내리면서 우리들의 과거와 현실에는 언제나 어쩔 수 없는 변화와 시각차이가 존재하는 법이라고 자아위안하면서도 무엇인가 소중한것을 잃어버린듯한 느낌에 마음은 씁쓸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