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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타고 산따라 강따라10]‘쓰렁박'을 찾아서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8-13 16:31:15 ] 클릭: [ ]

어렸을 때 들었던 이상한 지명이 문득 떠올랐다.

쓰렁박'이라고 했다. 바가지 자가 들어간 탓에 묘한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지명이였다.

70년대중반, 내가 대여섯살 되던 때였을 것이다.

할머니가 틈만나면 옛말을 해주셨는데 그 옛말가운데 쓰렁박이라는 마을 옛말이 있었다. 아버지도 그곳에서 태여났다고 한다. 새우가 차겁고 시원한 샘물에 퐁퐁 떠다니는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라는, 전설같은 지명이였다.

이야기로는 그곳에 학교가 없어서 아버지가 30리도 더 되는 고개넘어 마을까지 도보로 다녔다고 한다.“매일 걸어서 그렇게 먼길을 오갔지만 단 한번도 지각을 안했네라…”아버지의 청소년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백모님이 생전에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귀전에 들리는듯 싶다.

1936년생인 아버지가 열서너살 때쯤이였다고 하니 그것은 아마 지난세기 40년대 말 혹은 50년대 초반쯤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끔씩 큰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학교마을의 백부님네 집 신세를 지기도 했다고 한다. 쓰렁박이라고 불리우는 동네는 기실 지금의 화룡시 복동진 서북쪽에 있는 시골마을 옛이름이다.

내가 태여난 고장인 서성진 북대촌과는 팔가자진을 사이에 두고 산마루 하나만 넘으면 닿을 수 있는 곳이였다. 30리 길은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또 아주 가까운 거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태 아버지가 태여났고 또 동년과 젊은 시절을 보냈다는 그 전설같은 지명을 가진 쓰렁박에 가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면서 쓰렁박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추억들을 남겨주지 못했기에 더욱 그 곳이 궁금해지고 가보고 싶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곳에 가면 왜선가 아버지의 숨결이라도 찾을 것 같고 그림자라도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때문이다. 

얼마전 나는 우연히 자전거 려행으로 그곳을 다녀오게 되였다. 미리 계획했던 일도 아니였다. 매주 무작위로 연변주내 여러 지역을 선택해서 달리군 하는 장도자전거팀이 이번에는 화룡 복동을 주말 운동코스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 내심 기대했다. 더우기 연길에서 출발한 자전거팀은 투도에서 룡수를 거쳐 복동에 이른 다음 복동진에서 점심식사를 하고는 서북쪽 산비탈을 넘어 팔가자에 이른 후 연길로 돌아오기로 계획을 잡았다. 복동에서 팔가자를 넘어오는 고개에 바로 아버지가 태줄을 묻었다는 쓰렁박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행여나 하는 기대감이 더욱 컸다.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달리다보면 아늑한 골짜기에 마을들이 나타난다.

가파른 고개는 아니였지만 제법 늘찬 령을 하나 넘으니 내처 내리막이였고 그 내리막이 끝날무렵 그림 속 동네처럼 아늑한 골짜기에 마을들이 나타났다. 한여름이라 짙은 록음 속에 깊이 파묻힌 마을은 이름 모를 풀벌레소리들의 환영곡으로 시끄러웠다.

“쓰렁박이라는 소리 못 들어 봤는데…”

무더위를 피해 마을 평상에서 화투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이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표정들이였다. 쓰렁박이라고 부르던 지명은 꽤 오래전에 망각되여버린 지명인 것 같았다. “옛날에야 그렇게 불렀지요… “ 나이 지숙해보이는 로인 한분이 이제 기억난다는듯이 말했다. “쓰렁박이 아니고 쓰렁바이라니까… " 그는 내 말을 시정하려고 했다. 이 아닌 바이라고 했다. ‘박'이면 어떻고 ‘바이'라면 어떠랴, 비슷한 지명음이기에 부르기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혹시 내가 기억한 이름이 어린시절 기억이다보니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가 싶기도 했다.

마을 평상에서 화투놀이를 즐기는 촌민들.

그때 그 시절의 정확한 지명을 알아 보려고 화룡현지명지 연변조선족자치주지명지 등 자료가 될만한 것들은 모두 찾아 샅샅이 훑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데에도 쓰렁바이라든가 쓰렁박이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그 부근의 마을이름이 남양(南阳)이거나 은흥(殷兴)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기록밖에 없었다.

남양소학교.

중국국제방송국의 김호림기자가 집필한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연변 100년 력사의 비밀이 풀린다》에서 보면 이곳 쓰렁박을 또 쓰렁바위로 기재하고 그것이 사인암(四人岩) 인지 아니면 사릉암(四棱岩)인지 그리 분명하지 않다고 기재하고 있다. 확실한건 쓰렁바위가 예전에 남양촌을 이르던 이름이라는 것이다. 바위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지명이름이다. 마을모양을 살펴보면 둔덕진 양지바른 언덕이나 구릉들은 보이나 가파롭고 모난 바위 같은 암석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더니 전혀 생각밖으로 인터넷에서 얼마전 우연히 이 지역에 대한 귀한 옛지도 한장을 만나게 되였다. 언제적 지도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우리 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면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이 고지도는 1930년대 이전 당시의 화룡, 왕청, 훈춘, 연길 등 연변각지 지명들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그 지도에서 보니 또 난데없이 이곳을 사인반(四人班)이라고 기재하고 있었다. 한어로 읽어보면 쓰런빤이니까, 조선어로 불리웠다는 쓰렁바이, 쓰렁박과 아주 비슷한 지명음이였다. 혹시 과거 이 사인반을 쓰렁박, 혹은 쓰렁바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지 추리해볼 수도 있을법한 지명이였다.

고지도의 붉은 동그라미를 친 지역이 사인반 즉 쓰렁박이다.

그렇다면 이 난데없는 사인반은 도대체 무슨 뜻일가? 지도를 살펴보니 당시 사인반은 여러곳에서 표기되고 있었다. 왕청현에도 한곳이 표기되여 있었고 심지어 돈화시 한장향에는 사인반촌이라고 현존하기까지 했다.

여러 지역들에서 나타난 동일한 이름의 사인반은 특정된 한 장소의 독자적인 의미를 담기보다는 보다 보편화된 의미가 내포되여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연변지역의 허다한 지명들은 만족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이상한것은 만족어에서 유래된 지명들은 자칫 한문의 뜻을 그대로 추리하다가는 전혀 엉뚱한 의미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사인반 (四人班) 역시 그러했다. 문자의미로만 봤을 때는 4인으로 된 어떤 공동체같은 엉뚱한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정작 만족어로 따져보았더니 전혀 뜻밖으로 좋은 곳(好的地方)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길림성만어지명》에서는 풀이하고 있었다. 또 쓰렁바이 지명은 만주어 seri 샘물과 ba 장소를 나타내는 의미로서 샘물터라는 뜻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결국 내 어린시절 귀속에 들어와 깊이 박혀있었던 쓰렁박이라는 이름은 할머니가 항상 내게 이야기 해주던 "산좋고 물맑은 고장이였다"는 아버지 고향 옛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할아버지세대가 일제의 등쌀에 못이겨 괴나리보짐을 짊어진채 산좋고 물맑은 양지바른 곳을 찾아 헤매다 정착했던 곳이 바로 쓰렁박, 아니 사인반(四人班))이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새벽 일찍 일어나 학교가는 걸음을 재촉했다는 령마루를 넘어 오면서 이렇게 험하고 먼길을 매일같이 오갔을 아버지의 끈질긴 추구와 구학의 모습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텅 비여있는 산길이지만 조금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쓰렁박이라는 곳은 적어도 우리 순흥 안씨 가족의 눈물겨운 이주사와 삶의 애환이 깃든 뿌리깊은 곳임에는 틀림이 없기때문이였다. 

쓰렁박은 역시 뜻풀이처럼 좋은 고장이였다. 할어버지세대가 찾아와 자리잡았고 아버지세대가 희망을 안고 가꾸어온 소중한 삶의 터전이였다. 그러한 소중한 고장이였기에 사인반이라는 지명은 열심히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도처에 흔적을 남겼지 않았나 싶다. 농경사회에서 벗어난 오늘 다시 쓰렁박이 살기좋은 고장으로 각광받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찾고 또 간직해야 할 마음속 소중한 고향은 아닐가 하는 생각을 더 해본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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