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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고 산따라 강따라7]팔도천주교회당에 오성붉은기 휘날린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30 11:24:41 ] 클릭: [ ]

오성붉은기가 나붓기고 있는 팔도천주교당.

국경절련휴기간에 자전거 타고 오도저수지를 찾아떠났다가 팔도를 지나게 되였다.

첨탑이 소소리 높은 팔도교회당건물이 멀리서도 잘 보였다. 교회당옆에는 오성붉은기가 휘날리고 있었다.비록 신자는 아니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천주교 력사가 깊은 팔도를 “연변의 로마”라고도 부른다는데 한번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었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교회당까지 숨가쁘게 올라 갔지만 공교롭게도 교회당 철대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다. 그냥 먼발치에서 눈빗질하고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돌아서는데 문득 신자인듯한 두 녀인이 교회당쪽 고개로 올라오면서 인사를 건넨다.

알고보니 팔도천주교회의 리춘화 회장과 강정자신도였다.

그들은 매우 열정적이였는데 굳게 닫혔던 교회당자물쇠를 열어주고 이곳저곳 자세히 구경시켜주었다. 뜨락에는 “1916년 성당기초돌”이라고 쓴 큰 돌 하나가 보관돼 있었는데 팔도천주교의 100년이 넘는 오래된 력사를 말해주고 있는듯 싶었다.

“1916년 성당기초돌”이 오래된 팔도천주교의 력사를 말해주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팔도 천주교는 1885년을 즈음해 청정부의 봉금령이 풀리고 살길 찾아 국경선을 넘은 조선인들이 많아 지면서 생겨났다. 초기 팔도천주교는 1903년에 세워졌다. 벼재배에 능한 조선사람들은 논을 개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구수하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팔도구일대에 모여살게 되였는데 1908년에 이르러서는 이곳의 천주교신도가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신도들은 당지에서 벽돌과 기와를 구워 종루를 건설하였고 학교도 세웠다고 력사는 기억하고 있었다.

팔도천주교회가 세운 초기의 학교는 문맹퇴치를 하고 남녀평등과 녀학생을 학교에 보내는 문제 등 녀성해방에서 사회에 유익한 도움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팔도천주교회당의 오래된 종.

백년이 넘는 팔도천주교회 력사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오래된 물건으로 성당옆 종각에 달려있는 교회의 종을 들 수 있다고 리춘화 회장이 소개했다.

팔도천주교회에는 두개의 큰 종이 있었는데 사방 10리안의 모든 마을에 일요일과 아침시간을 알려주는 공용종 작용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1934년경에 독일 오톨리아수도원에 맡겨 만든 것으로서 조양천기차역에 가서 소수레로 실어 왔다고 전한다. 그중 하나는 팔도천주교회당에 걸려있고 다른 하나는 연길교회당에 걸려 있다.

오래된 종이 매달려있는 종각을 보는 순간, 어떤 력사가 영화필림처럼 떠올랐다.

《연변문사자료》에 따르면 “과거 성탄절 첨례행사종이 자정의 찬 밤공기를 헤치고 울려 퍼지면 수백명의 교도들이 교회당에 몰려들었다가 헤여지는데 교도들이 입은 흰옷이 서로 뭉쳐지고 반사되여 마치 북극의 한설 오로라가 희미한 백색을 비치는듯 했다”고 기록했다. 또 “해마다 4월의 부활절에는 원근 남녀교도들이 고운 옷단장을 하고 아침 일찍 해뜨기 전에 성사를 받고 헤여 지는데 떠오르는 해빛에 비쳐진 녀교도들의 오색옷차림은 신기루가 남산에 나타난듯했다.”고 적고 있다.

팔도천주교가 력사에 기재될만한 것은 20세기초 팔도천주교당을 중심으로 반일선전을 적극 펼치고 항일력량을 무은 력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팔도천주교 성당 바로 옆에 지어진 건물은 팔도천주교의 자랑찬 100여년 력사를 생동한 글과 사진으로 펼쳐보이는 력사전시관이였다.

전시관에 들어서보니 팔도천주교 신도들이 적극적으로 항일에 궐기해나선 혁명사적들이 적잖게 눈에 띄였다.

 력사전시관에서 팔도천주교의 력사를 소개하는 리춘화 회장(왼쪽).

당시 팔도천주교회와 교회학교에서는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일본침략자와 투쟁할 준비를 하였는데 1919년 3월, 룡정에서 있었던 3.13반일 대시위운동에서 룡정, 팔도구 등지 천주교회당을 핵심으로 하는 천주교 신도들이 반일운동에 적극 참가했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1920년 팔도구 등지의 천주교회당에서는 항일무장력량인 의민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시작, 천주교회 회장을 담임한 김종담은 200여명 천주교신도들로 무어진 의민단을 거느리고 유명한 청산리대첩 등에 참가하여 일본침략자를 타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었다.

동북이 해방된 후 팔도천주교당은 애국선언을 발표했으며 반제애국의 길로 나아갔다.

1951년 3월, 전국적으로 펼친 천주교 반제애국주의운동을 통해 1952년8월 팔도구천주교회는 삼자혁신위원회의 령도하에 6명의 독일신부를 축출하고 중국신부 류유정을 초빙하여 교무를 주재하게 했다고 력사는 기록하고 있었다. 1954년에는 팔도천주교 애국회를 성립하였으며 1957년에는 중국천주교와 로마 바티칸과 관계를 두절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팔도천주교는 제국주의 침략도구로부터 독립자주자영과 애국애교의 길을 걷게 된다.

해방 후 항미원조기간에도 팔도천주교회의 신도들은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돈과 물건을 적극 기부하여 항미원조전쟁을 지원했다. 어떤 신도들은 직접 호사대와 인부대에 참가하였으며 6세대의 천주교신도가정들에서 자녀들을 조선전선에 참군시켜 항미원조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리춘화 회장은 팔도천주교 교회당이 길림성 종교계의 애국주의교양기지라고 소개했다.

2012년 5월, 길림성내의 애국주의 사적이 있는 종교활동장소들을 길림성종교계 애국주의교양기지로 명명할데 관한 길림성종교국의 결정에 따라 팔도천주교회당도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였다.

“1911년에 세워졌다는 팔도천주교회당은 우리가 어렸을 때인 6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있었지요”자칭 팔도태생이라고 하는 강정자신도가 말했다.

“홍위병들이 첨탑에 바줄을 걸고 잡아당기면서 무너뜨리던 광경이 생각난다.”고 어릴적 추억을 더듬었다. 성당건물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쓰던 물건들도 동란때문에 많이 파손되고 사라졌다.

팔도천주교회의 리근식신도.

리근식(79세)신도에 따르면 문화혁명시기 윤울바노(윤영복)라고 하는 신도가 팔도천주교회당의 미사제대 석판을 산속깊이 감추어 두었다가 1980년대 종교신앙자유가 회복되자 다시 찾아내여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공민들의 종교신앙의 자유가 다시 보장받게 되였다. 연길시 팔도천주교성당은 당의 종교정책의 해빛아래 1992년에 498평방되는 교회당을 재건하였다.

리춘화 회장에 따르면 현재 례배를 드리는 천주교 신도가 100여명 되지만 주일 교회행사에 참가하는 신도는 30명내지 40명밖에 안된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늙어가고 또 마을을 떠나갔기때문이다. 지금은 연길에서 살고 있는 교회신부가 한주일에 한번씩 팔도에 온다고 한다.

“…팔도천주교는 계속하여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사회주의제도를 옹호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기치를 높이 들고 조화사회를 구축하는데 더욱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팔도천주교 성당의 력사전시관에는 그렇게 적혀있었다.

리춘화 회장은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나라가 있으니 백성도 있게 되는 법이란다. 종교신앙의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나라와 사회주의, 고향과 이웃들을 리탈하고 해치는 종교적 신앙은 절대 펼쳐나갈 수 없다고 말한다.

팔도천주교회당에는 지난세기 90년대 말, 2000년대 초까지만해도 400명내지 500명의 신도가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하여 천주교와 함께 할 것이다.”고 팔도천주교의 신도들은 말한다. 100여년의 력사를 이어온 천주교의 깊은 력사와 종교신앙의 자유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기때문이다.

밖에 나와보니 공화국창건 70돐을 맞아 가을하늘은 높고 푸른데 고색창연한 성당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여있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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