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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기행]항일가요 울려퍼졌던 왕우구를 가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16 15:04:31 ] 클릭: [ ]

북동학교 옛터에서 해설하고 있는 리광인교수(왼쪽사람).

연길시 의란진 고성촌은 연길시구역에서 북쪽으로 60여리 떨어진 산골마을이지만 한때는 연변 전역의 항일투쟁을 지휘하던 혁명의 중심지였다.

1월 12일, 겨울 들어 코를 얼구던 한파가 한숨 꺾이고 간만에 포근하고 화창한 날씨였다. 이날 우리 민족의 력사와 민속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력사민속동네’위챗그룹에서는 2019년 첫 활동으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답사를 조직하였는데 20여명 회원들이 답사에 참가하였다.

1932년 여름 이곳에는 왕우구구쏘베트정부(후에 왕우구구인민혁명정부로 개칭)가 설립되였고 미구하여 중공동만특위, 중공연길현위기관과 동북인민혁명군(후에 동북항일련군으로 개칭)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부가 이곳에 자리잡았다. 일제의 토벌을 피해 북동(지금의 고성촌)에 이동한 유격대대와 동북인민혁명군의 전사들은 유격구의 인민들과 함께 북동학교를 세우고 혁명의 후대들에게 과학지식과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 시절 북동학교 마당에는 일본침략자의 죄행을 성토하는 성토대회, 웅변대회가 자주 열렸고 유격대원들이 부르는 애국가 소리가 우렁찼지요.” 절강월수외국어대학 전임 교수 리광인씨가 일행에게 붉은 글씨로 고성소학교라고 씌여진 건물을 가리키면서 소개한다.

중공동만특위와 중공연길현위 기관 옛터 안내비앞에서.

“무쇠골격 청년남아야/ 애국의 정신 분발하여라/ 자손의 거름된 이내 독립군/ 설땅이 없지만 희망이 있다/ 국명을 잃어버린 우리 민족이/ 해외에 티끌같이 떠다니네/ 이렇다 웃지 말라 유국민들아/ 자유를 회복할 날 있으리라/” 당시 조선족유격대원들과 유격근거지 학생들이 목청껏 부른 애국가의 전문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돈 있는 사람들은 돈을 내고 쌀 있는 사람들을 군량을 바치고 피끓는 청장년들은 직접 유격대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그때 총과 탄알은 일본놈과 악질지주들의 손에서 빼앗거나 쏘련에서 사왔고 군복은 재봉기를 돌려 자체로 만들었다고 한다.

항일렬사 김봉학의 손자인 김영빈옹의 회고록에는 “1932년 11월 2일, 연길현 왕우구 항일유격근거지가 정식으로 창설되였다. 적들은 왕우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일본수비대를 맥동에 주둔시켜 고성자, 합수일대를 봉새하는 가하면 자위대를 풀어놓아 부암, 삼산동에 경계망을 늘여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왕우구항일유격대에서는 적들의 동정을 알아내기 위하여 밤이면 적들의 삼엄한 봉쇄망을 뚫고 나와 동흥동(지금의 류채촌1소조)의 김봉학과 련계를 맺고 자주 적들의 동향을 탐지하였다.”고 하면서 일곱살 나는 자기는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낮이면 집에 있는 큰개를 풀어놓아 왜놈들이 오면 짖게 하고 밤이면 집안에 가두어 유격대원들이 나드는데 편리하게 하였다고 기술되여 있다.

김영빈옹이 손으로 그린 1930년대 왕우구일대의 지도.

현재의 지도에 표기된 마을은 10여개에 불과하다.

1985년에 출간된 룡정현지명지를 보면 당시 왕우구에는 구룡평, 룡암평, 상대흥촌, 명랑촌, 태양촌, 고성촌, 합수촌, 류채촌, 명흥촌, 서흥촌, 남양툰 등 20여개 마을 1500여가구의 인가가 살았다고 기록되였는데 거기에 각급 기관과 항일유격대원들까지 합하면 사방 20여 킬로메터 되는 자그마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 5000여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규모는 훈춘의 대황구항일유격근거지나 왕청의 소왕청항일유격근지, 화룡의 약수동, 어랑촌, 처창즈아 안도의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에 비해 훨씬 큰 규모이다.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는 1932년부터 1934년 겨울까지 2년 여 기간 존재했지만 당시 동만특위의 소재지로, 연변항일투쟁의 중심지이기도 하였으며 이곳에서 조직된 연길현유격대는 후날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다시 동북항일련군 제2군 제4사, 제5사와 더불어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개편되면서 그 력사적 역할은 자못 크다.

한편 이곳 장재동에서 태여나 광주 중산대학을 다닌 김철산은 1931년 말에 중공화룡현위 제3임 서기로 되고 태평동에서 태여나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방상범은 중공화룡현위 제1임 군사부장으로 되였는데 이들은 조선공산당시절부터 의란구일대를 혁명화 하는데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다. 방상범은 “어랑촌13용사”로 유명한 어랑촌반토벌전투를 지휘한 사람이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부 옛터 안내비.

현재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에 속했던 구룡촌어구에는 1981년 길림성정부와 연길시인민정부에서 세운 길림성문물보호단위 안내비와 1985년에 설립한 혁명렬사기념비가 있는데 2013년 9월에 새로 보수한 혁명렬사기념비에는 원 명흥촌, 구룡촌, 류채촌의 109명 혁명렬사들의 이름이 정히 새겨져 있다. 료해해본데 따르면 3개 촌에서 109명의 렬사가 나온 실례는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그리고 고성촌에는 20017년 10월 연길시인민정부의 설립으로 된 “중공동만특위와 중공연길현위 기관 옛터” 안내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 퇀부 옛터”안내비가 있으며 수많은 항일지사들을 배출해낸 북동학교옜터(고성소학교)가 있어 연길시의 학교나 사회구역들에서 찾을 수 있는 좋은 홍색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다.

구룡촌 어구에 세워진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 안내비.

리광인씨는 “자원이 풍부한 연변의 홍색관광산업은 희망이 있는 해볼만한 산업이다”고 하면서 연변의 홍색관광자원이 기타 관광자원과 더불어 잘 개발되고 리용된다면 연변의 경제사회발전템포는 보다 빨라질 것이고 홍색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시골마을들은 이런 자원을 리용하여 빈곤에서 해탈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구룡촌혁명렬사기념비를 찾은 참가자들.

당시 왕우구항일유격근거지와 소왕청항일유격근거지에서 불리여진 노래 <나가자>로 이번 력사기행을 마친다. “나가자 나가자 총을 메고 나가자/ 원쑤놈을 잡으러 싸움터에 나가자/ 용감한 기세로 목숨바쳐 나가자/ 만세소리 높으게 승리에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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