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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기행]15만원 메고 달린 밤길을 낮에 가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5-14 16:23:39 ] 클릭: [ ]

룡정에서 출발을 앞두고.

“최봉설네들이 15만원이 든 돈마대를 메고 달려갔던 코스를 한번 답사하는 것이 어떻소?” 지난 5월 6일 《송몽규평전》 출간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산동성 위해시에서 달려온 리광인선생이 묻는 말이다. “두말할 것 없이 대단히 좋지요.” 력사유적지 답사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는 필자가 반대할리 없다.

그렇게 되여 조직된 것이 ‘15만원탈취사건루트답사’였고 5월 11일로 날자를 잡았다. 위챗동아리 ‘력사동네민속동네’를 중심으로 연길에서는 리광인, 한태익, 신철호, 남철, 최어금과 나까지 6명이, 룡정에서는 리광평, 주청룡, 김정섭, 장경매 등 4명이 신청하여 도합 10명의 답사팀이 무어졌다.

뻐스를 리용하여 재암동으로 이동하고 있는 대원들.

11일 오전 9시 30분에 룡정지명기원우물터에서 4선뻐스를 리용하여 출발한 우리 일행은 4선 종점에서 내려 도보로 이동하였다. “이 곳이 유명한 태교동인데 1906년에 이 마을 14호 조선족농민들이 륙도하의 물을 끓어들이는 관개수로를 파서 논을 개간하였답니다.” 룡정지역 력사에 밝은 ‘3.13기념사업회’ 회장 리광평선생이 길옆에 뻗은 도랑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다.

“저쪽에 백양나무림이 보이지요? 바로 그 곳이 하승리라는 마을이고 골입구에 자리잡은 마을이 재암동, 그 마을을 지나 쭉 뻗은 골이 재박골이지요.” 1964년에 쏘련에서 출간된 김준의 장편실화소설 《15만원 탈취사건》을 통독한 리광인선생이 답사에 필요한 부분을 설명한다.

륙도하건너로 재암동과 백양나무림이 바라보인다.

자글자글 내리쬐는 따스한 봄볕에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춤추는 화창한 봄날이다. 우리가 관개수로 제방다리를 건너 재암동에 들어서자 멀리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오고 머리를 풀어헤진 버드나무가 반겨준다. <저 버드나무는 그날 거사를 지켜보았겠지요.> 연변인민방송국에서 퇴직한 한태익선생의 익살스런 말이다. 백년 넘어 자란 버드나무였다.

재암동의 버드나무.

정확히 98년 4개월전이였던 1920년 1월 4일은 마침 일요일이였다. 그날 저녁 이 곳에서 연변을 발칵 뒤집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으니 바로 15만원 탈취사건이다.

조선총독부 조선은행에서 반일투쟁탄압경비 15만원을 조선의 회령지행에서 중국의 룡정지점에 보낸다는 정보를 은행직원 전홍섭으로부터 입수한 철혈광복단의 림국정, 최봉설, 윤준희, 박웅세, 한상호, 김준 등 6명 반일지사들은 연길의 와룡동 최봉설네 집에서 작전방안을 면밀히 짜고 명동촌으로 이동, 김하규네 집에서 최종 소식을 기다리다가 4일 아니면 5일에 떠난다는 소식을 접한다. 한겨울의 추위를 무릅쓰고 들에 쌓인 눈에 매복하기 위하여 흰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명동촌에서 20여리 상거한 동량어구 버들방천과 선바위골에 나뉘여 매복해있다가 외딴 길목에서 왜놈운송대를 포위하고 일거에 15만원을 탈취하였던 것이다. 그때 돈 30원이면 최신 소총 한자루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5000명을 무장시킬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기록에 의하면 그들이 탈취한 돈이 10원권 5천장, 5원권 2만장이였다니 돈무게만해도 꽤 될 것 같아 지금의 돈무게로 계산해보니 약 20근좌우라는 답이 나온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에 돈을 탈취한 그들은 왜놈들의 시선을 흐리기 위하여 박웅세와 김준은 우편물이 든 마차를 몰고 맞은 켠의 대불동쪽으로 멀리 이동했고 나머지 네사람은 재암동을 지나 재박골안으로 10여리 달려서야 돈마대를 부리고 마차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재박골어구에서.

우불구불 산속으로 가없이 뻗은 재박골은 옛날 화룡쪽에서 오는 소장사군들이 많이 다니던 길이고 또 강도가 많이 출몰하던 곳이란다. 그리고 골어구부터 여러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마을터만 남고 여기저기 소방목장이나 석장을 개발하여 가시철망으로 바자를 세우다보니 길이 막혀 에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약 한시간을 걸어서 큰 비술나무가 나타나고 우리는 첫쉼을 쉬기로 하였다. “이 비술나무도 꽤 늙었네. 혹시 최봉설네들이 이 곳에서 마차를 돌려보내지 않았을가?” 리광인선생이 우스개삼아 던지는 말이다.

90년대 많이 불려진 노래 <어머님, 그 마음 알만해요>를 창작한 장경매시인이 사과와 과자를 꺼내고 한태익선생이 오이에 고추장을 꺼낸다. “산에 오면 이게 최고지.” 모두들 오이에 고추장을 찍어 소리내 먹기 시작했다.

“오늘 코스가 20리라고 하던데 한 절반 오지 않았을가?” 먼길을 걷기 싫어하는 김정섭시인이 하는 말에 모두들 소리내 웃고 “재박골 막바지에서 소팔포강으로 넘어간다니 아직 절반은 안될 걸.” 리광인선생이 받아친다.

한시간 걸었을가 지팽이가 늘고 김정섭시인이 뒤처진다.

봄날치곤 해볕이 무척 따갑다. 골을 따라 흐르는 시내물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일행의 속도가 점차 늦어진 것은 이때부터였다. 사진기재를 들고 멘 리광평선생은 년세가 75세였지만 씨엉씨엉 앞뒤로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느라 분주히 보내다보니 다른 사람보다 더 힘들었다. 연변대학 교수인 신철호선생은 일행한테 지팽이를 만들어주느라 분주하다. 손톱과 손칼까지 장만해 온 그는 수석, 등산애호가로 산행을 많이 하는 편이다.

힘든 산행길에 휴식은 필수.

열한시 반이 되였는데도 골막바지가 보이지 않는다. 12시 반이 되였는데도 골의 막바지는 아직도 저 앞이다. 안되겠다싶어 우리는 시내물가의 그늘을 찾아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한사람이 두가지씩 준비한 점심은 풍성한 만찬이다. 지치고 허기가 찰 때 먹는 음식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다. 한태익선생이 울라지보스또크에서 들고온 로씨야소주를 꺼내 한잔씩 나누어 먹었다.

“이렇게까지 멀지 않을텐데…” 리광인선생이 혼자말처럼 중얼거린다. 사실 최봉설 등 지사들이 걸은 길은 한겨울 눈이 덮인 산길이였고 둥근 상현달이 중천에 둥실 뜬 백색의 밤길(음력 11월 14일)이였다. 그들이 걸었던 오솔길은 골짜기를 따라 이어졌지만 무상한 세월이 흐르면서 길이 여러번 바뀌다보니 우리가 걸어온 길은 왼쪽 산기슭을 타고 팔포강령으로 이어진 길이였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우리는 소팔포강으로 넘어가는 지름 길을 지나서 큰 팔포강령으로 왔던 것이다.

점심밥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골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방향이 틀렸음을 알아차렸다. 산의 릉선을 타고 북쪽방향으로 움직이기로 하였다. 농촌에서 자란 신철호교수와 내가 앞섰다. 메돼지똥이 여기저기 널린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였다. 양지바른 곳에는 고사리가 애기손을 펴고 있었다. 점심때부터 집에 가서 국을 해먹겠다고 뽕구대를 캐던 주청룡선생과 최어금시인이 고사리를 꺾기 시작했다.

산릉선을 타고 옛날 봉화대자리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저 멀리 대포산이 바라보인다. “이렇게 왼쪽으로 그냥 가면 화룡 동성 앞산이 되고 오른 쪽으로 가야 팔포강일 거요.” 등산을 자주 다니는 연변인민방송국 문체부 주임 남철이 하는 말이다.

범코등바위 아래 가파른 지대를 따라 내려가면 인삼밭이다.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고 지친 몸을 끌고 얼마나 걸었을가. 불현듯 앞이 환해지고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발앞에 나타난다. “어, 이건 범코등바위가 아닌가?” 남철씨가 확신에 차 하는 말이다. 범코등바위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니 길게 뻗은 인삼장이 바라보인다.

“됐어, 여기로 내려가면 팔포강이요.” 험한 산길이지만 목적지가 보인다니 힘이 솟구쳤다. 로익장을 과시하던 리광평선생은 아예 사진기만 멘채 기재가방은 신철호교수한테 맡긴다. 가파른 길에 무릎을 다친 최어금시인의 멜가방은 한태익선생이 빼앗아멘다.

기진맥진하면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더니.

인삼장을 따라내려가니 수레길이 나오고 수레길을 따라 10여리 내려가니 마을이 나타난다. 길옆의 밭에서 풀을 뽑던 할머니가 허리를 펴면서 “올라가는 걸 보지 못했는데 어데서 오는 사람들인가”고 물어서 저쪽 산을 넘어왔다고 여쭈고 이 곳 지명을 물어서야 소팔포강인 줄을 알게 되였다.

골짜기에 난 수레길을 따라 다시 10여리 걸어서야 화룡시 동성진 해란촌어구 해란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뒤에 처진 리광평, 리광인, 김정섭, 주청룡을 기다려서 답사팀 일행은 푸른 해란강을 사이둔 비암산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그때 시간은 벌써 저녁 7시를 육박했고 택시를 불러 룡정에 도착하니 저녁 7시반이 되였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랭면이 그렇게 맛있는 줄을 처음 알았다.

15, 10, 10, 50이 이날 행운 수자로 남았다. ‘15만원 탈취사건’ 이동로선 따라 10명이 10시간 답사하였는데 50리나 걸었다는 것.

해가 넘어가고 날이 어두워온다.

한겨울 추위에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 돈마대를 메고 앞뒤를 살피면서 달려갔던 림국정, 최봉설, 윤준희, 한상호의 이동로선은 두텁게 얼어붙은 해란강을 지나 삼봉동으로 또다시 부르하통하를 건너 와룡동 최봉설네 집으로 이어진다. 초저녁에 거사를 하여 이튿날 새벽 닭이 홰를 칠 때 와룡동에 도착하였다고 하니 그들은 백리도 넘어될 그 먼 거리를 12시간에 주파했다.

따스한 봄날 좋은 장비를 갖춘 우리가 그들이 걸은 3분의 1로정을 걷고도 기진맥진하였으니 정말 부끄러울 일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아직 남들이 찾지 않은 처녀코스를 답사했다는 점에서는 뿌듯한 자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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