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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제일 걸출한 축구명장-리주철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1-02 10:12:00 ] 클릭: [ ]

건국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여 우리 나라 축구계에는 많은 출중한 축구건아들이 용솟음쳐나왔다. 그 속에서도 조선민족의 축구영웅들은 중국의 축구사업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해방전 국가팀에 입선된 선수는 모두 2명이였는데 그들로는 리혜봉(룡정시 덕신향), 정룡수(덕신향), 괴뢰만주국축구팀에 선발된 조선민족 선수는 20여명이 넘는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국가팀에 입선된 선수는 35명, ‘최우수 선수’는 30명에 달한다(《조선민족축구사》에서 1990년 중반까지 자료에 따랐음).

우리 조선민족 축구건아들은 건국전과 건국후 중국의 각 프로팀에 포진해있으면서 주력역할들을 하였다. 건국 후 일부 선수들의 사례를 든다면 국가팀에 제일 오래동안 있은 장경천(심양출신), ‘중형땅크’라는 별호를 달고 중앙공격수 위치에서 이름 날린 리광수(룡정 조양천), 중국팀이 아시아경기에서 2등하는데 큰 공헌을 하고 중국의 최우수 중간방어수(하프) 칭호를 받은 고종훈(룡정시), 50년대초 국가팀에서 공격수로 이름 떨친 지운봉(화룡출신), 최증석(덕신향 출신) 60년대 초반에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시며 국가운동위원회 주임인 하룡원수로부터 “당신은 철문과 같다”는 별호를 가진 중국의 유명한 꼴키퍼 박장수와 ‘분사식비행기’라는 별호를 달고 국제, 국내 경기와 력대 국가팀에서 꼴을 제일 많이 낸 손중천명장(모두 룡정시 덕신향 출신임) 등 선수들이다.(덕신향은 중국조선족축구 발원지임)<필자—주>

  

아래에 소개하는 리주철(李柱哲) 명장은 건국 후 중국의 축구계에서 가장 뛰여난 우리 민족의 선수이다. 그러나 지금 이러한 사실에 대해 모르는 축구팬들이 매우 많다. 심지어 프로축구선수들조차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안다는 것이 축구에 연구가 있고 로선수들이 좀 알고 있을  뿐이다. 리주철축구영웅을 소개하기 전에 흑룡강성에서 용솟음쳐나온 우리 조선민족의 걸출한 일부 영재들을 소개하련다.

 

중국의 최동단에 있는 흑룡강성은 46만평방키로메터의 넓은 땅을 갖고 있는 성으로 우리 나라 다섯번째로 큰 성이다.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흑룡강성은 물산이 풍부하며 산이 있는가 하면 일망무제한 넓은 벌에는 벼, 옥수수, 밀, 콩 등 각종 경제작물과 소, 양, 젖소 등 가축들이 많이 난다. 또한 자원도 많이 난다. 례컨대 목재, 석탄, 석유 등 보물들이 많이 나 우리 나라  '보배성'이래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좋은 터전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영재들이 많이도 배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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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시절의 리주철(세번째줄 왼쪽 두번째).

 

그 사례를 든다면 1909년 10월말 할빈에서 일본 이토 히로부미를 격상시킨 애국지사 안중근, 양림(원명 김훈), 리추악(양림동지 부인), 김좌진, 최용건, 김책, 김성(김책의 형이며 녕안현 초대 서기), 허흥식 등 항일영웅들이 배출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체육, 문화, 예술, 과학 등 분야에서도 많은 조선족 영재들이 용솟음쳐나왔다. 그 사례를 들면 일본에서 있은 제57회 세계빙상선수권대회에서 아시아와 우리 나라 최초로 1,500메터 종합경기에서 우승컵을 탄 라치환(해륜현)선수가 있는가 하면 우리 나라 유명 가수 김만(원명 최진옥, 녕한현),  최경호(몽릉현),  신광호(림구현) 등 가수들이 나왔으며 평생 연변가무단에서 음악생애를 마친 안국민 1급 작곡가(밀산시), 고찬모 작곡가(밀산시), 상해음악학원에서 교수로 있는 우리 나라 유명 작곡가 윤명호(오상시)선생, 우리 나라에서 수십년간 미사일 격침을 연구하지 못하여 애로를 겪고 있을 때 할빈공업대학 졸업생인 최계옥이 3년간 연구 끝에 발명한 최계옥 녀과학가 등 영재들이 나왔다.

아래에 소개하는 70년대 중국축구계의 '별'이라는 리주철도 계동현 계림향 영광촌 출신이다. 실로 흑룡강성에서는  우리 민족의 영재들이 많이도 배출되였다.

 

1998년 북경민족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조선민족체육사대계>>에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중국에서 가장 우수한 조선족 축구선수가 장경천이였다면 70년대에 와서는 리주철선수가 가장 출중하였다고 할 수 있다"고 적었다. 그의 고향인 계동현 계림향(鸡林乡)은 북으로는 몽릉강이 유유히 흐르고 동, 남은 무연한 벌이 아득히 펼쳐져있다.  조선족자치향인 계림은 살기가 좋기로 흑룡강성적으로 소문난 향이다.

 

“인재가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다르다”고 축구와 인연이 되자고 그랬는지 리주철이는 첫돌 생일상에서 하많은 물건중 유독 자그만한 빨간 고무공을 선참으로 쥐여잡았다고 한다.  그가  빨간고무공을  잡자  첫돌 잔치에 참가한 마을사람들은 “주철이는 앞으로 크면 꼭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철이는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면서부터 생일상에 쥐였던 빨간공을 차기 시작하였다. 밤이면 누가 공을 가져갈가바 품속에 꼭 껴안고 잠들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 뽈차기를 무척 즐겨하였다. 혹 마을에서 돼지를 잡게 되면 돼지 방광 (방광이공은 1872년 최초로 영국에서 탄생되였음) <필자—주> 에 공기를 주입시켜 편을 나누어 뽈을 차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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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팀 동료들과 함께 있는 리주철(중간) 

 

지금의 아이들은 멋지고 예쁜 축구공을 갖고 주단 같은 그라운드에서 뽈을 차고 있지만 생활이 째지게 가난했던 어려운 시절에는 그렇지 못했다. 돌멩이가 많은 평평한 들판에서  아이들과  함께  솜뭉치거나  짚뭉치,  짐승털을  천 속에 넣어 원형모양으로 만들어 뽈을 찼다. 키가 작은 주철이가 하도 야무지게 뽈을 잘 차는 것을 본 사람들은 “주철이는 장차 대선수로 될 것이다”라고 말하군 하였다.

 

 어려서부터 '뽈개지'로 소문 놓은 리주철은 다른 아이들은 몽릉강에 나가서 고기잡이에 열중하였으나 그만은 늘 오후 늦게까지 학교 운동장에서나  생산대 탈곡장에서 뽈련습을 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한 주철이는 생활난으로 하여 중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련주산에 있는  475비밀공장 학도공으로 2년간 출근하게 되였다. 리주철의 뽈재주를 보아낸 남철교원의 방조하에 다시 계림중학교을 다니게 되였으며 줄곧 학교팀의 선수로 활약하게 되였던 것이다.

 

1943년생인 리주철은 1963년 여름 계림중학교에서 참군하여 심양공군부대 독립 18탄 고사포련 포병으로 근무하였다. 한번은 사단부에서 열린 운동회에 탄부의 축구선수로 사부에서 열린 운동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이 대회가 리주철의 축구생애의 첫 발자욱을 내디디게 한 계기가 되였던 것이다. 그번 대회에서 리주철의 뽈재주를 보아낸  심양공군부대축구팀에서 인츰 데려갔다. 이듬해  전국공군부대운동대회가 수도 북경에서 열리게 되였다. 꿈에도 북경에 가고 싶어하던 리주철은 수도 북경에 가서  자기의 축구기술을 맘껏 자랑하겠다고 속다짐하였다. 

 

경기대회에서 감독은 리주 철의 축구기술에 대한 료해가 부족했던지 전반전에 그를 출전시키지 않았다. 리주철이 소속된 팀은 전반전에 꼴 세개나 먹는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그 누구보다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가는  선수는 리주철이였다. 그는 감독을 보고 후반전에 자기가 들어가겠다고 몇번이나 청들었다.  감독은 마지 못해 후반전에 주철이를 출전시켰다.  후반전에 리주철이가 들어가자 경기 판세는 확 달라졌다. 그는 혼자서 공을 몰고들어가 두꼴이나 터뜨려 전 대회에 소문놓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우리 조선족축구건아들은 다른 프로팀에는 물론 부대프로팀에도 많이 포진해있었다. 심양공군부대팀은 그번 대회에서 비록 1등을 하지 못했어도 여섯껨을 치르면서 리주철은 홀로 꼴 여덟개를 넣어 전국공군부대축구경기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소문 뿐이 아니였다. 그의 특수한 뽈재주를 보아낸 전국공군부대팀에서는  '보배' 를 발견한듯  전국공군부대팀에서 인츰 스카우트해가자 심양공군부대축구팀에서는 아쉬운 대로 리주철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리주철은 더 넓은 축구무대에서 자기의 축구기량을 발휘할 수 있게 되였다.

 

전국공군부대팀의 프로선수로 된 리주철은 로축구선수들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기의 축구기술을 더한층 높은 수준에로 끌어 올리기에 모진애를 썼다. 

 

1965년 11월에 광서쫭족자치구 수부 도시인 남녕시에서 전국을급경기가 열리게 되였는데 갑급팀으로 승진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치렬한 경기대회였다.  그번 대회에서 묘하게도 친형인 리주찬이 주력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흑룡강성팀과 동생 리주철이 들어있는 전국공군부대팀간에 치렬한 경기를 펼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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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교시절의 리주철(뒤줄 오른쪽 두번째)

 

"축구경기에서는 부자간에도 한치의 양보도 없다"는 말이 있다. 두 형제는 자기 팀을 위해 추호의 양보도 없이 경기를 진행하였다.  프로팀에서 형제간이 맞붙은 경기는 극히 희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번 경기에서 일곱개의 꼴이 났는데 형 리주찬이 세개를 넣고 동생 리주철이 두개를 넣어 당시 축구계의 미담으로 전해지기도 하였다. 

 

리주철은 축구에 대해 체계적으로 크게 배운 일은 없었지만 그의 타고난 뽈재주와 피타는 노력으로 하여 다른 선수들보다 특수한 축구기술을 장악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70년대에 중국의 축구계와 팬들이 가장 선호하는 축구선수로 거듭났다. 1960년말 리주철은 국가팀에 입선되여 7번 유니폼을 입고 우익공격수로 맹활약하였다. 

 

필자와 한 고향인 중국국제방송국 조선어부 주임으로 퇴직한 윤봉현선생은  “텔레비죤이 보급되지 않은  그 시기에 주로 방송으로 국제, 국내 축구경기를 생방송하였지요. 국제경기나 국내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리주철선수가 북경로동자체육장에 선수들과 함께 경기장에 나타나면 관중들은 일어나  '리주철! 리주철!'  하면서 뜨거운 박수를 보내군 하였습니다…”라고 하는가 하면 “리주철선수가 꼴을 터뜨리게 되면 전반 관중들의 환호는 물론 북경의 축구팬들은 다른 선수를 잘 몰라도 리주철선수만은 잘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았다”고 전화상으로 알려주는 것이였다. 

 

우리 나라 축구팀은 언제나 국제대회에 나가면 지군 하다 보니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늘 등수에 오르지 못하였다. 중국팀은 월드컵선수권대회에 한번도 참가하지 못했다가 한국과 일본팀이 예선에 불참한 덕분에 어쩌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 참가했어도 꼴 하나 넣지 못하고 돌아오는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자고로 정신력이 부족한 중국팀은 돌출한 공격수와 중간방어수(하프)가 없는 것이 큰 문제이며 지금도 매한가지이다. 

 

20년 만에 출중한 우리 민족의 공격수 리주철이 국가팀에 가담하자 국가팀에는 70년부터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시기에 리주철이 국가팀에서 주력역할을 하게 되자 한팀의 선수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경기 때마다 크게 지는 일이 적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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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 왼쪽 두번째 리주철

 

제7회 아시아운동대회와 제6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리주철선수를 핵심으로 한 국가팀은 뛰여난 성적을 올려 중국팀에 신심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특히 그번 대회에서 리주철선수는 그의 뛰여난 축구기교를 보여주어 그만이 '아시아 최우수 공격수'라는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이 영예는 우리 나라 축구계에서 최초로 되는 영예이며 아직까지 이를 초과한 축구선수는 없다. 

 

리주철은 키는 작으나 몸집이 단단하고 빠르고도 령활하여 다른 선수들보다 평시의 훈련을 잘한 데서 늘 왕성한 체력을 갖고 있었다. 워낙 령활한 축구기질을 갖고 있는 리주철은 불꽃 튕기는 경기장에 뛰여들기만 하면 상대방 수비진을 돌파하는 능력이 그 어느 선수보다 돌출하며 득점기회를 자주 만들군 하였으며 꼴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1975년 6월 향항에서 아시아컵 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그번 대회에서 아시아의 최강과 막강한 실력을 갖고 있는 일본팀간의 치렬한 대결에서 경기가 시작되여 20분 만에 그는 홀로 공을 몰고 이악스레 련속 달려드는 수명의 일본팀 방어수를 요리조리 따돌리고 박스 안에서 돌연적인 강슛을 날려 승부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꼴을 터뜨려 대공을 세워 국가팀이 2등하는데 유공자로 거듭났다.

 

그 때 그의 축구기술은 아르헨띠나 마라도나선수와 다름없었다고 한다. 중국국가팀은 력대로 아시아컵 대회와 아시아경기에서 한번도 1등을 한 적이 없다. 단지 두번의 2등과 3등도 우리 민족의 축구명장 리주철과 고종훈 명장의 발끝에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리주철축구명장은 우리 나라 축구에 크게 기여한 선수이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이며 '별'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축구에서 가장 큰 영예를 받은 선수이다. 이는 나라의 자랑이자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의 업적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체육운동히로부터 리주철선수한테  '중화인민공화국 최우수 선수',  '축구건장' 등 많은 칭호를 수여하였다. 리주철명장은  2002년 59세에 뇌혈전으로 북경에서 벌세하였다. 비록 그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국내외의 그라운드에 남긴 그의 미담은 중국의 축구사와 우리 민족의 축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김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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