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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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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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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8 13: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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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전, 만 8,000명의 상해 지식청년들이 연변에 하향하여 7개 현의 생산대에 자리를 잡았다. 금방 하향한 상해 지식청년들은 연변 농촌의 모든 사물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다. 그 중에서도 연변의 황소는 상해지식청년들로 하여금 각별한 애정을 갖게 했다.
본문 저자 주배흥이 1969년 12월 훈춘현 경신공사 금당대대에서.
처음으로 황소를 타보다
하향한 첫날 우리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에 가보았다. 그곳에는 몇 마리 황소들이 혹은 앉아서, 혹은 서서 우리 지식청년들이 자기네들을 보고 흥분해서 떠들썩 하는 것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사원들은 수소를 둥글소라고 부르며 보배처럼 아꼈다. 난생 처음 황소를 본 나는 세상에 이렇게 큰 동물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동시에 마음속으로 약간의 두려움까지 들지 않을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황소들, 특히 황소들중에서도 둥글소들은 온 몸의 털이 윤기가 흐르고 깔끔하게 정리되였는데 마치 반들반들한 비단을 두른 것 같았다. 소 뿔은 보기 좋게 휘어져 있었고 주먹만큼 큰 눈에는 정기가 돌았으며 소꼬리는 힘차게 휘휘 저어 댔다. 건장한 몸집에 위풍당당한 황소는 정말로 멋졌다!
생산대의 조선족 아바이가 큰 비자루로 황소의 털을 다듬어주니 황소는 암전하게 아바이의 보살핌을 향수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소가 화를 내지 않을가? 그리고 소는 어떻게 탈까? 일찍부터 소고집이라는 말을 들어왔으나 한번도 소를 본적이 없었으니 어떤 것이 소고집인지 모르겠네. 오늘 꼭 한번 소고집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싶다. 소를 알면 농업과 농촌과 농민을 알게 되겠고 이 또한 나 자신을 알아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거야.
나는 용기를 내여 소와의 친밀한 접촉을 시도해 보았다. 소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나는 손을 내밀어 소 잔등을 만져보았다. 소는 꼬리를 흔들며 친근한 모습을 보였지만 나는 오히려 깜짝 놀랐다.
대장의 동의를 얻은 나는 가장 크고 잘 생긴 황소를 골라 소 고삐를 쥐고 몇 발자국 걸어보았다. 그러니 큰 황소는 온순하게 나를 따라오는 것이였다. 아, 원래 황소는 아주 유순한 동물이네. 나는 한 수 더 떠서 사원들처럼 소 잔등에 오르기로 했다.
내가 소 고삐를 단단히 잡고 막 다리를 들어 소 잔등에 걸치려 하자 황소는 몸부림 치며 빙빙 돌았다. 나는 소에게 끌려 비틀거리다가 하마트면 넘어질 번 했다. 나는 속으로 자신이 성공적으로 소 잔등에 올라 재교육의 사책이 기록되기를 경건하게 축원하며 둬 번 더 시도해 보았는데 여전히 올라타지 못했다. 황소가 터세를 부리며 나를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나는 황소와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다. 빙 둘러서서 이 광경을 보던 지식청년들과 사원들은 재미있어 어쩔줄 몰랐고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오늘 드디어 나는 소고집을 확실하게 알게 되였다.
일하러 나간 첫날에 나는 황소의 고집에 부딪치게 되였다. 한창 속수무책인 가운데 한 아바이가 나에게 소를 타는 비결을 알려주었다. 소 고삐 가운데를 단단히 잡고 우로 당기면 소 코가 올라가는데 그때 잔등에 올라타라는 것이였다. 내가 한번 해보지, 우와~ 정말 되네! 황소는 더는 빙빙 돌지 않았고 나는 단숨에 소잔등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하하, 아무리 소고집이라고 해도 소 고삐는 이기지 못하는 구나. 이런 거물도 무서운 건 아니였구나, 내가 이런 거물을 다룰 수 있다니…
1969년 하향 첫날 일터로 나가 소잔등에 올라갔다.
처음으로 소 잔등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마치 양자영이 호랑이 잡으러 산에 오르는 분위기고 나자신이 위풍당당해 보였다. 경신의 산과 물이 한눈에 안겨왔고 혁명의 호기가 마음속에 넘쳐 흘러 마치 영화 배역에 들어선 듯했다. 우리 집체호 삼형제는 그 뒤로 재빨리 소 타는 법을 배워냈다.
1969년 11월 훈춘현 경신공사 상해 지식청년 서은혜가 소를 타고 있다.
1969년 12월, 훈춘현 경신공사 금당1대 집체호 삼형제가 소를 타고 있다.
지식청년들은 상해에서 연변에 왔고 연변에 와서 소 잔등에 올라탔다. 이때로부터 황소와 지식청년들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1970년부터 연길현 조양공사 동성9대 상해 지식청년 탕가명은 소 사양원 일을 했다. 사진은 ‘삼도만'이란 이름을 가진 황소고삐를 잡은 탕가명.
1969년, 왕청현 동신공사 신화대대 1대 상해지식청년 왕조방이 소 잔등에서 피리를 불고 있다.
처음으로 소수레를 몰다
그때 농촌은 밭 농사와 가을 수확에서 모두 소를 떠날 수 없었다. 농촌에서 주요한 운송도구는 바로 소수레였다. 소수레는 농촌에서 용도가 매우 광범하다. 물건을 싣고 사람도 싣는다. 곡식을 싣고 땔나무를 싣고 신부를 맞이하고 공량을 바치고 비료도 싣는다. 늙은 소가 무거운 짐을 싣고 힘겨워 헐떡이며 거품을 뿜어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소들이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또한 무궁무진한 황소의 힘과 힘들다고 원망하지 않는 황소의 정신에 감탄했다. 지식청년으로서 나는 처음으로 ‘황소 정신'이 무엇인지를 기본적으로 알게 되였다.
훌륭한 지식청년이 되기 위해서는 소수레를 모는 것은 기본과정이자 필수 과목이였다. 소수레를 모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였다. 황소는 온순하여 다루기가 쉬웠고 소수레 또한 너무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연변의 소수레는 기본상 비슷하게 생겼다. 수레 바구니는 정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되여 있는데 커다란 두 바퀴가 바구니를 땅에서 높이 떨어지게 했다. 바구니와 련결된 두 가닥 원목의 앞 부분은 아치형의 통나무와 련결되여 있는데 아치형 통나무(멍에)를 직접 소의 목 부근에 얹어 소가 수레를 끌게 한다. 직경이 1메터 넘는 수레 바퀴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그 우에 철로 만든 고리를 씌워 오래 사용할수 있도록 했다.
공자도 이런 수레에 앉아 렬국을 주유했을 거고 진시황시대에도 이런 수레가 있었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기실 연변의 황소와 소수레는 빠질 수 없는 생산력이며 유일한 운수도구였다.
나는 황소가 온순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다. 두가닥 소뿔과 커다란 소발굽에 다칠가봐 두려웠다. 나는 살집이 좋고 체구가 건장한 둥글소를 구유에서 끌어냈다. 우람한 그 몸에서 나오는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가까이 다가간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준다.
수레를 씌우는 일은 기술이 필요하다. 씌울 줄 아는 사람은 끌채를 들어 올리는 김에 소를 끌어 위치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씌울 줄 모르면 참말로 힘들다. 빙빙 돌려가다가 소고삐로 자기 자신을 감아 놓기도 한다. 소수레를 모는 첫 걸음은 수레를 씌우는 일이다. 나는 이미 소를 탈 줄 알았으니 소수레를 씌우는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안장을 준비하고 소를 수레 앞으로 끌어왔다. 그런데 아무리 밀고 당기고 해도 둥글소는 수레 옆에 서서 빙빙 돌기만 하며 끌채 안으로 들어갈 념을 안한다. 반시간 넘게 싱갱이질 했으나 결국에는 수레를 씌우지 못했다. 사양원이 도착하자 이 고집불통 황소는 언제 그랬냐 싶게 사양원의 명령에 따라 고분고분 끌채안으로 들어갔다.
소 한마리가 수레를 끌기에 수레군은 긴 채찍을 사용하지 않고 짧은 채찍이나 나무가지를 사용한다. 소가 수레를 끌 때는 수레군이 통제할 필요가 거의 없다. 소는 저절로 길에 난 차바퀴 자국을 따라 가고 수레군은 수레 앞에 걸터 앉아 유유히 채찍을 휘젓는다. 위험한 곳을 지날 때면 수레군이 수레에서 내려 고삐를 끌고 길을 인도한다. 수레군은 일반적으로 특수 용어와 채찍을 사용한다. 소리 한번 내고 채찍을 휘두르면 황소는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다.
연변 황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언어체계'가 있다. 소를 앞으로 가게 하려면 반드시 “이랴, 이랴”를 웨치고, 멈춰서게 하려면 반드시 “워, 워, 워”를 웨쳐야 한다.
그래도 처음으로 소수레를 몰아 보는지라 어딘가 긴장하기만 했다. 나는 이렇게 큰 소를 통제하지 못할가 걱정되여 소가 달리지 못하게 소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하지만 황소는 조금도 달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순순히 나를 따라 왔다. 그러자 나는 한수 더 떠서 사원들처럼 소잔등에 올라 타고는 수레 끌채에 발을 올려놓았다. 그러니 더욱 편안한 자세가 되였다. 이 거물은 머리를 숙여 기꺼이 유자의 소가 되였고 왜소한 자신이 이런 거물을 다룰수 있게 된 데 대해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1969년 11월 필자는 처음으로 소수레를 몰았다.
이는 내가 광활한 천지에서 처음으로 이룩한 커다란 성과였다. 모든 일이 시작이 어렵다. 후에 나는 점차 미립이 터서 능숙한 수레군으로 되였다. 나는 선후로 소를 몰고 밭에 거름을 실어 날랐고 산에 가서 땔나무도 날랐으며 공사에 공량을 바치러 다녔다. 수레를 몰며 시골의 작은 길을 누빌 때면 소와 사람과 수레가 하나로 된다. 그 둥글소는 사람과 수레에 한없는 멋을 더해주었다. 산에 가서 땔감을 실어올 때면 구불구불 산길에서 수레를 모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금 SUV차량을 운전할때보다 더욱 위풍당당했다.
1970년 9월 10일,훈춘현 마천자공사 522생산대의 상해지식청년들이 소수레를 타고 있다. 웃줄 좌로부터 진지강, 도함아, 대근매, 양헌매, 아래줄 좌로부터 왕명화, 황문민, 호미진, 정련영, 두혜연, 왕명주, 정은제, 리아금. 소수레를 끄는 사람은 정승영.
1969년 연길현 장안공사 하룡9대 상해지식청년들이 소수레를 몰고 일을 마친후 집체호로 돌아오고 있다. 소 수레를 모는 사람은 예래림, 왼쪽부터 주신영, 심국분, 양룡매, 뒷줄에 선 사람 왼쪽부터 주설진, 주진제.
1970년 훈춘현 마적달공사 오도구 8대 상해녀지식청년들이 소수레를 몰고 있다. 왼쪽부터 양구원, 손리리, 진국용, 서결여, 림하향
3.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다
농촌의 밭갈이는 가장 힘든 일이다. 밭갈이에는 당나귀를 거의 쓰지 않는데 당나귀는 걸음이 빠른 가축이고 힘이 약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황소를 사용한다. 그래서 봄갈이가 되면 밭이든, 논이든 황소는 봄갈이의 주역을 맡기 때문에 황소가 그만큼 소중하다.
소를 메운 쟁기를 몰고, 쨩-쨩- 채찍을 휘두르면 매우 멋져 보이나 기실 소를 몰고 밭갈이하는 일은 고된 일이고 힘든 일이며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매일 소 궁둥이를 따라다니면서 바람부나, 비가오나, 진흙 속에서나, 먼지투성이 속에서나 논밭에 써레질을 하노라면 엄청 피곤하고 지친다. 사람이 피곤할 뿐 만 아니라 소는 더더구나 피곤하다. 황소는 묵묵히 가장 힘든 일을 맡아 하고 있다. 숨을 헐떡이며 흰 거품을 물고 힘들게 일하지만 논밭에서 한걸음, 한걸음 내디디면서 수고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사원들의 도움과 지도하에 지식청년들은 점차 어떻게 쟁기를 잡고 어떻게 이랑을 번지며 어떻게 모퉁이를 돌고 어떻게 쟁기질하며 어떻게 논판을 써레질 하는가 하는 등 여러가지 농사기법들을 장악하였다. 여름철에 밭에 나갈 때는 소가 일을 하면서 함부로 풀을 뜯어먹지 않도록 부리망을 씌워야 한다. 부리망은 싸리나 대나무줄기로 엮어서 만드는데 반원형이다. 그러나 밭갈이를 잘하고 논밭 써레질을 잘 하려면 소를 잘 써야 하고 소를 잘 쓰려면 먼저 소를 잘 알고 소와 친구로 사귀여야 하며 소를 몰 때 채찍을 함부로 휘두르거나 소에게 마구 채찍질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소는 사람이 함부로 지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반항하거나 게으름을 피운다. 상해지식청년으로서 사람과 황소의 조화로운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마도 황소는 지식 청년의 감정을 잘 알고 있고 지식 청년과 더욱 심리적인 감응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황소는 항상 지식 청년과 협력하여 땅을 갈고 써레질을 하군 했다.
황소와의 말없는 배합으로 지식청년들은 비교적 긴 시간의 학습과 단련을 거쳐 신속하게 소를 다루는 기능을 장악하였고 논밭을 거울처럼 평평하게 써레질할 수 있었으며 밭갈이도 흙이 가루가 나도록 잘해 로농에 뒤지지 않게 되였다.
4.깊은 인연, 잊지 못할 에피소드들
상해지식청년과 연변 황소는 우정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 많은 잊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을 남기였다.
1974년 4월 13일 저녁 9시, 훈춘현 영안공사 82대대 생산대 외양간에서 갑자기 화재가 발생했다.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들은 상해지식청년 장리경과 집체호의 지식청년들은 즉시 화재현장으로 달려갔다. 생산대장의 지시에 따라 지식청년들은 먼저 외양간에 매여 둔 부림소 열 마리와 태여난 지 얼마되지 않은 송아지 한 마리를 서둘러 외양간에서 끌어내고 쫓아냈다. 그리고는 지체할 세라 곧바로 외양간의 화재진압에 뛰여 들었다. 모두들 두 시간 남짓한 진화 분투 끝에 마침내 큰불을 끌 수 있었다. 이튿날 오후 일하다 쉴 참 이였는데 장리경이 외양간 부근의 오솔길을 지날 때 그가 구출한 송아지가 마치 안면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의 곁에 다가가 가볍게 우는 소리를 냈다. 일종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장리경은 가볍게 송아지를 그러안았다. 집체호 지식청년 상대위는 재빨리 집체호에 달려가 사진기를 가져 다가 이 잊을 수 없는 순간을 기록하였다.
1974년 봄, 장리경이 화재에서 구해낸 송아지와 함께 찍은 사진.
화룡현 동성공사 태흥대대에 하향한 상해지식청년 곽유곤(郭裕堃)은 직접 겪은 경험이라면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모두들 늙은 말이 길을 안다고 하는데 사실 연변황소는 길을 더 잘 알기 때문에 소수레를 몰아도 마음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1973년에 그는 몇몇 사원들과 함께 소수레를 몰고 수매소에 가서 잎담배를 바쳤다. 잎담배의 검수 과정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기쁜 김에 몇 사람은 공사 식당을 찾았다. 흰술 한 그릇, 밥 한 그릇에 미역두부국 한 그릇을 먹었는데 아마도 좀 많이 마신 탓에 취기가 올라 소수레에 누워 집에 올때까지 줄곧 쿨쿨 잠을 잤다. 취기가 있다 보니 수레를 몰 상황이 근본 못 되였다. 아예 황소에게 나름 내맡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황소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알아서 평온하게 길을 재촉하고 굽이굽이 오던 길을 저절로 찾아 순조롭게 돌아왔다. 황소는 소수레를 끌고 정확하게 생산대 외양간 앞까지 와서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보며 음메 음매 소리 지르면서 주인을 깨웠다.
반세기가 흘러 지났다. 상해지식청년들 대부분이 이미 연변 농촌을 떠나 상해로 돌아왔지만 지식청년들은 연변황소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고 꿈에도 그리며 더욱 소중히 느끼고 있다. 늘 그 때를 떠올리면 생산대의 조선족 아바이가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구부정한 몸으로 키에 사료를 담아 소에게 먹이군 했다. 늘 그때를 떠올리면 당시 지식청년들이 소수레를 몰고 산에 올라 땔감을 해오다가 울퉁불퉁한 산길에서 조심하지 않아 소수레가 뒤집혀 졌던 일을 떠올리게 된다.
더욱 그립고 그리운 것은 그 아바이가 지금도 잘 계시는지?
소들이 지금도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지 궁금하다.
평생을 기여하는 연변황소
연변소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나는 소이며 길림성, 료녕성, 흑룡강성 등 성에 분포되여 있고 중국 5대 황소우량종의 하나이다. 연변소는 체질이 튼튼하고 추위에 견디는 성능이 우수하며 거친 사료와 로동에 견디고 질병에 견디는 능력이 강하며 수전과 한전 작업에 적합하다. 연변소는 중국 가축가금품종의 유전자 창고에서 매우 진귀한 재부이며 중국 5대 지방의 우량종 소 가운데의 하나이다. 시장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연변소는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이 되였다.
장기간의 품종 개량을 거치고 자원 보호와 정제 및 보강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육용 신품종 '연황소'를 육성하여 연변소의 전체 품질을 뚜렷하게 향상시켰다. 또한 육류 생산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는데 독특한 고기 맛은 일본의 와규(和牛), 한국의 한우(韩牛)와 견줄만큼 동북아시아에서 비교적 강한 시장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연변소는 <국가급 가축 가금 품종자원 보호명부> 에 올랐고 2008년에 또 중국 현대농업 육우산업기술체계에 들어갔으며 '지리표지 증명상표'와 '지리표지 제품보호'등록을 받았다.
시장에서 연변소고기에 대해 인정함에 따라 이미 거리와 골목의 작은 음식점들에서부터 국외의 음식점에까지 들어가 더욱 많은 식용방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연변의 소산업이 끊임없이 강대해짐에 따라 심가공의 발전을 이끌었고 연변의 경제발전을 촉진시켰다. 연변소는 연변의 주력제품으로 되였으며 연변을 벗어나 국내외에서 잘 팔리고 있다. 연변의 박형군 선생이 상해에서 연변특산물관을 꾸렸는데 연변소고기가 판매되고 있으며 이는 연변소고기 지정판매점이기도 하다.
상해지식청년들은 이때문에 늘 이곳을 찾고 있으며 진달래식당에 모이 군 한다.
그때면 연변이 기억나고, 지난날 연변소와의 맺은 인연이 기억난다.
그리고 연변소가 일생 동안 인류를 위해 한 거대한 공헌은 더욱 잊을 수 없다.
저자 소개: 주배흥, 1952년 상해에서 출생, 석사, 고급회계사, 등록재무관리사. 1969년 3월에 훈춘현 경신공사 금당1대에 하향지식청년으로 내려갔다. 1975년에 연변재정무역학교에 입학하여 학습하였으며 졸업후 연변상업부문과 수리부문에서 재무관리사업에 종사했다. 1998년에 ‘상해에 긴박히 부족되는 고급인재'로 상해에 전근되여 국유기업집단회사에서 고급관리일군으로 있었다. |
편역: 최승호 안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