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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31] 누나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3-03-26 16:16:28 ] 클릭: [ ]

“나의 누나 엄마같은 나의 누나

세월이 흘러갔다고 어찌 잊겠소

열여섯살 그 나이로 한돌 지난 날 안고

세상 떠난 엄마 짐이 무서워서 울었소

나에게는 나에게는 하늘보다 높았소

애지중지 키워준 누나의 사랑

이슬이 맺힌 언덕 우에서

나는 지금 누나 그리오

나의 누나 엄마같은 나의 누나

세월이 바뀌였다고 어찌 잊겠소

열여섯살 그 나이에 세상 시름 떠안고

내가 울면 함께 울며 꽃시절을 잃었소

나에게는 나에게는 바다보다 깊었소

알뜰살뜰 키워준 누나의 사랑

꽃이 만발한 언덕 우에서

나는 지금 누나 그리오”

이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매주일가〉프로에서 현재 방송되고 있는 내가 쓴 노래 〈누나〉의 가사이다. 이 노래 가사를 쓰게 된 것은 말그대로 엄마같은 나의 누나를 잊을 수 없어서였다.

나는 1960년 조양천에서 1녀 3남중 막내로 태여났다. 내가 태여나서 한돌이 되는 해인 1961년 가을, 엄마가 갑자기 상한이라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엄마의 후사를 치르고 나니 나를 부양하는 문제가 가정의 화제로 되였다. 동네방네에 수소문하여 아이가 없는 집에 입양시키려고 했다. 한 중년부부가 애기 포대기를 갖고 우리 집으로 왔다. 이때 16살 난 누나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막내 동생을 절대 남한테 줄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아버지께서 “아직 어린 네가 어떻게 동생을 키우겠니?”하며 어성을 높였다. “아버지, 내가 무슨 방법을 대서든지 동생을 키우겠으니 시름 놓으십시오. 외할머니도 가까이에 계시니 말입니다.”누나의 오돌찬 대답이였다.

누나는 학교를 중퇴하고 나를 업고 강 건너 마을에 있는 외가집으로 떠났다. 정작 외삼촌네 집에 가보니 외할머니가 나와 동갑내기인 외삼촌네 딸애를 돌보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일감을 찾아떠났다. 년로하신 외할머니는 아이 둘을 혼자 힘으로 돌보는 데 어려웠다. 그리하여 1년 후 누나는 추운 겨울의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나를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그때 우리 집은 화룡 시가지에서 26리 떨어져있는 라월이라는 두메산골로 이사 한 뒤였다. 누나는 몇년 동안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하다가 중매군의 소개로 아래 마을 총각과 결혼하였다.

1970년 겨울, 누나마저 없는 허전한 집안을 서성거리던 아버지는 우리 식구들을 데리고 연길현 세린하공사 쌍룡 7대(지금의 룡정시 로투구진 쌍룡촌)로 이사했다. 이곳은 벌거숭이 산언덕에 싸리나무와 잡초가 무성한 새밭 천지인 곳이였다. 부업거리도 별로 없는 곳에서 우리 집 네식구는 밭갈이 철이 되기전부터 식량난을 겪어야 만했다.

나는 계모의 슬하에서 소학교를 다녔다. 소학교가 대대마을에 있어서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에는 령을 너머 도보로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무진 고생을 했다. 세린하로 이산 온 후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불을 때고 멜대로 물을 길어야 하고 하학한 후에는 낫을 가지고 산에 가 땔나무도 해야 했다. 숙제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소학교 5학년을 다닐 때 누나가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우리가 사는 형편을 보고 몰래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 막내를 내가 데리고 가서 공부시키겠습니다.”,“너 남편하고 상의하고 결정하거라.” 아버지의 말씀이였다. “네, 집에 가서 상의한 후 인차 기별을 보내겠습니다.”

나는 누나의 소식을 손꼽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여름방학이 되자 누나에게서 소식이 왔다. 매부가 동의하였으니 개학하기전에 어서 오라는 것이였다. 나는 너무 기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한시 급히 집을 떠나고 싶었다.

집을 떠나는 날, 아버지는 나를 세린하 령대를 넘어 화룡현 투도구까지 바래다주셨다. 나는 너무 신이 나서 투도구에서 룡수평 기차역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기차 타고 화룡역에 내려 18리 떨어져있는 송월마을로 땀투성이 되여 뛰여갔다. 누나네는 팔간짜리 집에서 살았다. 앞마당도 널직해 채소를 심어먹기도 좋았다. 마을에는 학교, 위생소, 공소합작사 등 시설이 구전하게 있어 생활하기 매우 편리하였다. 누나의 집에 온 후에는 배고픈 고생도 안했다. 겨울에 산에 가서 땔나무만 하면 된다. 공부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조금은 매부의 눈치를 봐야 하지만 호강하는 편이였다.

그렇게 시름없이 공부를 하며 초중을 다니게 되였는데 이외의 사고로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면서 누나의 어깨가 더 무거워졌다. 누나는 늘 입버릇처럼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유일한 출로라며 일깨워 주군하였다.

고중은 향 소재지에 있는 학교를 다니게 되였는데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다. 누나는 아침이면 맛나는 반찬에 새야한 이밥을 싼 도시락을 손수 책가방에 넣어주군 하였다. 이런 누나의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잘해야 한다며 마음속으로 다지군했다. 당시의 고중은 농촌 지원 로동이 많았다. 학생들 또한 공부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쩍하면 무리 싸움을 하고 련애하는 애도 있었는데 공부는 뒤전이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누나는 “니가 해야 할 일은 공부를 잘해 상급 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겠니? 련애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늘 침을 놓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지 말고 술도 마시지 말라며 절제하는 것을 배우도록 일깨워주었다.

내가 상급 학교 입학통지서를 받던 날, 누나는 너무 기뻐 눈물까지 흘렸다. 닭을 잡아서 나를 가르쳐주신 고중 선생님들을 대접하느라 큰잔치 상을 차리기도 했다.

동생이 출세했다고 동네방네에 자랑하던 누나의 그때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상급 학교에 갈 때 누나느 새옷, 새신을 사주었고 용돈도 챙겨 주고 학교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가 걱정되여 미수가루며 누룽지며를 가방에 꿍져넣어 주기도 했다.

상급 학교를 졸업하고 화룡 시가지에 있는 병원에 배치 받아 근무할 때에도 나는 일요일이면 누나 집에 가서 맛나는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나한테 혼사말이 들어올 때마다 먼저 나서서 꼬치꼬치 상대를 알아보느라 하다가 처녀애들의 미움을 사기도 한 누나였다. 동생을 생각해서라면 누나는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도 누나는 ‘가문의 영광’이라며 누구보다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내가 장가를 들 때에도 생활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럴듯한 결혼식은 아니지만 누나는 최선을 다해 치러주었다.

그러던 2017년 여름, 내가 더 효도할 새도 없이 누나는 병으로 나의 곁을 영원히 떠나갔다. 하늘을 우러러 통탄을 해봐도, 가슴을 치면서 후회를 해봐도 누나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누나를 그리는 마음을 담아서 〈누나〉라는 가사를 써보았다. 누나를 그리는 마음을 영원한 노래로 누나에게 바치려고! 

나를 키워준 누나의 사랑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고. 애지중지 키워준 누나의 사랑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누나, 엄마같은 나의 누나, 영원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김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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