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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27] 첫 발자국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3-03-06 12:02:09 ] 클릭: [ ]

지금으로부터 46년전인 1977년 나는 연길시제6중학교의 영어 대과 교원으로 배치받았다. 교원으로 되기전에 나는 생기가 넘쳐야 할 20대 나이에 중병에 걸려 바깥출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신세였다.

날마다 집구석에서 세월을 보내다 절망한 나머지 영어를 자습하게 되였는데 마음속에 명확한 분투목표가 생기자 새롭게 세상을 사는 것 같았다. 모든 정신을 독학에 쏟아부으니 병도 많이 나아졌다. 때마침 당시 우리 나라에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는데 중소학교에서 영어 교원을 많이 초빙했던 것이다. 시험을 거쳐 나는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 영어교원으로 되였다.

솔직히 말해 나는 교원이 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우리 집은 세세대대로 이어온 교원가정이였다. 어머니는 사회의 인정을 받는 훌륭한 교원이지만 너무 다망하다보니 집에서 언제 한번 나의 숙제를 들여다본 적도 없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봐야 했고 가무일도 해야 했으며 저녁밥을 짓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였다. 게다가 당시 교원직은 크게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였다. 원하는 직업은 아니지만 부모와 은사들의 설득을 이기지 못해 할 수 없이 교원직에 응한 나다.

당시 연길시6중은 민족련합학교였고 학교에서는 나에게 한족반 고중 1학년과 초중 1학년의 영어 수업을 맡겼다. 초중 1학년 수업은 그래도 자신이 있었지만 고중 수업은 겁부터 앞섰다. 학교에서 배치한 일이니 좋든 나쁘든 반드시 따라야 했다.

첫 수업시간은 고중이였다. 수업전에 나는 정성들여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였다. 교안은 전형적인 세안(细案)이였다. 교단에 올라선 후의 첫인사부터 상세하게 교안지에 적어두었고 가능하게 부딪칠 일에 대비하여 대처할 말들까지도 착실하게 적어놓고 반복적으로 련습했다.

드디여 첫 수업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교실 밖에서 기다리다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종소리와 함께 교실에 들어가 흑판 앞에 놓인 자그마한 교탁을 앞에 두고 학생들을 마주보며 엄숙하게 섰다. 이때 ‘기립!’ 소리와 함께 전체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꼿꼿이 서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라고 큰 소리로 인사하였다. 비록 언녕 마음속 준비는 있었지만 아무런 사범 교육을 거치지 않은 데다가 집구석에서 자습으로 영어를 익힌 내가 이 장엄한 정경에 깊은 진동을 받았다.

초롱초롱한 50여쌍의 눈이 몽땅 나에게로 쏠렸다. 순간 나는 수업 첫시작에 해야 할 말들을 홀딱 잊고 말았다. 당황해진 나는 불쑥 터져나온 첫마디가 ‘모니터’였다. “모니터”, “모니터”라고 부르자 생각 밖으로 이번에는 교실이 떠나갈 듯한 폭소가 터졌다. 영어 발음은 ‘모니터’인데 어느 익살꾸러기 학생이 제꺽 “모뤼즈”(당나귀)라고 되받아 소리쳤던 것이다. 영어선생이 한 첫마디가 ‘당나귀’라고 하니 애들이 듣기에는 우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애들이 한창 웃고 있을 때 나는 재빨리 마음을 진정시켰고 애들의 정서도 차츰 가라앉자 “‘모니터’란 영어로 ‘반장’이란 뜻이며 첫수업이니 반장이 누구인지 몰라서 알려고 반장을 불렀다”고 말했다. 다음 흑판에 영어로 ‘모니터’라고 썼다. 학생마다 영어 문자를 보기만 해도 시원시원하고 멋스럽다고 야단이였으며 영어수업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 같았다. 이어 나는 “영어를 배울 때 한어와 비슷한 언어를 련상하면 영어 단어를 빨리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어쩌면 학생들은 첫수업부터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한가, 앞으로 꼭 영어를 잘 배울 것 같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애들의 얼굴을 보니 좋아하는 표정이였다.

나와 학생들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가까와졌고 학생들은 영어 수업을 고대했다. 그후부터 반장의 별명은 자연스럽게 ‘당나귀’로 되였고 46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지금에도, 그 학생들이 예쉰이 다 넘었는 데도 학생들은 계속 그를 ‘당나귀’라고 정답게 부른다. 반장 또한 자기의 별명은 영어공부를 하는 데 힘을 실어준 첫선물이라고 말한다.

고중 수업은 시작부터 긴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비교적 성공한 편이였다. 그런데 초중반은 완전히 상상밖이였다.

낡고 비좁은 교실에 60명 넘는 학생들이 빼곡하게 앉아있었다. 소학교에서 갓 중학교로 진학한 13살 가량의 애들이라 가만히 앉아있지 않고 홀딱거리며 장난이 심했고 중간중간 소동도 잘 일어났다.

수업시간에 말하지 말라 해도 막무가내였다. 키가 작고 어리고 연약해 보이는 선생님이 애들 눈에도 차지 않은 듯 기세등등하게 선생님을 애 먹였다. 더군다나 자습으로 영어공부를 한 교원이라니 업신여기는 것 같았다. 애들은 보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다.

한번은 영문법 비교급과 최상급을 강의하고 짧은 글을 짓고 발표하라고 하였더니 한 남학생이 불쑥 일어서더니 “우리 반 담임교원은 키가 작다. 반장은 담임교원보다 더 작다. 영어 선생님은 셋중에 키가 제일 작다.”라고 말하는 데 어조가 우스운데다가 손시늉까지 해대여 온 학급 학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나는 원체 키가 작다보니 키 작다는 말을 제일 듣기 싫어했다. 수업시간에 이런 봉변을 당했으니 그 심정이 여간 말이 아니였다. 아무런 교학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사태를 수습하고 수업시간 질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행운스럽게도 영어조 조장인 김동호선생님과 동업자로 된 것이 천만다행이였다. 김동호선생님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길시6중에 배치받은 교원인데 전에 농촌에서 농사일도 해보고 공장의 로동자로도 있어봤고 해방군에 입대하여 입당한 분이이기도 했다. 장춘외국어학원을 졸업한 그는 문화수준도 높고 사회 경험도 풍부했다. 키 크고 웃을 때면 눈부터 웃는 선량하고 곱게 생긴 분이였다. 당시 그는 결혼한 지 얼마 안되는 30대 미만의 젊고 씩씩한 분이였다.

가련한 나의 처지를 지켜본 김동호선생님은 학생들의 정황을 알아보고 나와 함께 대처할 방법을 분석, 연구했다. 학생들의 정황과 나의 교학 정황을 더 잘 알아보기 위해 어느 날 그는 나의 수업시간을 참관하였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생겼다. 그 때 학교의 교수시설이 락후한지라 교단이 없이 선생님은 바닥에 서서 수업했다. 뒤에 앉은 애들은 키가 작은 나를 볼 수 없었고 키가 작아 흑판의 절반 높이를 겨우 리용하는 상황이였다. 나는 흑판 밑부분에다 글을 쓸 때가 많았다. 당연히 뒤에 앉은 애들은 흑판 글이 보이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멋쟁이 김동호선생님이 들어서자 애들은 공개적으로 수준 있고 키 크고 잘 생긴 김동호선생님이 우리를 배워주면 좋겠다며 어디서 저런 ‘쪼꼬만’ 선생이 왔는가 하며 야단법석이였다.

마음씨 고운 김동호선생님은 담임교원과 련계하는 한편 여러 경로를 통해 내가 맡은 학급 학생들과 주동적으로 접촉하며 애들에게 나의 우점을 말하며 나의 위신을 높여주느라 애썼다. 그리고 경상적으로 학생들의 정황을 알아보고 자기의 보귀한 교수경험도 나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김동호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나는 우선 교육사업에 대한 나의 태도부터 단정히 하고 모든 것은 학생들을 위한다는 신념을 굳히며 난제를 풀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학급에서 제일 애 먹이는 우두머리 학생들과 주동적으로 소통하며 그들과 친구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재미있게 수업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지성이면 돌 우에도 꽃이 핀다고 ‘모든 것은 학생들을 위해’라는 일념으로 교수에 림하였기에 나의 수업은 점차 정상궤도에 들어서게 되였다.

연길시6중은 내가 사회에 내디딘 첫발작이 찍힌 곳이다. 그곳에는 잊지 못할 일들도 많고 많다.

학교에 출근해서 이튿날 나는 일찌기 출근하여 교연실 청소를 말끔히 하고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쓰레기를 버리고 학교 청사로 들어설 때 학생들의 등교시간인 7시 15분이 넘었다. 학생들에 대한 요구가 엄격한 교도처 서주임은 학교 청사 앞에서 지각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티나는 나를 보던 서주임은 나를 학생으로 여기고 나의 팔을 덥썩 잡고는 지각생들과 함께 줄을 서라고 했다. 이런 난감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학생들 앞에서 내가 새로 온 교원이라고 해석할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20여명 지각생들과 함께 줄을 섰다. 주임은 지각생들에게 운동장을 두바퀴 달리는 처벌을 내렸다. 막 달리기를 시작하려는데 앞에 선 학생이 거들먹거리며 주임의 지시를 따라주지 않았다. 성난 주임이 그 학생한테 가는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학교 청사에 들어섰기에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그후 며칠 안 지난 어느날 윤철수 조장 선생님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알고 보니 그날은 로임을 타는 날이였다. 마음씨 고운 조장 선생님이 직접 나를 데리고 총무처에 가려는 것이였다. “아니, 출근한 지 1주일 밖에 안되는데 무슨 로임을?” 나는 로임을 안타겠다고 생떼를 쓰고 윤선생님은 로임을 주는 날이기에 꼭 타야 한다며 나를 설득시키느라 여간 애간장을 태웠다. 너무도 말을 안 들으니 그는 나의 손을 덥썩 잡고는 총무처로 끌고 갔다. 총무처에서 싸인 받고 난생 처음 로임 36원 50전을 받아 어머니께 드렸다.

연길시6중에서 나는 김동호선생님의 관심과 인도를 받으며 점차 교육사업에 흥취를 가지게 되였고 마음의 안정도 찼았다. 그는 나의 마음속의 기둥이였다. 학교에서 무슨 곤난에 부딪치면 처음 생각나는 분이 바로 김동호선생님이였으니 말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청단에 가입하지 못한 나는 학교 공청단회의에 참석하지 못해 받은 심리적 고충도 김동호선생님에게 말했고 김동호선생님 안해의 구체적인 지도하에 입단신청서도 썼다. 1979년의 어느 날, 나는 오래 동안 마음속에 간직해두었던 대학의 꿈도 김선생님에게 말했다.

대학시험을 보려는 나의 말을 드고 김선생님은 대단히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도와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나의 문화수준이였다. 나의 고충을 헤아린 김선생님은 주동적으로 나를 도와 낮에는 교학에 바삐 보내고 저녁이면 교원사무실에서 나에게 단독 보도를 해주었다. 영어 기초부터 하나하나씩 알고 넘어가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말대로라면 1대 1의 보도였다. 그는 아무런 보수도 없이 저녁마다 가르쳐주며 대학시험에 합격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했다.

얼마간 지나니 영어만은 신심이 생겼다. 그러나 어문, 정치, 력사, 지리가 문제였다. 력사와 지리는 배운 적이 없었고 정치는 내가 배웠던 내용과 달랐으며 어문은 더 한심한 수준이였다. 조선족학교를 다닌 나에게 김선생님은 한어로 대학시험을 보라고 했다. 나는 일주일에 16교시씩 학생들을 가르치는 외에 밤을 패며 공부를 했다.

온 학교 선생님들이 일떠섰다. 교무처 교재관리 선생님은 교재를 지원하고 졸업반 선생님들은 복습자료를 제공해주었으며 어문선생님은 업여시간에 고문을 배워주고 모범 작문을 써주기도 했다. 일부 교원들은 교연실 청소까지 맡아하며 지원했는데 정말 감동된 장면들이였다.

대학입시 한달을 앞두고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신 김선생님은 학교의 동의를 거쳐 나의 수업시간을 김선생님과 다른 교원이 나누어 맡았다. 나는 시름 놓고 한달동안 집에서 시험준비를 하게 되였다. 그 기간 학교에서는 대과 교원인 나에게도 학교에서 주는 복리를 빼놓지 않고 보내왔고 로임도 보내왔다.

김동호선생님을 비롯한 연길시6중 선생님들의 다함없는 성원과 지지에 힘입어 나는 끝내 대학에 붙게 되였다. 영어 점수가 특별히 높았는데 구두어 시험관들의 경탄을 자아내기도 했다.

연길시6중은 사회의 첫 발작을 힘차게 내디디게 한 곳이기도 하고 훌륭한 선배들을 만나 보귀한 교수 경험과 인생 경험을 쌓게 한 곳이이기도 하다. 1979년 나는 선생님들의 사랑 속에서 선생님들의 기대를 안고 정든 학교와 사랑하는 학생들을 떠나 지식 탐구의 길에 올랐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나의 ‘첫 발작’에 용기를 준 귀인들인 김동호선생님을 비롯한 선배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싶다.

/김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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