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기자: [
홍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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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12-17 21: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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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엄마의 딸로 김씨 가문의 맏이로 태여난 언니이다. 초롱초롱 머루알 같은 쌍겹눈을 가진 언니에게 한살 어린 남동생이 련이어 생기면서 언니는 2살 때부터 야무지게 동생을 챙길 줄 아는 착한 누나로 되였다.
아버지는 하향간부로 거의 집에 계시지 않았고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조양천 기차역에서 지게로 석탄을 지고 화물차에 운반하는 운반공이였다. 어두운 새벽에 별을 이고 나가 밤하늘에 별이 총총할 때야 지친 몸을 끌고 집에 돌아오는 부모였다.
큰언니(왼쪽 두번째)와 함께 기념사진 남긴 우리 형제(필자 오른쪽 두번째) |
언니는 다섯살 때부터 부모들이 출근하면 동생을 돌봐주었다. 또한 동생과 함께 얼굴에 숯칠을 하면서 풍로에 불 피워 쌀죽을 끓였다.
이런 사랑스러운 딸이 있어서 엄마는 힘든 세월에도 행복을 느끼며 살았고 너무나 일찍 철이 든 딸이 있어서 자랑스러워 했다.
언니가 갓 7곱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가 하향간부로 로투구진에 내려가면서 우리 집은 로투구로 이사하게 되였다. 그때 로투구진에는 하향간부 자녀들만 다니는 합작유치원이 있었다. 언니는 한살 어린 남동생과 함께 유치원에서 생활했는데 일요일에만 집으로 돌아왔다. 다른 애들을 잘 도와주는 착한 성품을 가진 언니는 어른스럽게 동생을 잘 챙겨주어 늘 선생님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들이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언니는 잠결에 란발의 시커먼 사나이가 커다란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미친 듯이 웃으며 아이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놀라 눈이 화등잔이 된 언니는 자지러지게 울어댔다. 유치원은 일순간에 수라장이 되여버렸다. 란발의 사나이는 로투구진의 정신환자였다.
그날 저녁부터 언니는 얼굴이 불덩이가 되면서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급기야 언니를 안고 로투구병원에 달려가니 의사 선생님은 연변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였다. 그처럼 령리하고 약삭 빠르던 언니가 연변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는 하반신이 이미 마비되였을 때이다. 급성 뇌막염 후유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언니는 병원에서 20여일간 치료를 받아 열은 내렸지만 두다리를 못 쓰게 되였다.
며칠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고무줄을 놀고 돌차기도 놀던 언니는 혼자 앉을 수도 없고 설 수도 없었다. 담요로 몸을 감싸놓아야 앉을 수 있는 장애인이 되였다.
필자( 앞줄 오른쪽 첫번째) 큰언니(뒤줄 오른쪽 첫번째)와 함께 |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부터 언니는 빈집에서 혼자 포대기에 기대여 울고 있다가 지치면 잠들기도 하며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가 손에 과자라도 사들고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진 언니였다. 그런 기다림으로 언니는 하루하루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언니는 벽을 잡고 일어서 보려고 애썼다. 한번, 두번… 수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서보려 애쓰다 어느날인가 혼자서 벽을 잡고 서게 되였다. 병원에서 다시는 설 수 없다고 진단하여 치료를 포기했던 부모님들은 언니가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아버지는 나무로 세바퀴 달린 손잡이 차를 만들어주었다.
언니는 그 차에 매달려 구슬땀을 흘리며 매일 악착스레 련습했고 엄마는 침구료법을 시키느라 언니를 데리고 다녔다. 점차 언니는 오른쪽 다리 힘을 빌어 혼자 일어설 수 있게 되였다. 평행봉을 만들어달라고 아버지를 졸라 언니는 평행봉을 잡고 왔다갔다 하며 재활치료를 이어갔다. 두달 동안의 노력을 거쳐 오른쪽 다리는 정상에 가깝게 회복되였으나 왼쪽 다리는 그냥 후줄근해 힘없이 절룩거리게 되였다.
걸을 수 있게 되자 언니는 남동생과 함께 한 학급에 입학했고 8살의 언니에게는 세 동생이 있게 되였다. 장애가 된 몸이지만 언니는 어릴적부터 맏이라는 책임을 다했다. 열심히 공부하고 또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남동생과 한반에 다니면서 항상 동생을 챙겨주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세 동생들의 먹거리를 챙기고 가무일도 하며 엄마를 도울 줄 아는 착한 딸로 자랐다.
9살부터는 불편한 다리를 끌고 물동이를 이고 하루에 12번씩 물을 길었고 동생들이 벗어놓은 옷도 언니가 씻었다. 그리고 저녁밥을 지어놓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부모님들을 맞아주기도 했다.
언니와 나는 12년이란 년륜의 차이가 있다. 언니는 나한테 엄마 같은 존재였다. 엄마가 일하러 가면 나를 잠재우고 챙겨주는 일은 언니의 몫이였다. 내가 5, 6살 때쯤인가 언니가 나를 목욕시켜주는 데 내가 물장난이 심해서 언니를 애먹이던 일들이 지금도 생각난다. 여느 집 애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하고 엄마부터 찾는다고 하는데 나는 항상 언니부터 찾았다. 그래서인지 이순에 가까운 이 동생을 언니는 지금도 강가에 내놓은 애들처럼 수없이 걱정하고 계신다.
엄마는 장애의 몸으로 어려서부터 가정의 중임을 떠맡아온 언니의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언니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두고두고 외우군 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동생들도 하나둘 학교에 다니게 되였고 언니는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간호사가 되려는 꿈을 키워온 언니는 항상 락관적이였으며 천성적으로 말을 아끼는 성품을 가졌다. 매일 불편한 다리를 끌며 제일 먼저 등교해서는 교실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반급 활동으로 로동 시간이 있을 때도 기타 학우들과 똑같이 자기가 해야 할 몫을 착실하게 완성했다.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을 도와주고 운동회 때면 물을 길어와서는 선수들에게 물을 따라주며 진심으로 응원해주군 했다.
당시는 추천받고 위생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였다. 학교에 추천 명액이 내려와 학급과 학년에서는 모두 언니를 추천했다. 그런데 장애자라고 해서 언니는 최종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해 언니의 꿈은 산산조각이 되였다.
그날 저녁, 언니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캄캄한 강뚝에 앉아 한없이 소리내며 울었고 우리 집은 초상난 집처럼 쓸쓸했고 찬 기운이 감돌았다.
언니는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
언니는 장애의 몸으로 동생들을 돌보면서도 언제 한번 부모들과 장애의 서러움을 토로한 적이 없었고 불구인 자기 대신 동생들이 집일을 더 많이 하게 한적도 없었다. 늘 배려해주는 언니여서 우리 형제는 부모와 못지 않는 사랑을 언니한테서도 받으며 자랐다.
언니는 23살에 시골의 한 수의사의 안해로 되였다. 시부모를 잘 모셔 촌 모범 며느리로 되였고 두자식의 어머니로 되였다. 페암과의 투병을 거쳐 지금은 손군의 재롱을 만긱하며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언니의 기구한 운명을 얘기하며 언니의 야윈 등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쏟는 나를 보고 언니는 되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단다. 모든 걸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살면 투정도, 불평도 없다더라.”고 말하며 “일어설 수도 없는 장애자와 비하면 언니는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산다.”고 말한다.
언니는 불행한 운명을 마음에 두고 운명과 대화하면서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강한 녀인이다.
/윤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