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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15]잊지 못할 1977년의 대학입시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10-12 13:29:39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은 한사람에게 있어서 더없이 귀중한 무형 재산이다. 나의 소중한 추억 가운데 언제나 나를 격려해주고 새로운 도전에 맞받아 나아가도록 힘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교편을 놓고 퇴직한지도 어언 10년이 지났건 만 아직도 나는 습관적으로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는다. 두터운 유리 밑에 깔려있는 42년전의 대학졸업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의 운명을 바꾸어준 대학입시 제도가 회복된 1977년이 떠오른다. 비록 흑백사진이지만 그때 그날의 정경이 무지개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1980년 1월에 찍은 연변사범학원 일본어 전공 졸업사진(뒤로부터 두번째 줄 왼쪽 첫번째 필자) 

45년전인 1977년 십년이나 페지되였던 대학입시 제도가 회복되였다. 대학교란 누구나 다 동경하고 갈망하는 신성한 곳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속에 품고 키워왔던 대학꿈이 아니였던가.

나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되는 해에 도문강반의 자그마한 농촌마을 량수에서 태여났다.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나이에 벌써 우리글을 제법 읽을 수 있었고  우리말 뜻풀이로 천자문을 술술 외우기도 했다. 호기심이 많고 구지욕도 강했다. 내가 제일 즐겨읽는 책중의 하나가《세계 과학가들의 이야기》이였다. 고금중외의 과학가들을 소개한 책이였는데 과학가들이 무엇을 발명했고 그 발명 가치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했지만 맹목적으로 과학가들을 숭배했고 그들의 이름을 줄줄 외울 수 있었다. 과수 품종을 육성한 미츄린이며 구쏘련 ‘무선전의 선구자’ 뽀뽀브이며 벨, 달톤… 이름만 들어도 과학가들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가슴이 설레였다.

“커서 꼭 위대한 과학가로 되리라”

남다른 포부를 품고 소학교에 입학한 나는 무슨 일에서나 앞장섰다.  1학년 때부터 줄곧 반급 학습위원이였고 고급학년에서는 학교 학습위원으로 되였다. 특별한 공부 비결은 없었지만 공부하는 데는 신심이 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우리 아버지는 이름 있는 목수였고 야장 일도 막힘없이 잘했다. 일반 가정용 도구를 거의 손수 만들었고 물통이랑, 쓰레받기랑 공장에서 만든 것과 비슷했는데 아버지 손을 거치면 뭐든 다 그럴듯하게 만들어 졌다. 아버지는 재봉일도 잘했고 뜨개도 잘 떴고 붓글씨도 잘 쓰셨다. 나는 아버지께서 14살 때 붓으로 쓴 천자문을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초중을 졸업한 우리 아버지는 대학교 건축 교재도 자습으로 배워냈다.

듣는 말에 의하면 량수의 대부분 큰 건물은 아버지가 직접 설계했다고 한다. 연구생 공부를 한 나의 동생 말에 의하면 아버지와 대학 수학문제를 함께 담론한 적도 있다고 한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는 몰라도 우리 다섯형제중 대학생이 네명이나 나왔다. 농촌에서 한 가정에 네명이나 대학에 붙었다는 것이 정말 동네를 들썽케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우리 형제들이 모두 총명하다고 혀를 찼으며 우리 집 이야기는《연변일보》에도 실렸다.

나는 량호한 학습 습관을 양성했다. 산수과목은 배우기전에 먼저 자습했고 리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아무리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도 신심을 가지고 파고 들었다. 남들이 잠든 깊은 밤에도 문제를 다 풀 때까지 공부했다. 6학년 교재의 제일 뒤부분에는 풀기 어려운 산수문제가 있었는데 나는 그 산수문제도 밤을 새며 풀었다. 어릴 적 나는 우리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총명한 분으로 생각했다. 하기에 언제나 신심으로 충만되여있었고 무슨 일에서나 자신심이 있었다.

공부는 도덕적 책임이 수요된다.  정직하고 근면한 품성을 지닌 부모님이 나의 훌륭한 본보기가 되였다. 부모님이 매일 땀 흘리며 힘겹게 일하시는 걸 볼 때마다 나는 나에게 맡겨진 공부를 꼭 잘하는 것으로 부끄럼 없이 보답하리라 다지고 또 다졌다. 부모님이 숙제를 하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나는 스스로 어김없이 잘했다. 어느 한번 산수 시험을 보았는데 실수로 인해 80점 밖에 맞지 못했다. 그날 점심 땀흘리며 일하신 부모님과 마주앉아 밥 먹을 면목이 없어 나는 점심을 굶었다. 

그때는 집집이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한 때였고 우리 집은 식구가 많다보니 더 구차했다. 연필과 필기장을 살 돈마저 없었다. 부모님에게 말해봤자 돈 줄 수 없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하학 후면 페품을 주었는데 학교로 오가는 길옆 향병원의 쓰레기통을 뒤지며 마이싱과 페니실린 빈 병을 주어서 덮개에 씌운 알루미늄을 벗겨 팔았다. 주머니의 돈이 불어나자 가슴이 벅찼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흥분 된다.

나는 최우수의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에도 합격되여 무등 기뻤다. 그 시절 중학교에 입학했다는 것이 지금의 대학 입학에 못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기쁨도 한 순간이였다.  때는 1966년, 중학교에 금방 발을 들여 놓았는데 우리는 특수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교학이 중지되고 상급 학교 입학시험도 페지되고…

1977년 늦가을, 십년 만에 대학 시험제도가 회복되였다. 그때 나의 나이는 만 25세, 당시 대학입학 자격증을 가질 수 있는 최고 나이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기쁨과 동시에 걱정도 산처럼 내 마음을 지지 눌렀다. 필경 대학시험이 아닌가. 소학교 수준 밖에 안되는 나에게는 아름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시험 날자가 반달 남짓 남았고 초중을 다녔다 해도 배운 것이 없었으며 교과서마저 없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시험장에 들어섰다. 문과 시험을 봤는데 정치, 조선어, 수학, 력사, 지리를 시험보고 한어 성적은 참고 성적으로 넣는다고 했다. 수학 시험지를 받아들고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되새기며 골똘히 문제를 들여다 보았다. 1원 1차 방정식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는 생각나는 대로 써넣었다. 틀리게 써넣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와주었는지 문제 하나가 수학 공식만 써넣으면 되는 문제였다. 10점이다.  다행이도 특수한 방법으로 여러 개 공식을 외워둔 것이 있어서 제꺽 써 넣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10점 덕분에 내가 대학 입학 점수선에 들었다는 것이다. 조선어문 시험은 자신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은 덕분이며 더우기 향에서 조직하는 농토기본 건설 공사장에서 여러 해 동안 신문 총 편집을 해왔기 때문이다. 작문 제목은〈나는 승리의 시월에〉였다.  력사와 지리는 한 시험지이고 공부를 했다는 것이 대학 시험 며칠 앞두고 외운 200개 나라와 지구 이름 뿐이였다. 지금도 그때 기억해둔 이름이 머리속에 남아있는데 태평양 섬나라까지 빠짐없이 외울 수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적이 나왔다. 나는 행운스럽게 대학 입학 점수선에 들었고 수십명에서 한명이나마 입학할 만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이듬해 4월, 입학 통지서가 날아왔다. 뜻밖에도 연변사범학원 일본어 전공이였다. 농사일을 해서 십년 만에 대학생이 되다니 그 기쁨 어디에 말하랴.

학교로 가는 날까지 나는 하루에도 얼마나 입학통지서를 보았는지 모른다. 혹시 꿈인가 싶어서…

/손홍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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