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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10] ‘최산파’ 시어머님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8-24 15:16:57 ] 클릭: [ ]

30대로부터 시작하여 6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조산원으로 살아오신 나의 시어머니는 한때 룡정의‘유명인사’로 되였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1925년 8월 생인 나의 시어머님 최혜숙은 지난 세기 50년대 처음으로 설립된 룡정산원의 두명 뿐인 조산원중의 한분이였다.

출발하기전의 ‘최산파' 최혜숙 시어머님(왼쪽)

당시 집집이 애들을 많이 낳을 때이고 지어 한집에서 대여섯명씩 낳는 집도 꽤 많았다. 우리 시어머니는 의술도 좋고 마음도 따뜻하다 보니 룡정에서 ‘최산파’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시어머님이 어찌하여 조산원 직업을 선택했는지는 잘 모르나 분명한 것은 시어머님은 훌륭한 조산원으로서 충실하게 직책을 다해왔다는 것이다.

시어머님께서 회갑을 쇨 때였다. 룡정시부유보건소에서 조산원으로 있는 기간에 어머님의 손을 거쳐 출생한 아이들을 통계해 봤는데 글쎄 만 2,000여명이라고 했다. 수십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시어머님은 오로지 조산원이란 외길만 걸어왔다. 밤낮이 따로 없었고 명절이 따로 없었으며 궂은날, 마른날 할 것 없이 누가 부르기만 하면 내달렸다. 우뢰가 울고 폭우가 쏟아지는 칠흑같은 밤길에도 시어머님은 어깨에 위생가방을 둘러메고 한손에 손전등을 쥐고 자전거를 타고 산모네 집에 갔다. 포장길보다 진흙길이 더 많았던 그 시절, 가로등은 없고 달빛을 빌어 수없이 많은 캄캄한 밤을 혼자 다녔다. 몸이 아파도 휴식할 사이 없었고 또 휴식할 수도 없었다.

언제 였던가, 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어느 한밤중의 일이였다. 시어머님께서 자전거를 타고 산모네 집을 향해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팔목을 다쳤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되고 팔목 통증이 심했지만 시어머님은 아픔을 이겨내며 지체없이 산모네 집으로 향했다. 새벽이 돼서야 집에 돌아와 금방 자리에 누우려고 하는데 또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시어머님은 두말없이 다시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시어머님은 항상 대기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에 림했다. 언제 어느 때 부를지 모르는 산모와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고고성을 울릴 새 생명이 항상 시어머님을 기다리기 때문이였다.

올망졸망 여섯 자식들을 둔 시어머님은 집일은 제쳐놓고 사업 밖에 몰랐다. 항상 바삐 보내는 시어머님이였기에 1년 365일, 온 가족이 함께 오붓하게 식사하는 일조차 사치였다. 밥을 짓다가도 일어나야 했고 밥상에 마주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가도 인차 뛰여나가야 하는 직업이였다.

이러다 보니 우리 남편 형제들은 남자애나 녀자애나 할 것 없이 어릴 적부터 밥을 지을 줄 알았고 빨래할 줄 알았다. 남자애들이라 해도 자기 옷은 자기절로 빨았고 옷이 째지면 스스로 기워입군 했다.

산모가 출산할 때 통증이 심해 울고 소리 질러도 어머님은 종래로 짜증을 낸 적이 없고 항상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다독여주었다. 시어머님은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롱담도 잘하시는 분이였다. 부유보건원 종업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전해졌다. 시어머님의 우스개 소리에 산모가 웃음을 참지 못해 크게 웃는 바람에 아기가 그만 불쑥 튀여나왔다고 한다.

계획출산 시기에도 시어머님은 자식들 뿐만 아니라 주변 젊은이들에게 항상 애를 둘씩 낳으라고 격려하군 했다 한다. 혹시 락태하려는 젊은이들을 만나면 시어머님은 어떻게든 설득해서 될수록 애를 낳게 했는데 시어머님의 권유로 세상을 본 애들만 해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우리 형제 대부분도 시어머님의 적극적인 동원으로 아이를 둘씩 낳았으며 시어머님의 손을 거쳐 출산한 손군들이 열명이나 된다.

모든 열정과 정력을 사업에 바친 시어머님은 선후로 수차례 룡정시(현)의 민족단결 모범으로 당선되였으며 시어머님을 만나본 적이 있는 분들은 모두 어머님을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세월이 흘러 시어머님에 대한 기억이 좀씩 사라지고 있지만 본직사업에 충성하고 산모를 위해 신생아를 위해 뛰여다니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김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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