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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04] 민들레꽃 엄마의 꽃 (하)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4-25 07:01:42 ] 클릭: [ ]

엄마의 눈물겨운 시집살이가 시작된 지도 몇달이 되였을가 엄마의 배속에서 새 생명이 꼼지락거렸다. 어느 하루 엄마는 밭 김을 매다가 눈앞이 아물아물하면서 푹 꼬꾸라졌다. 영양이 따라가지 못해 현기증이 났던 것이다. 엄마는 사원들의 재촉에 의해 여느 때보다 일찍 집에 들어섰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안으로부터 딸애의 울음소리가 자지러지게 들렸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니 막내 시누이가 딸애를 꼬집고 때리고 있지 않는가. 엄마를 보고 놀란 막내 시누이는 냉큼 밖으로 뛰여나갔다. 엄마를 본 딸애는 서러워 엉엉 울어번졌다. 이때 미닫이를 닫은 건너방에서 “엄마, 난 저 애 운다하면 신경질이 나 죽겠씀다!” 큰시누이의 말소리다.

50년전 5살 되는 언니를 안고 있는 엄마

“에그, 나는 저애만 보면 머리 더 아프다. 너네 오빠는 어째 명이 저러야, 남의 새끼까지 키워야 하니!”엄마가 들어선 줄 모르는 할머니가 방에서 큰고모와 같이 이불을 만들며 어린 딸애를 욕하고 엄마를 험담하느라 정신없었다. 딸애를 안은 엄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숨이 꺽꺽 막혀 오기에 엄마는 한참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내 딸  때문에 더 아프다구?’ 엄마는 오금이 저려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딸애를 이뻐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미워할 줄은 정말 몰랐다.‘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아들며느리 신세에 사는 처지에 어쩌면 저리도 어처구니 없을가!’

엄마는 억장이 무너져내려 딸을 안고 말없이 집을 나왔다.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의 기온은 엄마의 현기증을 더 악화시킨다. 비칠거리며 본가집에 들어간 엄마는 딸을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그 자리에서 정신 잃고 쓰러졌다.

엄마가 정신을 차렸을 때 아버지는 죄 지은 사람처럼 옆에 쭈크리고 앉아있었다. 엄마는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그대로 서러움이 북받쳐 눈귀를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엄마는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엎치락뒤치락 온밤을 하얗게 새웠다. 이튿날 아버지가 극구 반대했지만 엄마는 아이를 둘쳐업고 길을 떠났다. 엄마는 이를 악물고 큰 결심을 내렸다. 멋 모르는 딸은 엄마와 같이 차 타고 가는 것이 좋아서 한참 말이 트일 때라 뭐라고 잘도 종알거렸다. 엄마는 딸의 볼을 자꾸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찾아간 곳은 딸의 큰아버지 집이였다. 남편이 사망하고 본가집으로 갈 때 딸  큰아버지가 “얘는 우리 집안의 아이인데 내가 키우면 안되오?” 하고 엄마에게 말했던 것이다. 딸  큰어머니는 성격이 활달하고 주위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분이라 엄마도 믿고 의지를 많이 했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엄마는 속으로 ‘어쩜 아이 엄마하고 저렇게 잔혹한 말을 할 수 있을가’하면서 눈물을 삼켰다. 꼬집혀셔 퍼렇게 멍든 자국을 보면서 엄마는 이집이 딸이 있기에 제일 안전한 곳이 아닐가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태여날 아기 땜에 더구나 자기가 제대로 돌볼 수 없기에 아기를 낳고 몸이 회복되고 생활 형편이 좀만 좋아지면 데려가리라 마음 먹었다.

엄마는 사촌언니들과 깔깔 웃으며 노는 딸을 눈물  가득 담고 바라보았다 . 엄마는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딸이 언니들과 노느라 정신없는 사이 가만히 그 집을 빠져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 이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럽고 지금의 처지가 너무도 한심하여 서러움이 북받쳐 참을 길 없었다.

‘불쌍한 내 딸아, 엄마가 꼭 데리러 올거야!’ 하지만 엄마의 이 선택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되여서 엄마의 마음을 평생 아프게 할 줄이야!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그만 몸져누웠다. 모든 것을 알게 된 할머니가 미안해하며 미움을 써서 머리 맡에 놓았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하루 이틀 지나자 배안의 새 생명이 반항했다. 배속에서 이리 차고 저리 차고 엄마를 일어나란다. 그 애 엄마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이 애 엄마이기도 하다. 엄마는 묵묵히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얼마 후 딸을 출산한 엄마는 예전과 완전히 다른 대우를 받았다. 시집 식구들이 얼마나 아기를 이뻐하는 지 젖 먹는 시간외에는 엄마가 안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30세가 넘어서 겨우 본 아이라 할머니는 귀여워 어쩔 줄을 모르고 삼촌, 고모들이 서로 빼앗아가며 예뻐했다.

‘이게 피줄이구나!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내 딸을 이뻐하지 않는다고 내가 얼마나 많은 나쁜 생각들을 하였던가.’이 아이만 태여나면 토굴이라도 세간 난다고 수백번 결심했던 엄마는 그들을 다 용서하기로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선언니를 데리러 가야 하는데… 만약 그 애가 오게 되면 일어날 풍파를 생각하니 엄마는 자꾸 주저심이 들었다.

‘시어머니가 좀더 건강해지면 세간을 나자. 그때 애를 데리러 가야지.’ 이렇게 미루고 저렇게 미루고 어느 새 엄마는 또 임신을 하였다.‘에이쿠! 이 아이를 낳은 다음 다시 보자.’ 엄마는 계속 리유를 대가면서 종내 영선언니를 데리러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벌써 8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엄마는 세 아이의 엄마로 되였고 이 애들을 키우고 시동생, 시누이들 시집장가 보내고 가난에 쫓기고 세월에 쫓기며 살아갔다. 때론 멀리 두고 온 그 자식을 깜빡 잊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어느 날에는 가슴이 콱 막혀오면서 ‘이게 뭐야, 애 데리러 가야지.’ 하면서 자책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우리 집에 예쁘장한 녀애가 나타났다. 오매불망 그립고 그리운 엄마의 딸 영선언니였다. 12살 어린 소녀가 량태 머리를 곱게 따고 하얀 얼굴에 머루알 같은 까만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귀여운 입, 당실한 코, 얼마나 이쁜지 엄마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영선언니의 큰아버지가 언니를 데리고 왔던 것이다.

영선언니

“이 애가 딱 한번만이라도 엄마를 보게 해달라 해서…” 그는 말끝을 흐리웠다. 올망졸망 꾀죄죄한 애들이 한구들 되고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가난한 이 집안을 한 고패 둘러보니 애 데리러 오지 않은 엄마를 리해했을 지도 모른다. 엄마는 훌쩍 커버린 딸을 붙들고 엉엉 소리내며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렇게 크도록 한번 가 보지도 못한 자신이 한스럽고 딸 보기가 미안하여 엄마는 눈물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옷도 도회지 아이들처럼 깔끔하게 입은 영선언니는 큰아버지에게 딱 붙어 앉아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니 엄마다. 어서 인사해라.” 영선이는 얼굴을 홱 돌리며 엄마의 눈길을 외면했다. 엄마는 쉴새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앵돌아져있는 영선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영선이가 문고리를 쥐고 빨리 집으로 가자고 성화를 부려서 결국 엄마란 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변변하게 좋은 걸 먹이지도 못하고 엄마는 그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뻐스에 오르는 영선이를 한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었지만 엄마는 끝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새초롬해 뻐스가 떠날 때까지 눈길을 주지 않는 영선언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딸의 얼굴이 희미해졌다. 뻐스가 떠나자 엄마는 퍼더버리고 앉아서 한참 엉엉 울었다.

‘그래, 이렇게라도 너를 한번 보니 시름이 놓이는구나! 이 엄마를 미워하고 욕해도 좋으니 너만 행복하면 난 다 괜찮아!’

엄마는 눈물 속에 얼른거리는 딸의 모습을 애써 지우며 몸을 일으켰다. 영선언니가 왔다간 후 엄마는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점차 마음을 추스려갔다.

4년이란 시간이 흘렀을가 80년대초 평강벌의 겨울은 가난한 농민들을 편하게 쉬게 하지 않았다. 엄마는 막내 고모와 함께 가마니를 짜면서 생활비를 버느라 아득바득 했다. 방학을 한 우리는 옆에서 새끼를 꼬며 엄마 일손을 돕고 살짝 풍을 맞은 할머니는 가마목에 쪼크리고 누워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태여나면서 대대 탄광에 갔는데 설쯤에나 오군 하였다. 언녕부터 자르려던 일곱살 된 막내의 기다란 머리는 엄마의 손길이 가지 않아 삼검불이다. 두살 터울인 내가 아침에 막내의 머리를 땋아주느라 낑낑 거렸지만 반나절 코를 한발이나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놀더니 막내는 어느 새 머리끈이 풀렸는지 또 머리가 한광주리다.

우리는 뒤전이고 엄마는 고모와 함께 가마니를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때 문이 빠끔이 열리면서 껑충 키가 큰 녀자가 수건을 칭칭 감고 들어왔다. 국방색 옷을 입고 군용신을 신은 데다 군대가방까지 메여서 얼떨떨해있는데 동여맨 수건을 천천히 푸니 영선언니였다.

“이게 누구니? 영선아, 영선아! 니가 어찌 이렇게 올 수 있느냐⋯”엄마는 너무도 생각 밖이라 언니의 두손을 꼭 쥐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엄마, 내 장춘에서 옴다.” 영선언니는 첫마디부터 엄마라 불렀다. 엄마는 격동되여 장춘에서 온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는지 연신 손을 만지기도 하고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한참 복새통을 벌인 후 엄마는 영선언니가 오게 된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엄마를 만나고 간 이듬해 언니의 큰아버지가 급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무리 공사 간부로 출근하는 큰어머니이지만 자기 자식 넷을 키우기도 버거운데 돌아간 남편의 조카를 키운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다 문화대혁명 시기 부모가 억울하게 죽었거나 실종되여 고아가 된 아이들을 모집하는 학교가 있었다. 그 학교에 가면 먹고 자는 것과 학비까지 다 무료이고 학교를 졸업하면 일자리까지 배치해준단다. 전 공사에서 지표가 하나 밖에 차례지지 않아 숱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큰어머니가 그 지표를 힘들게 얻어냈다.

2년전에 장춘 고아학교로 가고 방학이 되자 엄마집에 왔다는 언니의 말을 들으며 엄마는 영선언니의 기둥인 큰아버지가 돌아간 것을 기가 차 했다. 엄마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장춘에서 고생하는 언니가 너무 불쌍하여 언니를 끌어안고 또 한바탕 울었다.

16살 된 영선언니는 4년전과 많이 달랐다. 막내 동생의 머리도 빗어주고 엄마의 일손을 도와 설거지도 하고 살갑지는 않아도 그래도 엄마 묻는 말에는 꼬박꼬박 잘도 대답했다. 엄마는 또 한번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큰어머니가 10여년을 키워주었는 데도 세상을 좀 알자 이렇게 자기를 엄마로 인정하고 찾아주다니! 엄마는 영선언니를 보면 볼수록 기특하고 자랑스러웠으며 키워준 그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고 송구스러웠다.

이렇게 한달 푼히 있으면서 영선언니는 당당히 우리 집 일원으로 그 자리를 굳혀갔다. 그런데 개학이 다 되여가는 데 언니는 떠날 념을 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는 “엄마, 난 학교에 가지 않고 엄마집에 있겠씀다.”고 속심말을 털어놓았다.

“내 처음에 학교에 가서 계속 울었씀다. 거기는 만두만 줌다. 먹는 것두 서서 먹씀다. 선생님 강의도 못 알아 듣겠구. 친구도 없고 해서 큰어머니와 아무리 돌아오겠다 해도 들어주지 않아서 이번에 이렇게 엄마에게 왔씀다. 난 농사 해도 괜찮씀다. 엄마 날 가란 말만 하지 마쇼!”

엄마는 생각 밖으로 언니가 우리들과 같이 있겠다는 말에 너무 반갑고 격동되여 또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이제 2년만 그 학교를 다니면 졸업이다. 그러면 일자리도 배치해준다. 엄마처럼 평생을 지긋지긋한 농민으로 살아도 좋다는 영선언니다. 딸애의 운명이 자기 한마디에 달렸다고 생각한 엄마는 몇날 며칠 뜬 눈으로 밤을 새며 고민하였다.

‘농사일이란게 얼마나 힘든지 네가 어찌 알겠느냐! 엄마처럼 살지 말아야지. 고운옷 입고 출근도 하고 멋도 부리고. 엄마 옆에 있으면 네 팔자가 불보듯 뻔한데. 니 앞날을 위해 내가 어떤 욕인들 이제 더 못 먹겠느냐!’

엄마는 피 터지게 이를 옥물었다. 엄마는 안 가겠다고 떼질쓰다 싶이 하는 영선언니한테 가슴 아픈 말까지 서슴치 않으며 결국 학교에 보냈다.

“내 이제 절대 다시 안 오겠씀다!” 언니는 엄마에게 매몰차게 이런 말을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언니를 떠나보내고 천갈래 만갈래 찢기는 마음을 붙안고 엄마가 흘린 눈물이 얼마였던가. 농민이 무엇이고 로동자가 무엇인지 그때는 왜 그것이 그렇게 중요했던지. 인생길 굽이굽이 세상만사 덧없기만 하였다. 엄마의 아픈 마음을 철없는 우리 딸들이 얼마나 알았으랴. 지금 생각해도 떠나가는 어린 영선언니 뒤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라 불쌍한 엄마 때문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렇게 떠나간 영선언니는 오래동안 우리 집과 련계가 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단위에 배치받았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엄마는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찾아올지 모른다는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이니 거의 7, 8년이 지나서였다. 늘씬한 몸매에 화사한 모습의 영선언니가 우리 마을에 나타났다. 그것도 조선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멋쟁이 한족남자와 함께 말이다. 결혼전에 친엄마를 보겠다는 남자친구의 요구에 의해 왔다는 언니의 심드렁한 표정에 나는 엄마를 비롯한 우리 집 식구를 모두 깔보는 것 같아서 은근히 언짢았다. 엄마와 아버지는 닭을 잡는다 찰떡을 친다 하며 잘하지도 못하는 한어말을 손짓발짓 하면서 열정을 다 쏟았다.

한족남자면 여느 집은 얼굴을 찡그리며 반대하겠지만 그럴 자격도 그럴 생각도 못하는 엄마이기에 온 것만 해도 고마워 어쩔 줄 몰라하는 엄마가 나는 측은하기만 하였다.

“결혼식은 장춘에서 할 거니깐 엄마는 조금도 신경쓸 것 없씀다.” 언니의 말에 엄마는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애틋하게 언니를 바라보며 “장춘이라도 갈만한데…” 하며 얼버무린다. 언니는 씁쓸한 표정이다. 한족들이 사는 곳에서 혼자 살면서 익혀온 습관 때문이여서일가. 우리 집에 있는 이틀 동안 언니는 정말 정나미가 다 떨어지게 해놓고 휑하니 떠나버렸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후 언니가 남겨놓고 간 주소 대로 편지도 띄우고 전보도 쳤지만 감감 무소식이였다. 그렇게 엄마는 네살때 버린 자식 땜에 평생 아프고 쓰리고 아린 가슴을 붙안고 살아야 했었다.

울고 웃으며 50평생을 숨가삐 살아온 불쌍한 엄마, 영선언니는 아예 소식이 없었고 내 우의 언니는 출국한다고 진 빚 때문에 하루하루가 지옥이고 나는 아직도 갈팡질팡 방황하며 설자리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었다. 막내는 이제 2년이 지나야 대학교를 졸업한다. 고생 끝에 락이 온다는 데 엄마는 여직 고생만 하다 이렇게 가면 우리 자식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우리 세 자매는 물 한모금 넘기지 못하고 말라가는 처참한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울고 또 울었다.

영선언니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많이 원망했다. ‘키우지도 못하면서 낳긴 왜 낳았어.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다 엄마 때문이야.’ 영선언니는 이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언니는 고아학교를 졸업하고 장춘에 배치를 받았다. 조선족이란 걸 깜빡할 정도로 한족들과 어울리며 홀로 서기에 모든 노력을 했지만 엄마에 대한 미움은 가셔지지 않았다 한다.

어렸을 때 언니는 너무도 엄마가 보고 싶어 기차가 지나가는 길 옆에 막연히 서있군 했다. ‘어느 날 저 기차에서 엄마가 문뜩 내린다면 얼마나 좋을가!’ 무정하게 꽁무니를 빼는 기차 뒤를 한참 따라서 달리기도 하였다.

그러다 12살 되던 해 작은 언니와 싸우고 난 뒤 영선언니는 밥도 제대로 먹지 않으며 떼질을 써서 끝내 큰아버지와 함께 엄마보러 오게 되였다. 그러나 때투성이 동생들이며 눈물만 흘리는 엄마, 쩔쩔 매는 아버지를 보면서 영선언니는 아무 미련없이 돌아섰던 것이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엄마가 손주를 안고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았을 때 정리실업 당한 영선언니는 한국으로 갈 준비에 바쁠 때였다. 결국 엄마의 마지막 길을 보지 못하고 한국에 갔고 불법체류자로 10여년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생하다가 돌아왔다.

그런데 영선언니의 15살 되는 딸이 앵돌아져 엄마와 눈길도 마주치기를 꺼린다. 똑 마치 어릴 때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영선언니의 마음이 많이 아팠다. 문뜩 언녕 하늘나라로 가신 엄마 생각이 사무치게 나 수소문하여 어렵게 나를 찾아왔다.

“어쩌면 이재야 오오?!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데!”

나는 언니를 붙들고 울먹였다. “사는 게 힘들어서 항상 엄마를 원망했어. 그런데 10여년 한국에서 고생한 나를 알아주기는커녕 자기를 키우지 않았다며 몰인정하게 대하는 딸을 보니 어릴 때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엄마에게 용서를 빌고 싶더라. 이제 와서 아무 소용없지만 말이다!”

슬픔에 젖은 영선언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언니,엄마나 언니나 무슨 잘못이요? 그때 그 상황이 그런 선택을 하게 하였을 뿐이요. 엄마는 언니가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소!”

나의 말에 언니도 가볍게 한숨을 내쉬였다. 영선언니도 딸한테 바라는 것이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주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엄마에 대한 한도 많고 설음도 많아 엄마를 미워하며 살아온 지난날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르겠다며 영선언니는 또 눈물을 머금었다.

문뜩 노란 민들레꽃이 눈에 띄운다. 나는 언니의 손을 꼭 잡고 중얼거렸다.“언니, 난 엄마 생각하면 우리 이 땅에 흔하디 흔한 민들레꽃이 생각나오. 그 어떤 척박한 환경이든 강하게 생명력을 키워가는 민들레꽃, 엄마의 꽃이지!”

언니도 머리를 끄덕이며 민들레꽃을 바라본다. 엄마가 철들어가는 이 자식들을 미소지으며 흐뭇하게 바라보는 것 같아 또 눈시울이 젖어든다.

/전옥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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