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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104] 민들레꽃 엄마의 꽃 (상)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4-25 06:53:50 ] 클릭: [ ]

필자 전옥선 
병원 복도에서 엄마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나와 언니를 위안했다.

“괜찮아, 엄마는 괜찮아!”

출국한다고 북경, 심수, 향항까지 갔다가 결국 만신창이 되여 금방 돌아온 언니,엄마의 병세가 심상찮다며 언니가 울먹이는 목소리에 시가지에 가서 꿈을 펼친다고 고향 시골을 떠난 지도 3년이 되는 나는 모든 걸 팽개치고 오그라드는 가슴을 붙안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엄마 곁으로 돌아왔다. 대학교에 다니는 셋째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

막내인 셋째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떻게나 버텨보려고 했다는 엄마의 말에 또 한번 엄마에게 너무도 무심했던 자신이 한스럽고 엄마가 불쌍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결국 진단은 위암 말기이다. 셋째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우리 딸들은 눈물범벅이 되여 가슴을 치지만 엄마의 눈빛은 여느 때처럼 평온하였다. 이제 50대 초반인 데 인생의 풍상고초를 다 겪어 무상무념의 경지에 올라서일가. 항상 웃는 듯 하던 엄마의 두눈이 움푹 꺼져들어가고 량볼의 광대뼈가 선명해질 정도까지 참았을 엄마의 고통에 나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수술을 끝내고 정신을 차려서부터 엄마는 집으로 가자고 날마다 애걸하다 싶이 우리들을 닥달했다. 엄마의 50여년 인생이 고스란이 묻혀있는 고향땅에 하루빨리 가고 싶어하는 엄마다.

뻐스에 앉아 시원한 아스파트 길을 달려가노라니 가슴이 확 트이는 평강벌이 펼쳐진다. 금방 모내기를 끝낸 들판에서 여린 벼모들이 모살이에 모지름을 쓰고 있고 새파란 하늘엔 하얀 아기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며칠전 먼저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소수레를 끌고 마중나왔다. 평생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마디 안하고 묵묵히 농사일을 하면서 이 가족을 지켜온 아버지의 얼굴 표정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근심에 젖어 어두워진 눈빛은 우리 자식들의 마음을 또 한번 울컥하게 하였다.

위안의 말 몇마디 주고 받고 우리 식구는 소수레에 앉아 집으로 갔다. 엄마가 건강을 되찾고 퇴원한다면 집으로 가는 이 길이 얼마나 행복할가! 그렇다면 가족을 싣고 소수레를 끌고 가는 저 50대 농부의 뒤모습이 저토록 초라하지는 않으련만! 나는 엄마의 옷을 한번 더 여며주며 엄마를 마주 보고 벌씬 웃었다. 엄마는 얼굴에 화색이 돌아 연신 중얼거렸다.

“참 좋구나, 속이 이렇게 시원할 수가!”

이 가난한 고장을 떠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는데 몇해 만에 돌아오는 듯 신기해하고 즐거워하는 엄마를 보노라니 눈시울이 또 젖었다. 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고향마을은 청룡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가로세로 뻗으며 논을 적셔주고 백양나무 몇그루가 띄염띄염 서 있는 전형적인 조선족 시골마을이다.

90년대 초라 호도거리를 시작한지도 10년 넘지만 아직도 초가집이 태반이고 벽돌집은 손을 꼽을 정도로 희소했다. 1대, 2대를 지나 우리 마을까지 가자면 소수레에 앉아 반시간 푼히 걸렸다. 낯익은 사람 만나면 한참 연설까지 하면서 엄마는 기분이 좋아서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종양을 떼내니 병이 나았나 착각하는가본다.

집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엄마는 젊어서부터 좋아하는 노래에 심취되여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들으며 함께 흥얼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에 귀 기울이던 엄마의 눈에 어느 새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견딜 수가 없도록 슬프고 외로워도

녀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만 한다고 스스로 내 마음

달래여가면서

비탈진 인생길을 허덕이며 걸어온

녀자의 일생

아—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엄마는 내가 볼세라 슬그머니 눈물을 훔쳤다. 이러는 엄마를 바라보는 나도 눈물이 치밀어올라 고개를 외로 틀었다. 금쪽보다 귀한 세 딸이 울먹이며 엄마를 지켜주지만 그래도 엄마는 애타게 한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라도 눈앞에 불쑥 나타나서 “엄마! 내가 왔어요! 엄마의 가슴 아픈 딸이 엄마 보러왔어요!”이 한마디만 들으면 엄마는 죽어도 원이 없을 것이다.

‘불쌍한 엄마! 세상 떠나기전 그 얼굴이라도 마음껏 보는 게 소원인 가련한 우리 엄마!’ 나는 야윌 대로 야위여 앙상한 뼈 밖에 남지 않은 갸냘픈 엄마를 꼭 끌어안고 절규했다.

너무나 일찍 우리 곁을 떠나는 불쌍한 엄마! 엄마가 영영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엄마의 그 가슴 아픈 딸, 보고 싶은 그 딸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 형제 자매와 함께(필자 뒤줄 오른쪽 첫번째)

파란 하늘에는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 엄마의 령혼은 아쉬운 듯 구름 우를 맴돌았다.

열네살 되던 해 엄마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큰 오빠와 둘째 오빠가 대학생이 되면서 로동력이 없는 엄마 집에 희생할 사람은 엄마 밖에 없다는 걸 엄마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부하는 걸 포기하고 싶지 않아 엄마는 그냥 모르는 척 책보자기를 안고 집을 나오군 했다. 아들 다섯이나 되는 데도 부모님은 하나 밖에 없는 딸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한푼이라도 벌어서 아들들의 공부 뒤바라지 하는 부모님들의 ‘남존녀비’, ‘녀자는 출가 외인’ 이라는 것이 이 가문의 전통이다.

중학교를 중퇴해야 만 한다고 이미 마음을 굳혔지만 엄마는 공부에 대한 아쉬움과 이제 농촌에서 한평생 부모님들처럼 뼈 빠지게 일할 것을 생각하니 종내 결단을 못 내고 있었다. 한나절 망설임 끝에 결국 깨끗이 학업을 포기하고 몸을 돌리고 말았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낮에는 생산대일을 하고 저녁이면 가마니를 짜면서 새벽에 눈 떠서 저녁 늦게까지 부지런히 일을 찾아했다. 워낙 천성이 밝고 활발하고 인사성이 손꼽히여 마을에서 좋아하지 않는 어른이 없었다. 게다가 타고 난 노래 실력은 힘든 농사일에 지친 마을 분들에게 ‘청량리’처럼 시원한 음료가 되여 갈증을 식혀주었다.

처녀시절 엄마는 여러가지 문예행사에서 노래를 불러 상을 탔는데 60년대 상품은 호미랑 소래랑이였다. 엄마는 쓰지 않고 알뜰히 챙겨두었다가 시집 갈 때 혼수로 가져가려고 했다고 해서 우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엄마가 20살이 갓 넘자 여기저기서 혼사말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때 엄마는 이미 한 마을에서 눈이 맞아 서로 사모하는 이가 있었다. 집체 농사 때라 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일할 때가 많았다. 엄마는 늘 슬그머니 엄마를 챙겨주는 그이가 참 좋았다. 하지만 인연은 아니였는지 엄마는 타향 멀리 시집을 가게 되였다. 엄마의 첫사랑은 서로의 행복을 묵묵히 빌었을 것이라.

20년 넘게 자란 고향을 엄마는 시집을 가면서 처음으로 떠나게 되였다. 남편은 말수가 적었지만 속이 깊어 힘든 일은 자기가 도맡아했다. 훤칠한 키에 쩍 벌어진 어깨, 다정한 중음의 목소리는 엄마에게 안정감을 주고 믿음을 주었다. 집안에서 남편이 셋째다보니 결혼하자 사랑칸에 가마를 걸고 살림을 따로 차렸다. 엄마는 차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현실을 받아들여 새 살림을 하는데 열중하였다. 소박한 행복이 엄마의 마음속에서 잔잔히 물결칠 때 불행은 엄마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오고 있었다.

결혼한 이듬해 이쁜 딸애가 태여나자 남편은 입이 귀에 걸려 늘 싱글벙글이였다. 딸애가 깔깔 웃으며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때 중국 전역에 불어친 문화대혁명은 편벽한 산간마을에도 불어왔다.

그날 저녁 회의하러 간다고 딸애의 볼을 어루쓸며 나간 남편이 한밤중에 피못이 되여 숱한 사람들에게 들려왔다. 정신을 차릴 새 없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병원으로 달렸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숨을 거두고 말았다.

25살 밖에 안된 엄마는 혼이 나가서 실성한 사람이 되였다. 좌파요, 우파요 어느 것이 옳은지 남편이 왜 죽었는지 엄마는 아무 것도 몰랐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어린 색시를 모두 안스럽게 바라보았다.

남편의 장례가 끝난 지도 한참 되여도 실의와 허탈감에 빠져 정신줄이 돌아오지 않은 엄마였다. 앙상한 나무가 비바람에 가지가 꺾이우고 뿌리가 뽑힌 것처럼 엄마와 딸애는 여지없이 생활의 한 모퉁이에 내팽개쳐졌다. 결국 배고프다 울어 대는 어린 딸애를 둘쳐업고 엄마는 고향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것도 서러운데 빽빽 울어 대는 아비 잃은 불쌍한 딸애를 안고 하루하루 버텨가는 엄마는 눈물이 마를 새 없었다. 이때 이 마을에 결혼해서 10년이 되여도 아이를 낳지 못해 리혼한 지 한참 되고 엄마보다 8살이나 이상인 홀애비 한분이 있었다. 아직 남편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엄마의 곁을 말없이 지켜주고 보듬어주며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려주었다. 딸애를 친딸처럼 대해 줄 착한 분이란 걸 너무 잘 알고 있는지라 얼마 후 식도 없이 엄마는 딸애를 업고 지금의 나의 아버지와 결혼하셨다.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내 마음 바람 따라 돛을 달고 가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게

운명이라 하였던 가요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살이지만

후회없이 걸어가렵니다

후회없이 살아가렵니다

 

은은히 귀가에 들리는 노래 소리에 엄마는 슬픔을 바람에 실어보내고 새 생활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눅잦히며 또다시 알뜰히 살림을 해나갔다.

60년대 여느 농촌집인들 넉넉히 살았으랴만 그때 나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허술한 초가집에 변변한 기물 하나 없지만 엄마는 딸애를 친딸처럼 대하는 남편이기에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운명의 조화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재혼해서 반년이 되였을가 가을걷이로 바쁜 그때 뉘엿뉘엿 해님이 서산에 걸리자 일밭에서 돌아온 엄마는 아침나절 채 썰어 놓은 무우 말랭이를 다시 뒤집으며 탁아소로 아이 데리러 가려고 서둘렀다. 이때 아버지가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며 소리쳤다.

“래일 아침 첫 차로 쟈피거우로 가야겠소!” “아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분이 쓰러지셨다는구만!”

“에그,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신다고 어머님이 사설하시더니! 나도 가야 됩니까?” 엄마는 아직 사태의 엄중성을 깨닫지 못한 듯 아버지를 휑하니 쳐다보았다.

“속히 오라는 정보니깐 생명이 위험하다는 게 아니겠소!”아버지는 량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엄마는 탁아소에 있는 딸애를 데리러 가면서 불길한 느낌에 가슴이 쿵쿵 뛰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엄마는 딸애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아버지와 함께 허둥지둥 길을 떠났다. 한번 가자면 뻐스를 타고 마차를 타고 또 산길을 퍼그나 걸어가야 하기에 엄마도 아버지를 만나 딱 한번 밖에 가지 못했다.

쟈피거우는 피나무 골짜기라고도 불리우는 깊은 산골이다. 아버지는 아홉살때 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남편을 잃고 얼마 안돼 두 아들이 또 전염병으로 련이어 죽는 바람에 절망한 할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큰시형에게 맡기고 이 깊은 피나무골에서 포수로 생계를 유지하는 분에게 재가하였다.

산골에서 아들 둘에 딸 셋을 낳은 할머니는 이렇게 아버지께 전보까지 치기는 처음이였다. 큰아버지 집에서 장가를 간 아버지는 불편한 교통도 그렇거니와 일찍 장가들다 보니 계부를 몇번 만나지도 못했다. 그들이 땀투성이 되여 도착하였을 때 이미 숨을 거둔 남편을 모셔놓고 할머니는 큰아들만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모든 일은 아버지가 처리하고 결정하셨다. 할머니의 구곡간장 녹이는 울음소리는 남편 없이 다섯 자식을 키울 막연함을 그대로 통곡으로, 넉두리로 쏟아내여 듣는 이들을 울렸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아버지는 휘청이며 바로 서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어마이, 제가 있는데 근심하지 말고 빨리 몸을 춰세웁소. 그리구 천천히 저한테 올 준비를 합소!”

가을, 겨울이 지나가도 쟈피거우에서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왠지 불안한 마음을 가실 길 없었다. 그렇다고 불쌍한 그들이 절대 못 온다고 모를 박으며 아버지를 설득할 용기는 더구나 없었다.

초봄이여서 바깥에 나가면 몸을 옹송거린다. 농사일은 시작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일찍 생산대 우사칸으로 나가고 엄마와 딸 영선언니가 집에 있었다. 한나절이 되여 바깥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에 엄마는 문을 열었다.

1974년 삼촌이 입대하면서 찍은 가족사진

올망졸망 보따리를 안고 여섯 식구가 엄마 앞에 나타났다. 이른 봄이라 누덕누덕 기운 옷들을 마구 꿍져입고 모두 먼 길을 오느라 새파랗게 입술이 질려있었다. 일곱살짜리 막내 고모는 부리나케 구들에 올라와 영선언니의 손을 잡았다. 중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었다는 년년생 삼촌 둘이 어색하게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간다. 할머니와 고모들이 자연스레 가마목에 쭈크리고 앉았다. 어정쩡해있던 엄마는 그제야 이불을 내리우고 덜덜 떨고 있는 그들을 덮어주며 말했다.

“날씨가 좀 따뜻해지면 남편이 모시러가겠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한손으로 머리를 쥐였다 내리쳤다 하면서 울상을 지었다.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머리가 아파 들 수가 없구만. 불시에 나까지 죽으면 얘들을 어쩌겠소. 큰거 밖에 믿을 데 없소!”

엄마는 더 말하지 않고 구들을 따뜻하게 덮히려고 부뚜막에 내려갔다. 뒤늦게야 달려온 아버지는 추운데 어떻게 왔냐고 할머니와 동생들을 붙들고 야단법석이였다. 며칠 후 소수레에 욕심날 것 없는 물건들이 한아름 도착하는 것으로 산골에서 벌방에로의 여섯 식구 이사는 끝났다.

할머니는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가마 덮개를 베고 누워있는 시간이 앉아있는 시간보다 더 길었다. 아버지는 어린 삼촌 둘을 데리고 생산대 일에 나갔고 어린 시누이들은 앓는 엄마 주위를 맴돌았다. 대가정의 살림은 엄마의 어깨에 고스란히 놓여졌다. 눈앞에 해결해야 할 제일 큰 문제는 아홉 식솔이 먹을 식량이였다. 없는 본가집에 가서 한때 먹을 쌀을 가져온 적도 있을 만큼 지지리도 가난하고 힘든 나날들이였다.

 

걱정도 많고 할일도 많은 맏며느리

슬픔도 많고 불평도 많은 맏며느리

싫다 싫다 멀리 도망쳐도

운명이라 하느냐

팔자라고 하느냐

달아 달아 밝은 달아 대답해다오

 

엄마는 휘영청 밝은 달이 뜨는 날이면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딸애만 잘 키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큰집의 맏며느리로 인생의 풍상고초를 겪을 대로 다 겪었다. / 전옥선(다음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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