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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83]졸업증에 깃든 사연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9-06 16:03:31 ] 클릭: [ ]

나의 책장 서랍에는 장장 30여년 고이 간직한 길림성당교에서 발급한 전문 대학 졸업증서가 있다. 너무 오래 되여 증서가위가 색바래지고 보풀이 일었지만 이 졸업증에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깃들어있다.

1953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과 더불어 조선족학교가 설립되였다는 기꺼운 소식이 편벽한 ‘용철골’ 마을에도 전해졌다.

 
가족과 함께 기념 사진 남긴 필자

놀라운 소식은 반평생 땅과 싸우면서 살아오던 나의 아버지의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여보, 아래 마을에 조선족학교가 섰다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려면 우리도 아마 이사를 해야 할 것 같구만.”

“령감두, 먹고 살기도 바쁜 세월에 터전을 버리고 어떻게 이사한단 말씀 임두. 되지도 않을 소리…”

“그렇다구 아이들마저 나처럼 눈 뜬 ‘소경’으로 만들 수는 없지 않소.”

옥신각신 쟁론 끝에 우리는 50여년 살아오던 정든 터전을 떠나 이도촌으로 이사갔고 나와 누나는 한해에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구차한 가정살림에 등잔 석유마저 살 돈이 없어 어두컴컴한 밥상에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우리가 숙제를 할 때면 아버지는 언제나 등잔불을 환하게 밝혀주시군 했다.

자기 글도 맘대로 읽지 못했던 일제의 통치아래 아버지는 문화가 없는 민족은 남의 천대를 받기 마련이다고 하면서 공부를 잘해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고 늘 타일러주셨다.

아버지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였지만 부모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공부에 힘썼다. 학급에서 첫 패로 소선대원에 가입했고 해마다 최우등 상장을 받았다. 편지를 줄줄 내리읽는 것을 보던 아버지는 이제야 자기의 소원을 풀었다고 기뻐하셨다.

1960년 소학교 4학년에 다닐 때였다. 3년 자연재해로 생활에서 큰 어려움이 있었다. 배불리 먹지 못하고 소처럼 일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앓아눕게 되였다.

그 당시 나는 살이 다 보이는 헐렁한 헌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는데 아이들에게 업신 당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분풀이를 무고한 엄마에게 해댔다.

“엄마, 아이들이 나를 비렁뱅이라고 놀려주꾸마”, “그렇더라도 학교에만은 가야 하지 않겠느냐?” 어머니는 투정을 부리는 나의 손목을 이끌고 학교까지 바래다주시군 하였다.

추운 겨울날, 먹을 것이 다 떨어지자 우리는 소 사료로 저장했던 콩깍지로 식품을 대신해 만들어 먹었다. 그것도 다 먹고 떨어져 나와 누나는 10여리도 넘는 팔가자림업국 림장 철조망을 뚫고 솔나무 껍질을 벗겨 우려먹었다.

앙상한 나무가지들도 고된 추위에 윙윙 소리 내여 울부짖던 어느 날 엄마는 허약한 몸을 지탱하며 우리가 살던 용철골로 갔다.

용철골은 아버지께서 골짜기를 개간했다 하여 사람들은 아버지의 이름 대로 ‘용철 골’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가을이 끝난 콩밭에서 흰눈을 쓸어버리고 하나하나 콩알을 주었는데 반나절 헤매서야 겨우 반사발을 주었다. 그 날 저녁 우리 식구는 콩장 국을 끓여놓고 처음 풍성한 음식을 먹었다.

의지가 그렇게 굳센 아버지는 어쩌다 끓여놓은 콩장 국물도 넘기지 못하고 눈물만 훔쳤다.

“내가 마지막까지 너희들의 뒤바라지를 다 할 것 같지 못하구나. 그러나 너희들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이듬해 봄 아버지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갔다.

아버지가 세상 뜬 후 나는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엄마를 도와 생산대 양몰이를 하였다. 배고프면 양젖으로 굶주림을 달랬고 겨울이면 양몸에 기대여 뼈를 에이는 듯한 추위를 막았다. 그 때 나의 나이가 13살 밖에 안되였다.

또래 아이들이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공부하고 싶어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엄마, 난 공부하고 싶어. 정말 공부하고 싶어 죽겠는데, 아버지는 어째서 그렇게 일찍 돌아갔습둥?”

엄마는 가련하게 울고 있는 나를 부등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봄에 햇나물이 나면 살만 하니 누나만 집일을 돕고 너는 중학교 시험을 쳐봐라”라고 했다.

엄마의 말씀에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자습했다.

중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은 나는 기음 매러 간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나는 엄마 뒤로 엄마의 두 어깨를 힘껏 안으며 “엄마—엄마— 내가 합격되였어요” 라고 소리질렀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엄마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엄마는 손에 쥐였던 호미를 내려놓고 나를 꼭 안아주시며 “장하다”고 칭찬해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보다 두살 우인 누나는 “중학생이 된 네가 어찌 맨발로 학교에 다니겠니?”라고 하며 자기가 신고 다니던 고무신을 벗어주었다. 홀쭉하게 여윈 누나의 두뺨으로 기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날 저녁 엄마는 국밥 한그릇을 다 들지 못하고 헌 옷자락으로 눈물을 찍으며 돌아가신 아버지의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가… 래일 아침 일찍 아버지에게 가봐야겠다.”라고 했다.

엄마는 허리가 구불도록 농사 지어 나를 공부시켰다. 엄마가 호미를 들고 새벽동이 뜰 때 골목길을 걸어 밭으로 나가는 모습을 창문 틈으로 시선을 던져 놓고는 미안함에 눈물을 떨구군 했다. 언제인가 달님을 맞으며 어머니가 일하시는 밭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

“여기는 왜 왔어? 배고플 테니 어서 집에 가서 밥이나 먹어”, “엄마를 도와주려고⋯”

“그게 무슨 소리냐, 조용히 니 공부나 할 것이지.” 엄마의 성화에 밭머리를 돌아서는 순간 휘여진 어머니의 등을 보며 ‘자식이 아니면 이토록 고생하지 않으셔도 될텐데…’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삶까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어머니의 인생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나는 그만 소리내여 한참 울었다. 아무런 내색도 없이 굳굳하게 살아오신 어머니께서 치마폭으로 흐르는 눈물을 감추는 것이였다.

“엄마, 내 옆에 엄마 있고 엄마 옆에 내가 있으니깐…”

“니 말이 옳다. 꽃중에도 제일 예쁜 꽃은 자식꽃인게다. 평생 자식꽃 하나면 있으면 만족이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 나는 전교 우수생으로 뽑혀 추천받아 화룡고중에 진학하게 되였다.

운수가 사나울 때는 ‘뒤로 넘어져도 코등을 깬다’고 때마침 그 해 6월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였다.

반란파들은 학생회 회장을 담임하면서 자본주의 길로 나아가는 직권파를 보호했다는 죄명을 나에게 들씌워 나는 ‘보황파’라는 죄인이 되였다.

“청산이 있는 한 땔나무 근심 말라”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길림성당교에서 대학생을 모집한다는 좋은 소식이 전해왔다.

대학 공부를 하지 못해 항상 안타까운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나다. 그런데 두 자식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룡정범람기공장이 파산되면서 안해마저 무직업자로 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돼요” 안해와 옥신각신 ‘다투’는 것을 보고 철부지 애들까지 엄마편을 들어주며 나를 응원해주었다.

엄마는 전에 모아두었던 돈을 내놓으며 “집 걱정은 하지 말고 네가 못한 공부를 마저 마치고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매일 퇴근 후와 휴일에 밤늦게까지 공부하였다. 열심히 자습한 보람으로 우수한 성적으로 당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안해의 뒤받침으로 모든 학과를 마치고 졸업하게 되였는데 그 때 벌써 40이 넘었다.

졸업증서를 발급받던 날, 졸업증을 안고 나서는데 뜻밖에도 두 아이들이 달려와 나에게 꽃묶음을 안겨주었다. “축하해요, 아버지!”

아이들의 뒤로 안해와 80고개를 넘은 어머니께서 지팡이를 짚고 학교대문 밖에서 묵묵히 나를 기다렸다.

안해는 두 아이의 손을 꼭 잡더니 졸업증을 머리 우로 들어올렸다. “이는 졸업증만이 아니라 우리 집 대물림 보물이란다. 너희들도 앞으로 아버지처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라고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하겠노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아이들도 대학을 나와 사회에 진출하고 나는 2009년에 정년퇴직했다.

그 후 나는 ‘나와 연변축구’(2015년)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는 등 영예를 안았다. 특히 2020년 제1회 대련조선족문학회 ‘영성컵’ 응모작품에서 내가 쓴 단편소설〈해란강은 변함없이 흐른다〉가 금상을 받는 영광을 지녔다.

/ 최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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