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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82] 내 기억 속 평생 두번 뿐인 아버지와의 만남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9-05 23:11:17 ] 클릭: [ ]

룡정 룡드레 우물가를 지날 때마다 내가 일곱살 되던 해인 1947년  룡정의과대학 병원에서 병치료를 하는 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있었던 일이 지금도 영화처럼 선명하게 머리 속에 떠오른다.

 필자 아버지

아버지는 항일전쟁승리 후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꾸려진 민주대동맹 조직에 가입하여 혁명사업을 하다 보니 늘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의 머리 속에는 평생 단 두번 아버지를 만난 기억 밖에 남지 않았다.  1947년 이른봄 아버지께서 페결핵에 걸려 병원치료를 하게 되였다. 돈이 없어 입원치료는 못하고 병원 가까이에 세집을 맡고 병치료를 다녔다. 그 세집이 바로 룡정 룡드레 우물가 버드나무곁의 일본식 2층짜리 판자집 1층에 있는 한칸이였다. 룡정의과대학 병원과는 100메터 거리였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이 그 집에 주숙하면서 병치료를 했다.

우리 집은 조양천 북쪽 구수하 건너편의 중흥촌에 있었고 룡정과는 30리 거리이다. 어머니는 열흘에 한번쯤 식량과 남새 가지러 집으로 다녔다. 집에는 회갑이 지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무를 돌보고 농사를 지었다. 청명이 지난 어느 따스한 봄날 어머니께서 쌀 가지러 집으로 왔는데 나는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 뵈러 가겠다고 생떼를 쓰니 어머니는 흔쾌히 승낙하였다.

“나도 쌀 짐을 지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자그마한 쌀 짐을 등에 지게 하고 길을 떠났다.

어머니는 큼직한 쌀자루를 등에 지고 머리에도 이였다. 그 때 우리 집은 연길현 14구(현재의 연길시 조양천진 구수하벌) 중흥촌 (현재의 중평촌)에 살았는데 구수하가 서쪽을 굽이쳐 흘렀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떠난 우리는 걸음을 재촉하였다. 30리 길을 쉬염쉬염 쉬면서 가자면 오후해가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런 길을 어머니는 오전에 왔다가 쉬지도 못하고 오후에 또 무거운 쌀짐을 가지고 떠났다.

 
필자 어머니
4월중순이라 강물은 뼈를 에이는 듯 차가왔다. 차디찬 강물을 오전에도 건넌 어머니는 한손에는 다 바래진 하얀색 헌 코고무신을 검정치마폭에 받쳐쥐고 한손으로는 머리 우의 쌀 짐을 쥐고 앞만 보며 말없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나는 발등도 가려지지 않는 벼짚신을 벗어들고 이를 사려물고 강물을 건넜다. 바지가랑이를 걷어올렸지만 키가 작아 다 젖었다. “물 속에 있는 돌들이 미끄러우니 주의하여 천천히 건느라”라고 어머니는 소리지르며 주의를 주었다.

조양천 시내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서산에서 기울어질 때였다. 이제 좀 지나면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난다고 생각하니 나는 새 힘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쌀 짐을 지고 헐떡이며 삼봉동 고개에 오르니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어머니와 나는 삼봉 고개 기차 길을 지나 휴식하였다. 저 멀리에서 숱한 전기불이 반짝반짝 거렸다. 어머니는 저기가 룡정 시내라고 하면서 “빨리 가자”며 일어섰다.

1935년 3월 12일에 찍은 가족 사진(필자 아버지 뒤줄 오른쪽 첫번째,필자 어머니 중간줄 오른쪽 세번째) 

삼봉 고개로부터는 내리막길이여서 자기도 모르게 걸음걸이가 빨라졌다. 마안툰(马安屯, 지금의 광신촌)을 지나면서 큰 신작로가 나타났고 길 량켠에 조선족 마을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기차 대교를 건널 때에는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5, 6메터 너머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따금씩 삐거덕하는 철교의 널판자소리가 들려올 뿐 사방은 괴괴했다. 어머니가 “지금 건너는 이 기차 다리가 ‘해란강 대교’”라고 알려주셨다.

룡정 시내에 들어서니 가로등이 훤히 흙길을 비추었다. 어머니는 수양버드나무 곁의 ‘룡드레 우물’을 보시며 “인제는 다 왔다”고 하면서 그 옆의 2층 판자집 아래층 문을 열었다. “여보, 아들 철이가 왔소!”하면서 소리치며 집안에 들어섰다. 나도 어머니 따라 집안에 들어서니 “아니, 철이라니? 셋째가 왔소?”하며 아버지가 병석에서 일어나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나의 몸을 어루어만지셨다. “철이 많이 컸구나. 그런데 이 발뒤축에 피는 어찌된 일이냐? 여보! 빨리 와서 이걸 보오. 발뒤축 껍질이 많이 벗겨져 피가 나는 구만.”하며 야단쳤다. 어머니는 쌀 짐을 내려놓고 달려와 보더니 “벼짚신에 긁히워 벗겨졌구나. 된장을 바르면 괜치않을거야.”라고 하며 상처를 싸매주었다. 어머니는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았다. 아버지는 소고기 반찬을 나에게 짚어주며 “오늘 철이 쌀 짐을 지고 오느라 수고했다.” 고 칭찬까지 해주셨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아버지의 칭찬에 아픔은 사라지고 그 어느 때보다 유쾌했다. 얼마나 바라던 아버지의 칭찬이였던가. 다른 집 애들이 자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돌이를 할 때면 나는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기분 좋게 저녁밥을 먹었다. 아마도 그렇게 보고 싶던 아버지를 만나니 심정이 좋았던 같았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내고 온돌에 앉더니 “여보, 철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제법 잘 춥니다.”라고 하며 “아버지 앞에서 한번 재간 피워봐라!”며 박수를 치니 아버지도 덩달아 박수를 쳤다. 나는 기분 좋게 제꺽 일어나 당시 마을 나그네들이 부르던 〈전투동원가〉를 힘차게 불렀다. “전투준비하자, 동북의 인민 4천만…”하고 노래하자 아버지는 “철이 정말 노래 실력이 대단하구나”며 크게 박수를 쳤다. 이번에는 양걸춤을 추었다. “양걸, 양걸, 뚤양걸 나무다리 챙챙 해방이로다…” 입으로 반주하면서 궁둥 방아를 찧으며 양걸춤을 신나게 추었다. 모두다 마을 분들이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철이 인제는 다 자랐구나.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추고 재간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하며 아버지는 누웠던 이불자리 밑에서 붉은색 지페 한장을 꺼내 나의 손에 쥐여주며 “래일 어머니와 함께 상점에 가서 검은색 고무신을 사 신어라”고 했다. 당시 나는 그 돈이 얼마인지 몰랐는데 후에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동북에서만 사용했던 동북 화페 만원짜리라 하였다. 나는 그 돈을 인차 어머니에게 드렸다. 아버지 병치료비도 부족하여 온 가족이 힘들어 하는 형편에서 새신을 살 생각도 안했다. 아버지께서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 새돈 한장이 얼마만한 가치인지는 몰라도 아버지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돈이고 내 평생 단 한번 뿐 받아 본 새 지페여서 나는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이튿날 아침 노래소리에 깨여나 밖으로 달려갔더니 룡드레 우물가의 큰길로 어깨에 장총을 멘 숱한 군인들이 네 줄 행렬을 지어 “썅첸, 썅첸, 썅첸…”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집으로 다시 들어와 아버지에게 물으니 우리 나라 군대—중국인민해방군이라고 알려주셨다. 그 때 수백명 군대가 일제히 발을 맞추어 씩씩하게 노래하며 행진하던 모습이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메아리쳤다.

그날 아침을 먹고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같이 병원에 갔다오시더니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룡드레 우물가에 가서 룡드레 우물의 래력과 룡정지명 관계를 상세히 설명했다.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몸소 나를 데리고 룡드레 우물가를 거닐 던 그 때 그 시절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다. 그 후 아버지는 병이 악화되여 고생하시다가 결국 1947년 겨울 40세도 안되여 사망하고 말았다.

아버지와의 인연은 너무도 짧고 비참하였다. 다시는 ‘아버지’라 부를 수 없어 마음이 너무 쓰렸다.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10여일간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한껏 받았다. 아버지와 같이 린근의 상점에 가서 개눈깔 사탕도 사 먹어봤고 닭똥과자도 먹어봤다. 어머니에게서 받아보지 못한 향수였다. 어머니는 그 일을 알고 돈을 망탕 쓴다고 아버지를 나무람했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치료만 생각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때 어린 나이인 데도 그런 눈치는 챘다. 그래서 “가난한 집 애들이 일찍 셈이 든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세를 맡고 있었던 집의 바깥벽은 몽땅 널판자로 되였고 집안에는 박우물도 있었다. 물이 아주 맑고 물 맛이 좋아 그 집 주인은 약수라고 자랑하였다. 그러던 그 집이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룡드레 우물가를 확장하면서 정부에서 허물어버렸다. 다행이 수양버들나무만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그 번 만남에서 나는 아버지와 더욱 친숙해졌고 아버지의 고매한 성품을 알게 되였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오늘까지도 내 마음속에 아버지를 모실 수 있게 되였다.

“철이야, 너는 앞으로 공부를 잘하여 꼭 나라에 쓸모 있는 훌륭한 인재가 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마디마디의 부탁은 내 인생의 등불로 되여 지금까지 나의 앞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아버지는 아주 멋진 사나이였다. 키 큰 미남이였다. 진한 눈섶에 이글거리는 쌍까풀눈은 아주 매혹적이였다. 그런 체격에 연설 할 때면 강물이 흐르는듯 류창하여 듣는 사람마다 감탄했다. 나의 기억 속에 처음 아버지를 만나 뵜을 때는  내가 여섯 살 되던해의 어느 가을의 구정부 마당이였다.  백성들이 연길현 14구 구정부 마당에 모였다. 사람들이 횡도촌 새장거리를 꽉 메워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분이 있었는 데 나의 아버지라 했다. 그 때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고 인차 나한테로 와서 어깨에 가로 메였던 가죽가방에서 질감이 좋은 종이(일본제 위생종이)를 꺼내여 내 코를 닦아주시며 “너는 왜 항상 코가 많니? 떨어지면 발등이 깨지겠다.”고 나무람했다. 나도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인지 중학교 웅변대회 때 웅변을 잘해 상으로 붉은 수첩을 탄적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돌이를 하는 애들을 볼 적마다 부러움에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특별했고 동년시절 아버지를 딱 두번 만났던 그 기억은 세월이 흘렀어도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80고개 나이에 나의 손을 잡아주셨던 아버지의 그 따뜻한 손은 난류와 더불어 지금까지 내 마음을 덮혀주고 있다. 아버지의 인생은 37세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나에게 남겨주신 아버지의 거룩한 형상은 지금 이 시각에도 내 눈앞에서 또렷이 남아 있다.

그립고 보고 싶은 나의 아버지, 80고개를 넘어서고 있는 이 셋째아들이 마지막으로 한번 더 불러봅니다, 아버지! / 김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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