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수기 79] 사랑의 품속에서 피여난 네 자매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7-12 13:32:41 ] 클릭: [ ]

나는 노래교실에서 배운 노래 〈나는 해바라기〉를 즐겨 부른다.

이 노래는 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멜로디이다. 위대한 중국공산당은 눈부시는 해님이고 내가 살고 있는 대지는 사랑스러운 나의 조국, 나는 해님 따르는 해바라기다.

 
우리 네 자매 (오른쪽 세번째 필자)
 

해님은 우리 엄마와 우리 네 자매를 따사로이 품고 해바라기처럼 곱게 자라도록 비추어주었다.

1947년 정월, 엄마는 35살의 한창 나이에 네 딸을 가진 홀 엄마로 되였다. 당시 큰언니는 12살,셋째인 나는 5살,초롱초롱 쳐다보는 우리 네쌍의 눈동자를 지켜보면서 엄마는 혼자몸으로 아버지가 다루던 논을 땀과 눈물로 적시며 우리 자매들을 키웠다.

1949년 1월,큰언니가 삼도구 소학교를 졸업하면서 삼도구촌 40명 졸업생중 겨우 몇명만 붙은 왕청중학교 학생중의 한명으로 되였다.

엄마를 도와 가정살림을 해야 하는 언니였다.

담임교원이며 학교 지도자들까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렇게 성적이 우수한 아이를 꼭 공부시켜야 합니다”. 엄마는 난감하여 눈물만 흘렸다. 교장 선생님은 생활 형편 때문에 보내지 못하겠다면 교원들을 동원하여 도와주겠다고까지 했다.

엄마는 련며칠 고민하다가 끝내 학교를 찾아갔다.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엄마였지만 사랑으로 넘치는 마디마디의 배려의 말에 엄마는 자식 전도를 생각하여 끝끝내 교장과 선생님들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엄마는 토지개혁 때 분배받은 팔간집을 팔아 두칸집으로 바꾸고 우선 큰딸부터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당시 왕청중학교엔 기숙사도 없는 상황이여서 로부부가 살고 있는 집에 매달 좁쌀 5말씩 주기로 하고 하숙집을 정했다.

추운 겨울날, 200근씩 좁쌀 두 마대를 왕청 하숙집에 보내고 나서 일년 시름은 덜었다고 만족스레 환하게 웃으시던 엄마의 얼굴이 70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이 떠오른다.

아버지가 세상 뜨신 그 해 겨울, 엄마는 집에서 제일 좋은 이불 한채를 뜯어 손물레로 실을 뽑았다. 언니들도 저녁이면 손 돌림으로 실을 탈아내여 우리들의 속내의를 떴다.

1949년 10월 1일,전 중국이 기쁨에 들끓었던 날,우리 마을의 역 앞에 로천무대가 아담하게 꾸려져있었다. 경축행사가 치러진다고 했다.

엄마는 낮이면 고된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겨릅등 아래에서 갈라터진 손끝에 물을 발라가며 하나 밖에 없는 엄마의 나들이 치마를 뜯어 유치원생인 나와 동생의 옷을 지어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혀 쌍둥이처럼 내보냈다.

천꾸레미 속에서 자투리를 골라 활짝 핀 붉은 꽃송이까지 만들어 저고리섶에 달아주었다.

새옷 단장으로 경축대회 무대에 올라 나와 동생은 나풀춤을 추었고 동생은 독창까지 했다. 대회가 끝나자 엄마는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며 우리 두 자매를 한품에 꼭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뼈를 갈아서라도 우리들을 공부시켜 사회에 유용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하려는 일념 뿐이였다. 자식들이 잘되는 것만이 자신의 가장 큰 보람과 행복이란다.

1951년. 둘째 언니가 소학교를 졸업하게 되였다. 언니는 공부는 물론 덕재가 겸비한 우수 학생간부였다. 구사능력이 좋아 팔을 저어가며 이야기를 하면 듣는 사람마다 엄지를 내들었다. 그 년대에 농촌 녀자 홀몸으로 중학생 둘씩 섬긴다는 건 너무도 벅찬 일이였다. 그 시기 삼도구촌 학생은 석현중학에 가야 했는데 그 학교에는 장학금(助学金) 제도가 없었다. 학교와 촌 지도부에서는 우리 가정 형편을 헤아려 석현과 왕청을 오가며 소통한 결과 둘째 언니도 왕청중학교에 가 큰언니와 함께 매달 7원의 장학금을 받도록 배려하여주었다.

1952년 여름방학,둘째 언니는 하령영(夏令营)에 참가하면서 전국 로동모범 김시룡동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은《연변일보》 1면에 게재되는 영광까지 지니게 되였다.

사진 찍기도 귀하던 그 년대 엄마는 그 신문사진을 바람벽에 붙여놓고 짬만 있으면 자랑스레 쳐다보군 했다. 언니는 달마다 주는 장학금을 아껴쓰면서 방학에 집에 올 때면 동생들의 필통, 필기장이며 생전 처음 먹어보는 개눈깔 사탕까지 사다주었고 때론 엄마에게 풋돈까지 드렸다.

엄마는 호조조,고급사,인민공사 사원으로 부지런히 일하며 네 딸이 모두 공부할 수 있게 떠밀어주었다. 엄마는 당의 좋은 시책을 만나 고진감래라며 당과 모주석께 더없이 감사해했다.

1954년 큰언니는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인민교사로 되였고 공산당원이란 신분을 잊지 않고 평생을 교육사업에 몸 바쳤다.

1958년 늦가을,우리들의 기둥이였던 엄마가 46세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 그 해 7월, 동생이 또 왕청중학교에 추천되였고 나와 함께 중학교에서 숙사생활을 하게 되였다. 당시 엄마가 너무 그리워 눈물로 책을 적신적이 얼마인지 모른다.

엄마는 떠나갔지만 당의 품은 겨울날의 따뜻한 이불처럼 우리를 감싸안았다. 학생이 천명도 넘는 왕청중학교에서 동생과 나는 1등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선생님과 동학들,사회의 선량한 사람들의 사랑의 손길 속에서 우리는 무난히 학업을 마치게 되였다.

1962년 교육국에서는 고중을 졸업한 나를 왕청현 복흥농장 교원으로 배치했다. 당의 혜택으로 공부해온 나인지라 시골임에도 불구하고 달갑게 이불짐을 메고 찾아갔다.

1962년 9월 8일 새벽,나는 공소사 상품을 만재한 농장 트럭에 앉아 현성에서 180리 떨어지고 전기도 뻐스도 없는 국가 편제 교원이 한명도 없는 편벽한 산골학교에 갔다. 거기에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디였다.

벽돌집 한채 없는 고장,학교란 구락부에 미닫이 간벽을 한 교실이고 내가 맡은 2, 4학년 복식반은 학생이 30명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애들의 부모들은 청춘의 정열로 들끓는 군체였다.

1956년 그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의 호소에 따라 ‘청년개간대’란 붉은 기발을 날리며 연길, 룡정에서 달려온 열혈청년들이였다. 주당위에서는 온통 부식토인 이곳을 연변 농업기계화 실험농장으로 정하였는데 당시에 적지 않은 쏘련제 농업기계들이 있었다.

같은 꿈을 안고 시골마을에 모인 우리들은 인츰 친숙해졌다. 나와 한 침실에 있는 강선생은 1,3학년 복식 담임교원으로, 또 농장 공청단지부 서기도 겸하였다. 낮에는 교원이고 밤에는 공청단 간부로 여러가지 행사에 눈코 뜰 새 없이 다망했다. 거기에다 통학하기 힘든 두 남학생을 우리 침실에 두고 함께 있으면서 부모마냥 돌보고 있었다.

그 때 잠결에 내 자리까지 굴러와 실수까지 했던 작은 애가 커서 농장장으로,복흥향 향장,왕청현 부현장,연변조선족자치주장애자협회 회장까지 발탁되였다. 이 같이 우리는 개천에서 ‘룡’을 키워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나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도록 학생들을 육성했다.

따라서 나는 선후 길림성 농업개간계통 우수교사, 주급 우수교사의 영예를 안게 되였다.

1976년 12월 6일, 나와 남편은 진붉은 당기 아래서 두주먹을 불끈 쥐고 선서했다. 우리는 중국공산당의 일원으로 되였다. 농업기계학교를 졸업하고 이 농장에 뿌리 내린 남편도 농업기계화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1984년 우리 부부는 룡정시에 전근하게 되였다. 나는 주급 우수 교원답게 교육사업에 사랑을 담으며 정년퇴직을 맞이했다.

둘째 언니는 무순시 료녕 발전소의 의사로,동생은 우수 공산당원이라는 본색을 잊지 않고 심해발전소 회계사로 활약하며 열심히 일했다.

당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우리 네 자매는 중화의 행운아로 당의 배려를 잊지 않고 해님 따르는 해바라기로 피여나 저마다 보람찬 인생을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

/ 김옥자

0

관련기사 :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