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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76] ‘닭으덩때’  마을과 리지서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6-24 15:34:41 ] 클릭: [ ]

내가 다섯살 나던 1959년 가을, 교육사업에 종사하시는 아버지께서 목단강 시교 동쪽 골안에 위치해있다고 동고(东沟)라는 이름 외에도 ‘닭으덩때’란 별명을 가진 마을(목단강시 동춘향 동승촌)의 소학교 교도 주임으로 부임되면서 오빠와 나 우리 네 식구는 ‘닭으덩때’ 마을에 이주하게 되였다.

 필자 김성옥

내가 철이 들어서야 알았는데 동고 마을이 ‘닭으덩때’란 별명을 가지게 된 것은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이 장마철에 인정사정 없는 산골물 재난을 피하여 일부러 강에서 약 150메터 높이에 있는 돌바위 꼭대기에 마을을 앉혀서였던 것이다.

이런 연고로 우리 마을은 장마철에 험한 산골물이 들이닥쳐도 아무런 걱정없이 높은 곳에서 구경만 했다. 허나 무슨 일이나 우점과 결점이 있듯이 훙수피해가 없는 대신에 마시는 물이 큰 문제였다. 돌바위에 깊은 우물을 팔 수 없어 겨울에는 강의 얼음을 깨고 물지게를 지고 미끄러운 언덕길을 올라가야 했다. 중간에 쉬고 가려면 물통의 물이 반은 쏟아진다. 암튼 물지게를 지면 단숨에 쭉 올라가야 했다. 그러니 녀성이나 애들은 아예 물지게를 지고 나서지 못한다.

이렇게 겨울에는 어른들이 긷는 강물을 마셨고 여름이면 삽으로 강 옆에다 자그마한 구덩이를 파서 그 둘레에 돌을 쌓아놓고 바닥에 하얀 차돌을 펴놓으면 돌 틈새로 나오는 물이 퍽 깨끗해서 그 물을 길어마셨다. 우리 50년대 태생인 10살짜리 꼬마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의례해야 할 의무로 간주하고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책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언덕 물부터 길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원래 시내에서 수도물을 마시던 우리 가족이지만 나 역시 그 언덕 물을 긷는 행렬에 들어섰다. 매일 집의 물독을 채우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바가지로 자그마한 대야에다 강역 우물을 퍼담아 머리 우에 똬리를 놓은 후 다른 사람이 머리 우에 대야를 올려주면 언덕에 있는 집까지 올라간다. 집에는 대야를 받을 사람이 없었다. 마침 나의 키가 물독 높이와 비슷하여 두손으로 대야를 꼭 잡고 머리만 숙이면 대야의 물이 물독에 부어졌다. 어떤 때는 강물이 줄어들면 우물의 물도 같이 적어진다. 작은 공기로 반도 안되는 물을 대야에 퍼담느라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몇번을 오르내려야 물독을 채울 수 있었다.

 언덕 물 이고 다녔던 학우들과 함께 있는 어린 시절의 필자(앞줄 오른쪽 네번째 필자)

나는 목이 짧고 키도 별로 크지 않다. 아마 그 때 언덕 물을 너무 많이 이고 다녀서 그렇지 않냐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렇게 물 가난에 쪼들리던 우리 마을이 지난 세기 60년대말 리동앙이 우리 마을의 서기로 부임되면서 마을에 큰 변화가 생겼다. 리지서(李支书,우리 마을에서는 리서기를 리지서라 불렀음)가 주도로 수도물 건설공사를 벌였는데 전체 촌민이 함께 노력한 결과 우리는 수도물을 마시게 되였다. 언덕 물에서 수도물의 대전환이였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도물 건설 공사를 벌이던 나날들을 잊을 수 없고 그 속에 담긴 리지서의 노력과 촌민들이 단합하여 밤낮으로 악전고투하던 전경이 눈에 삼삼하다.

우리 마을의 리지서 리동앙(오른쪽 첫번째) 

나 역시 리지서님을 비롯한 어르신님들의 관심과 교육을 받으며 이들의 정신에 감동되고 그들을 따라 배우며 성장했으며 옳바른 인생길에 올라 나의 꿈을 펼치게 되였다. 잊을 래야 잊을 수 없는 ‘닭으덩때’ 마을과 리지서님이다.

수도물 공사를 벌이는 데 우선 강가에 큰 우물을 파고 전기모터를 안장해야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는데 문제는 돌바위 꼭대기의 130여호 되는 가구에 호수관을 련결시키는 일이다. 2메터 깊이의 구덩이를 파야 했다. 리지서는 공사를 제때에 완성하기 위해 낮에는 대외 련락을 하느라 뛰여다니며 정상 업무를 보고 밤에는 구덩이에 불을 달아 언 땅을 녹이는 일을 했다. 낮에 먼저 곡괭이로 구덩이 ‘딱지’를 떼 낸 후 정미소의 왕겨와 탈곡장의 북데기를 가져다 불을 짚혀 온밤 시뻘건 불덩이로 언 땅을 천천히 녹였다. 이튿날 녀성들이 삽으로 쉽게 척척 파낼 수 있게 말이다. 이렇게 불을 달아서 땅이 녹아 빨리 일을 추진 할 수 있는 우점이 있었다. 그러나 화재위험이 뒤따라서 고도의 경각성을 높이지 않으면 안되였다. 말그대로 가구마다 설치해야 하는 수도관인 만큼 집집이 불구덩이가 있는 데다가 농촌이라 집마다 나무가리를 빼곡이 쌓여놓은 터였다. 언제 어느 사이 불꽃이 튀여나와 불벼락을 안길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일이였다. 리지서는 안전교육을 첫자리에 놓고 믿음성 있고 신체가 좋은 보초군을 정해놓고 일분일초도 자리를 뜨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자기가 직접 령하 30도를 웃도는 추위도 마다하지 않고 틈만 나면 현장을 지키며 사업을 틀어쥔 데서 계획대로 이듬해 봄에 집집마다 수도물을 마시게 했다.

‘닭으덩때’ 마을과 리지서님, 빠른 것이 세월이라고 철없이 언덕 물을 이고 다니던 때가 벌써 50여년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정든 ‘닭으덩때’ 마을이 그립다.

언젠가는 꼭 시간을 내여 나에게 인생의 아름다운 꿈과 ‘폭풍우 속’에서 훨훨 날아가도록 날개를 달아주신 리지서님의 묘지를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려한다.

/ 김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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