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수기 73]잊을 수 없는 연변려명농민대학의 전임 교장 김철훈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4-18 16:32:16 ] 클릭: [ ]

연변려명농민대학이 2011년 2월 아쉽게 페교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연변려명농민대학이 걸어온 50여성상에는 ‘우리 나라 첫 농민대학’이라는 면에서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였으며 많은 인재들을 육성하여 나라와 사회에 수송하여 중임을 떠메도록 했다.

 70대 초반의 김철훈 교장

학교가 걸어온 반세기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고 눈물겨운 사연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학교 경영을 위해 가장 애쓰고 가장 화려하게 학교를 꾸린 ‘민족교육발전의 공신’을 연변려명농민대학 전임 교장 김철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변려명농민대학은 연변의 첫 초급 농업사 주임인 김시룡이 1958년에 설립한 우리 나라의 첫 농민대학이다. 학교는 농학, 축목, 특산 등 학과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 농촌 사회주의건설에 수요되는 인재를 양성하였다.

당시 모주석께서는 연변려명농민대학이 설립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주 반가와하시며 “우리 조선족이 중국의 첫 농민대학을 꾸렸습니다.”라고 칭찬하시였다. 이 소식은 당시 연변 조선족 인민들의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하였고 기개를 북돋아주었다. 그런데 20여년이 지나 생각치 않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개혁개방을 실시하자 농업기술을 배우고 농업에 종사하려는 학생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학생수가 날로 줄어들면서 수백명에서 나중에는 전교 학생수가 40명도 안되였다.

당시 교장으로 부임된 지 얼마 안되는 김철훈은 매우 안타까와하며 마음이 급해났고 고민이 많았다.

학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은 학과 개혁인데 급히 수요되는 영어, 컴퓨터학과만 설치하려 해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어떻게 자금을 구할 것인가?” 김교장은 마음이 안달아났다. 당시 빚구덩이에 빠진 학교는 매일 빚 독촉이 빗발쳤다. 해마다 국가와 지방 정부에서 조달하는 자금으로는 학교운영 경비가 부족하다 보니 학교 빚이 태산처럼 높아만 졌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아니면 운이 좋았는지 우연하게도 한국계 오스트랄리아인 최성원교수를 만나게 되였다.

 
1997년 9월 5일 최성원교수와 학교청사 남쪽에서(왼쪽 김철훈 교장)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통전부 리장섭 주임이 연변에 처음 온 한국계 오스트랄리아인 최성원교수에게 연변려명농민대학 김철훈 교장을 소개하였던 것이다. 최성원교수는 김철훈 교장의 손을 잡고 “참, 위대한 사업을 합니다. 중국에서 유일한 농민대학이라니? 그것도 우리 조선족들이 꾸렸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내 마음이 다 감개무량합니다. 그런 학교 교장이라니 위대합니다.” 라고 하며 칭찬에 칭찬을 가하면서 매우 흥분해하였다.

김교장은 “과분한 칭찬입니다. 그런데 시대가 변하니 학교 꾸리기도 힘듭니다. 농학, 축목, 특산 기술을 배우려는 학생수가 대폭 줄어들고 사회에서는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려는 청년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학교에서 그런 학과를 새로 설치하려면 막강한 자금이 수요되는데 우리 학교에는 그런 자금이 없고 또 주정부 재정에도 그런 항목에 지불할 자금이 없습니다. 총적으로 우리 나라는 아직까지 빈곤합니다. 이대로 계속되면 우리 학교는 페교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학교는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참 답답합니다.”라고 속심을 숨기지 않았다.

김철훈 교장의 답답한 속사정에 최성원교수는 “잘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그리 큰돈이 없지만 명년 봄에 재력이 막강한 분을 모시고 오겠으니 신설하는 학과와 수요되는 자금을 잘 계산하여 두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떠나갔다. 떠날 때 최성원교수는 김철훈 교장의 손을 굳게 잡고 “내가 꼭 오겠으니 몇달만 기다려주십시오.”고 했다. 때는 11월 중순이라 초겨울의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며 쌀쌀했다. 그러나 “명년 봄에 내가 꼭 오겠으니 기다려주십시오.” 고 말한 최성원교수의 의미심장한 말은 난류처럼 김철훈 교장의 온몸에 퍼지며 그의 가슴을 후덥게 했다. 김철훈 교장은 최성원교수의 믿음직한 말에 탄복하며 명년 봄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김철훈 교장이 기다리는 그 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고 길었다. 몇개월이 마치 몇년을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1986년 8월 10일 중앙 선전부 령도들과 함께 (왼쪽으로부터 네번째 김철훈 교장)

기다리고 기다리던 최성원교수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이듬해 3월에 한국에 있는 실력이 막강한 한경수박사님을 모시고 왔다. “연변려명농민대학을 구하기 위해 최교수님은 오스트랄리아에 있는 자기 집 일을 만사 제쳐놓고 자기를 기다릴 김교장님을 생각하며 매일 분주히 보내며 나를 재촉하여왔습니다.”며 한경수박사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연변려명농민대학을 돌아본 한경수박사는 “어지간하면 도와주려 했는데 한강에 물 붓기구만.”하고 떠나면서 만딸라를 주고 가버렸다. 그렇지만 김철훈 교장은 대단히 기뻤다. 신경을 건드리는 한경수박사의 그 푸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돈으로 꼭 새로운 학과를 증설하리라 결심하였다. 당시 만딸라는 인민페로 8만원이 넘는 돈이였다. 김교장은 그 돈으로 먼저 영어학과를 설치하고 당시 우리 나라에서 최고급 설비를 갖추고 더불어 학생모집을 하고 한편으로는 한국으로부터 영어교원을 초빙하였다. 학생과 선생이 있으니 수업이 시작되고 연변려명농민대학은 생기가 넘쳐흘렀다.

최교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들은 한경수박사는 믿기 어렵다며 연변려명농민대학을 다시 찾았다. “한국에서는 근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했구만. 김교장이 대단한 큰일을 했소.”하면서 김교장을 칭찬하며 그 자리에서 컴퓨터학과 설치에 쓰라며 또 만딸라를 김교장 손에 쥐여주었다. 그외에도 한국에 직접 전화하여 3만 3천딸라를 부치게 하였다. 그리고 김교장은 서울 염광학원 김정렬교수와 련계하여 만딸라를 지원받았다. 김교장은 그 돈으로 90대의 컴퓨터를 사서 일류의 설비로 3개 반을 모집하였다. 당시 이 소식은 전 연변을 놀래웠으며 해외에까지 알려지면서 김철훈 교장의 실속 있는 사업태도와 능력에 탐복하면서 여기저기에서 자금 후원을 하였고 김교장을 한국에까지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김철훈 교장은 한국에서 많은 지명 인사들을 알게 되였고 한국으로 왕복하면서 인민페로 300여만원의 자금을 후원받아 연변려명농민대학은 연변 뿐만 아니라 전성 고등교육계를 놀래웠고 그 명성이 자자했다.

김철훈 교장은 또 사회의 수요에 따라 유사반(幼师班)을 증설하고 유치원교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실습용 유치원까지 세우고 유치원 어린이까지 모집하였다. 유사반 학생들에게는 인당 손풍금 하나씩 사주고 손풍금 연주법을 배우게 하였으며 유치원 어린이들이 오고 가는데 편리하도록 유치원 전용 뻐스도 사주었다. 학교 교직원들도 출퇴근하도록 전용 뻐스와 승용차를 사놓았으며 교직원용 컴퓨터까지 사주었다. 몇년 사이 연변려명농민대학은 일류 설비를 갖춘 명실공의 대학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김철훈 교장은 최성원교수 등 여러 나라의 10여명 교수, 인사들을 동원하여 100만원에 달하는 자금을 후원받아 연변려명농민대학과 룡정, 연길의 10여개 소학교의 100여명 빈곤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발급하여 사회의 열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학교 일 때문에 김철훈 교장은 한국으로 자주 드나들게 되였고 많은 후원금을 받았지만 언제 한번 망탕 쓴 일이 없었고 항상 검소하게 다녔으며 경비를 절약하기에 애썼다. 수행인원들은 김교장이 너무나 경비를 아낀다면서 “깍쟁이 교장”이라고까지 불렀다. 그렇지만 학교 일에는 과감하게 ‘큰손’ 투자를 했다. 그렇게 김교장은 매사 처리에서 철두철미하였다.

김철훈 교장은 1940년 10월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나 어렵게 소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20세기 60년대초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농학원 축목학과를 졸업했다. 졸업전인 1963년 5월 3일 《길림일보》 4면에 〈우수공청단원 김철훈 사적〉이 소개되기도 했다. 김철훈 교장은 연변농학원을 졸업한 후 사회에 진출하여 맡은바 사업을 충실히 완성하여 일찍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83년 연변려명농민대학에 전근하기전까지 룡정시 태양공사에서 수년간 당위서기를 맡았는데 항상 농민들 속에 심입하여 그들과 같이 일하면서 논두렁 토론을 했는데 농업발전을 위한 보귀한 의견들을 청취했으며 태양공사의 락후한 면모를 개변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70년대말 《연변일보》에 〈당위서기의 모범〉이란 제목으로 그의 사적을 널리 알려 많은 군중들의 절찬을 받은 적도 있었다.

21세기초에 정년퇴직한 김철훈 교장은 쉴 념을 하지 않고 인차 연변자연농업연구소를 꾸리고 당시 농촌에 수요되는 유기농법 기술인재와 유기 돼지사육 기술인재를 양성해 농민들의 수입 증대에 한몫 했다.

 
2018년 3월, 79세 고령에 암치료를 받으면서 양계 전문호를 찾아 기술지도를 하는 김철훈 교장

특히 구린내를 없애는 유기 돼지사육과 유기 양계 기술은 전국에 알려졌고 적지 않은 지역에 보급되였는데 김철훈 교장은 직접 전문호를 다니며 기술지도를 해주어 많은 사육 전문호들의 기술난제를 제때에 해결해주었다. 특히 유기 돼지사육 기술은 전국의 높은 관심을 자아냈으며 중앙군위 후근부의 높은 중시를 받았다. 김철훈 교장은 70세가 넘자 연구소 소장에서 물러나 고문으로 있으면서 연길, 룡정, 화룡, 도문, 왕청, 훈춘 등 현시의 시골을 누비며 연변의 양식업 전문호들을 찾아다니며 적시적으로 기술지도를 하여 수백만원의 경제 손실을 피면하게 했다.

무리하게 뛰여다녀서 그런지 김철훈은 70대 중반에 간암에 걸려 네번이나 상해에 가서 수술하였다. 병과 싸우는 기간에도 그 어느 사육 전문호에서 기술지도를 부탁하면 서슴없이 알려주고 전화로 해결할 수 없으면 직접 현지에 가서 사료 배합부터 질병예방과 치료에 이르기까지 세심하게 기술지도를 했다. 그리고 고향마을 연길시 조양천진 중평촌 제7 촌민소조에서 토지 보상비 30만원을 떼울 위기에 직면하였을 때도 김철훈 교장은 자진하여 나서서 룡정시법원과 연변조선족자치주법원을 오가며 공정한 처리를 받고 고향마을에 돌려주었다.

2020년 5월 10일 오전 10시, 김철훈 교장은 심장박동을 멈추고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떠나기전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가 죽은 후 절대로 추도 모임을 하지 말라”는 것이였다. 김철훈 교장은 인간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회와 타인의 안녕을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망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울리였다. 당시 연변의 코로나19 발생상황은 좀 호전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준엄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소식을 접하고 마스크를 끼고 연길경도릉원을 찾아 유체 고별식과 추모 활동에 참가하여 애도를 표했다.

김철훈 교장은 생전에 당의 사업에 충직하였으며 맡은바 사업을 출중히 완성하여 해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와 주정부로부터 우수당원, 선진공작자로 표창받았다.

그는 유기농법과 유기 돼지사육, 유기 양계와 관련한 수십편의 론문을 발표해 사회 각계의 커다란 반향과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김철훈 교장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기고 간 그의 업적과 형상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높이 기리고 있다.

/김삼철

0

관련기사 :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