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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65] 내 마음속의 영원한 두 글자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2-05 15:54:38 ] 클릭: [ ]

 

친구와 함께 취재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좌)

매번 라지오나 텔레비죤에서 울려나오는 〈공산당이 없다면 새 중국이 없다네〉를 들을 때마다 나는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일사천리로 내달리는 조국의 새 변화와 더불어 년륜에 새겨진 잊을 수 없는 50여년 당령 생활이 새록새록 머리 속에 떠오른다.

1965년 8월, 나는 흑룡강 동녕현조선족중학교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게 되였다. 그 때 마침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한창이여서 공작대들이 매일 저녁 사원대회를 소집하고 형세 교육을 진행하는 한편 간부들의 문제를 적발하라고 동원할 때였다. 전 대대치고 고중 졸업생은 나 혼자 뿐이여서 공작대들은 나에게 신문 독보, 흑판보 꾸리기, 서류 정리 등 구체적인 사업을 맡겼고 두달도 안되여 대대단지부서기 업무를 나에게 맡겼다. 그해 내 나이 스무살, 치기와 야망으로 차넘치던 때인지라 나는 청년들을 조직하여 사원들에게 혁명가요를 배워주고 ‘훌륭한 사람 되기, 좋은 일 하기’활동도 조직하였으며 곤난한 일이 있거나 큰일이 있을 때마다 청년들이 앞장에 서서 사원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 해 10월말에 공사에서 문예경연대회를 열게 되였는데 내가 감독을 맡은 종목 〈혁명렬사 추모〉시랑송은 내용과 표현형식이 독특하여 단연 1등상을 받았다. 그후 어느 날, 로당원 박동혁이 나를 찾아 담화하면서 “삼민이, 제는 젊고 문화도 있으니 입당하오. 나와 김규범이 소개인으로 나서겠소.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조직이기에 절대로 개인 리득을 챙기려고 입당해서는 안되오.”라고 말했다. 나는 사회 경험이 부족하기에 아직 입당 조건이 안된다고 했다. 입당 후 1년 예비 고험를 거쳐야만 정식 당원이 된다는 말을 듣고 힘써보겠다고 대답했다. 귀향 4개월 후 나는 영광스럽게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그 이듬해에 정식 당원으로 비준 받았다.

‘충성’과 ‘진실’ 은 당령 50여년 되는 나의 인생 좌우명이다. 입당 후, 나는 밀산 사회주의공작대, 동녕현조선족중학교 교원, 삼차구 조선족향 당위선전위원으로 사업하면서 어느 때, 어디서나 ‘당원’이란 두 글자를 가슴에 새기고 만강의 열정으로 조직에서 맡겨준 모든 임무를 완수하는 한편 집체와 개인, 가정과 사회, 개인 리익과 나라 법규 앞에서 준엄한 시련을 이겨냈다. 그 많은 시련 앞에서 두 가지 일은 잊을 수 없는 사연이다.

1968년 8월, 생산대장이 신체가 허약한 나를 보살펴 소대 채소장에 가서 일하라고 했다. 채소지 책임자 최복보는 내가 당원이고 문화가 있으니 파, 오이, 배추, 가지 등 여러가지 채소를 파는 경제관리 임무를 맡겼다. 거리 중심에 자리 잡은 매대에서 채소 파는 일을 관리하고 매일 들어오는 수백원의 수입을 지체 없이 소대 회계한테 가져갔다.

어느 날 점심 때, 내가 한창 돈을 정리하고 있는데 일곱살난 조카가 나의 손목을 잡고 “삼춘, 나 삥궐 (얼음과자)먹고 싶어. 5전만 줄래? ”라고 했다. 형수님도 바라는 마음으로 한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을 슬쩍 감고 5전이 아니라 50전도 줄 수 있었지만 나의 손이 떨리였다. ‘돈 5전이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건 집체돈이 아닌가. 안된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 나는 “용희야, 이리 오너라. 저기로 가보자”고 하면서 조카를 데리고 닭우리로 들어갔다. 마침 금방 낳은 닭알이 있기에 그 닭알을 조카에게 쥐여주면서 얼음과자를 사먹으라고 했다.

1994년 내가 하해하여 로씨야 울라지보스도크에서 과일과 채소를 도매할 때의 일이다. 소비 인구는 적고 중국에서 건너가 장사하는 사람이 무려 200여명이나 되니 경쟁이 자못 치렬했다. 서로 제 안속을 채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어느 하루, 아침에 창고 문을 열고 과일과 채소를 로씨야 장사군들에게 도매하는데 원래 그냥 나의 물건을 사가던 장사군들이 값을 물어보고는 말없이 돌아서서 내 맞은 켠에 장사하는 왕씨 물건을 사는 것이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왕씨가 중, 로 세관 법규를 어기고 과일, 채소를 실은 트럭 밑에다 복장, 신, 소상품을 밀수해싣고와 팔았다.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과일, 채소 값을 내가 파는 것보다 싸게 팔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자동차 카마스를 몰고 다니는 운전수와의 인맥관계를 리용하여 나도 밀수 장사를 할 수 있었지만 량심적으로 더우기는 내가 중국공산당 이기 때문에 당원 신분에 맞지 않은 일은 할 수 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을 눅잦히고 종전대로 남새 장사를 밀고나갔다.

그 이튿 날 왕씨의 밀수사건이 탄로나 왕씨는 벌금 2,000딸라를 내고 철창에 갇히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내 나이 어느덧 고희를 넘어섰다. 당의 배양과 나의 꾸준한 노력으로 나는 어엿한 국가공무원으로 발탁되였으며 《흑룡강신문》특약기자의 신분으로 장장 30여년간 1,000여편의 기사 (작품)을 신문에 발표하였으며 흑룡강조선어방송국 우리 사는 세상 수기공모 1등상, 《동북과학기술신문》치부 이야기 공모 1등상, 《료녕신문》압록강문학 공모 2등상을 탔으며 작년에는 한국 재외동포 생활수기 공모 2등상을 수여받았다.

올해는 건당 100돐이 되는 해이다. 휘청거리며 걸어온 나의 인생 길에서 4번이나 크고 작은 수술을 하고 로씨야에서 세번이나 생사고비를 넘기면서 오늘까지 꿋꿋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내 마음 속의 영원한 두 글자 ‘당원’이 나의 앞길을 비춰주었기 때문이다.

초불 정신으로 오늘도, 래일도 나는 나의 마음속의 두 글자 ‘당원’ 답게 여생을 살 것이다.

/ 리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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