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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43] 꿈을 향한 멋진 도전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10 11:11:51 ] 클릭: [ ]

최학림 회장
명석한 두뇌와 부지런한 두손으로 지혜를 쌓고 덕을 쌓으며 그리고 재부를 창조하며 인생을 폼나게 살아가고 있는 그를 적어보려고 필을 들었다.

1958년 훈춘시 량수진(지금은 도문시 소속)의 평범한 로동자가정의 맏아들로 태여나서 다섯 살 나던 해에 소아마비에 걸려 지체장애자로 된 그, 자신의 장애를 의식할 나이가 되자 차라리 죽어버리겠노라 두만강에 뛰여드는 ‘거사’까지 시도하면서 부모님들을 놀래웠다고 한다.

차츰 철이 들면서 남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배우고 지혜를 쌓으면 잘 걷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붙잡고 금방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했을 때가 바로 소학교 졸업, 그는 담임선생님을 찾아 청들었다.

“선생님 저를 한족 중학교에 보내주세요.”선생님은 어린 학생의 절절한 눈빛에서 그 마음을 알아차리셨다.

“그래 시내 중심에 있는 한족 중학교가 시교에 있는 조선족 중학교보다 거리가 많이 가깝구나! 너는 총명하니까 한족 학교에 가서도 얼마든지 잘 할수 있을 거다.”선생님은 흔쾌히 제자의 전학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거리가 가까운 한족 중학교로 전학하긴 했어도 목발 짚고 걸어다니기엔 아무래도 버거운 거리였다. 그는 목발 짚은 몸으로 겁도 없이 자전거 타기에 도전했고 수없이 넘어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끝내 성공했다.

자전거를 탈 수 있음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없이 저혼자 학업의 길을 이어가는데 별로 지장이 없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세월은 흘러 우수한 성적으로 고중 학업까지 마쳤지만 역시 장애자란 장벽은 대학 진학의 길을 막아버렸다. 다행히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에 끼를 가지고 있었기에 곧바로 훈춘현공예미술공장의 미술공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남다른 손재주와 진취심으로 짧은 3년 사이에 공장의 업무골간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 앞에서 그는 단위에 사표를 내고 무작정 장사 길에 올랐다.

친척친우들에게서 빌린 돈으로 고향의 지방 특산인 개구리기름을 팔려고 남방으로 갔다가 브로커들에게 속히워 본전마저 잃고 돌아왔다. 인생 공부라 생각하고 들뜬 마음을 다잡고 그는 전당포, 려관, 고기뀀점을 경영하면서 먹고 살아갈 근심은 없었지만 더 큰 꿈을 이루고 싶었다. 1984년 8월 훈춘시 룡원가두의 헐망한 땅집을 세맡고 ‘룡원미술사’라는 간판을 걸고 꿈을 향한 도전의 길을 시작하였다.

미술사의 봉사 항목은 옷장, 찬장 등 살림집 가구에 유리그림과 인두그림을 그리는 것이였다. 그때가 바로 개체업들이 우후죽순마냥 일어날 때라 손바닥만한 훈춘진 복무대로 거리에 개인 미술사들도 여러 집 있었지만 룡원미술사는 성실 봉사와 깔끔한 그림 솜씨를 우세로 훈춘지역에서 가구 그림이라 하면 첫손가락에 꼽힐만한 위망을 수립했고 잇달아 경제적인 기초도 생겨 세를 맡았던 영업집도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무렵, 하늘은 그에게 뜻하지 않던 재앙을 들씌웠다.

비가 련속 3일째 억수로 퍼붓던 1986년 여름의 어느날 종업원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는데 천정에서 갑자기 “우지끈”하는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바깥으로…”

찰나의 육감으로 지붕이 내려앉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는 소리부터 질렀다.

놀란 직원들이 허겁지겁 밖으로 냅다 뛰고 목발 짚은 사장이 마지막 사람으로 문턱을 넘는 순간 “쾅!”하는 굉음과 함께 낡고 헐망했던 영업집 지붕이 폴싹 내려앉고 말았다.

다행이였다. 정말 천만 다행이였다. 인명피해를 면한 것이…. 그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난다고 한다.

영업집이 무너진 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집을 짓고 영업을 시작하는 것이 손실을 미봉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한 그는 비가 그치는 즉시 공사를 시작했고 목발 짚은 몸으로 자기가 직접 시공 현장에서 일군들을 이끌고 집짓는 일에 달라붙었다. 벽돌 한장, 모래 한삽마저 본인이 직접 구입해 들이던 중 그는 또 한번 큰 사고를 당했다.

네바퀴 뜨락또르를 세내 가지고 강변으로 모래 실으러 갈 때 운전석 옆 공구상자 우에 앉았던 그가 시동이 걸리는 충격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뜨락또르와 적재함의 련결축을 두손으로 꽉 틀어쥐고 필사적으로 땅에 떨어지지 않고 뜨락또르가 멈출 때까지 끌려나갔다. 만약 맥을 버리고 손을 놓았더라면 바퀴에 깔려 황천객이 되였으련만 기적같이 살아있었다.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그 말을 몸으로 증명한 셈이였다. 그는 다년간 목발을 짚으며, 자전거를 타며 키워온 손맥과 팔 힘 덕분에 자기가 살아날 수 있었다고 장알박힌 손을 자랑스럽게 흔들어보이며 웃어보이군 한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미술사를 다시 일떠세우고 나서 그는 또 하북성 한단시로 떠났다. 그때까지 훈춘에서 공백이였던 거울 그림 그리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북성에서 한달간 거울 그림 그리기를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또 태원시 미술공장, 남창시 미술공장, 통화현 거울공장 등 여러 곳을 참관방문하면서 자신의 시야를 한층 더 넓혔다. 목발을 짚고 그 긴 려정을 기차로 움직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꿈을 향한 사나이의 발걸음은 구불거리는 인생의 레우장우에서 뚜벅뚜벅 멈출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번 행차 후 다시 개업한 룡원미술사는 유리그림, 인두그림, 거울 제작의 계렬 봉사로 한층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가고 시장에서 튼튼히 발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며 기회를 찾고 방법을 모색하던 그의 눈에 끝내 기회가 보였다.

1988년 훈춘현이 훈춘시로 명명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시가지 중심거리에 널직한 영업집을 세맡고 ‘룡원광고제작처’라는 간판을 걸고 전문 간판 제작에 달라붙었다. 현이 시로 바뀌면 우선 시내안의 크고작은 모든 간판들을 바꿔야 함을 예견한 그의 준비된 도전이였다.

그때 그가 제작한 ‘훈춘시인민정부’라는 간판도 지금까지 시정부 건물에 걸려있다

기회는 이렇게 항상 노력하는 자를 반기는 것 같았다.

2006년에 그는 또한번 기회를 잡았다. 훈춘시는 또 국가위생도시 평선에 참가하게 되는데 선정표준의 하나가 시내 거리에 표식 간판을 세우는 것이였다. 규모가 작지 않은 공정이였지만 입찰에서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공정을 맡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문수자나 다름이 없었던 50~60만원이란 어마어마한 공정 자금도 여러 경로를 통해 자체로 해결하였다. 그후 회사는 ‘룡달교통시설공정유한회사’로 탈바꿈했다.

사업이 번창해갈수록 그의 마음에는 약소군체가 있었다.

간판제작업을 시작해서부터 그는 많은 장애자들을 접촉하게 되였다. 개체업을 하는 장애자들이 간판하러 오면 그는 무조건 무료로 만들어주군 했다.

그의 능력을 긍정한 쟁애자련합회에서 그를 훈춘시지체장애자협회 주석으로 추천하자 자기의 사업이 한창 확장단계라 몸을 쪼개여 쓸 형편에서도 그는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이 직접 장애자 사업을 하면서 더 많은 장애자들을 이끌어 자립자강하도록 돕고 싶었다. 그후로 그는 훈춘시 장애자들의 코기러기가 되였고 이름은 번듯하게 지체장애자협회 주석이지만 항상 장애자들의 손과 발이 되여주는 심부름군이였다. 장애자협회 활동이나 행사 때마다 그는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장애자들의 심부름군이 되여 뛰여다니고 물품을 실어나르고 거동이 불편한 장애자들의 운전기사가 되여주기도 하면서…

훈춘에 장애자 복리기업이 별로 없다보니 장애자들이 취업하기 곤난하고 빈곤에서 해탈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오던 그는 훈춘시장애자련합회와 손 잡고 훈춘시인민정부, 훈춘시교통경찰대와 수차례 교섭한 끝에 ‘장애자 3륜오토바이 차대’를 세우고 장애자들이 오토바이로 택시업을 하도록 했다. 또 자기가 직접 삼륜 오토바이 차대  대장이 되여 차대의 안전운행 등 여러가지 일들을 책임졌다. 덕분에 지금 훈춘시의 장애자들은 보다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다.

연변장애자국제교류협회 회원들과 함께 한국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최학림(왼쪽 첫번째)

그동안 그가 장애자 영업주들을 위해 무료로 제작해준 간판값을 돈으로 치면 얼마나 되는지? 연변지체장애자협회, 연변장애자국제교류협회 그리고 멀리 한국 미국과 같은 애심인사들의 후원을 적극 받아들여 훈춘의 장애자들에게 도움을 준 일은 얼마나 되는지? 여기저기서 그에 대한 감동의 사연들을 귀동냥으로 많이 전해들었고 또 그런 행사들에 직접 참가하면서,필자는 베풀며 사는 그의 삶을 보아왔지만 구체적인 통계수자는 잘 모른다. 그저 훈춘시 위생계통에서 근무하고 있는 그의 안해가  2007년부터 지금까지 많지 않은 자신의 로임을 헤쳐 빈곤장애자 자녀에게 해마다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다.

훈춘시정협 위원으로 활약하고 ‘훈춘시룡달교통시설공정유한회사’의 사장이고 훈춘시지체장애자협회 주석이지만 항상 아무런 틀거지 없이 뛰여다니는 모습, 장애자이지만 항상 구김살 없는 웃음으로 당당하게 인생을 헤쳐나가는 그의 모습, 몇해전에는 또 청화대학 연수까지 마치면서 장애자들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긍정에너지를 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명함은 최학림,어느덧 60고개를 넘기고 있다.

지혜로운자의 여유로움, 성공한자의 당당함 거기에 또 힘든 이들을 향한 넉넉한 손길까지 갖추고 사는 최학림 사장, 꿈을 향한 그의 도전은 오늘도 래일도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 유춘란(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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