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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28] 대채를 참관 학습하러 가던 나날들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2-19 14:42:31 ] 클릭: [ ]

51년전에 대채대대를 참관 학습하던 나날을 잊을 수 없다. 비록 반세기를 넘었지만 지금도 기억이 또렷이 남아있다.

1970년대까지 산서성 석양현 대채대대는 우리 나라 농업전선의 훌륭한 본보기로 전국 인민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대채라 하면 누구나 진영귀를 떠올린다. 대채 당지부서기 진영귀는 대채대대 농민들을 이끌고 나무 한 대도 없던 두메산골 승냥이골을 식수조림하여 록음으 우거지고 번대머리 호두산을 곡창으로 만들었다. 농민들은 땅굴 집에서 나와 새 벽돌집에 살았다. 가난하던 대채대대는 부유한 살기 좋은 농촌으로 변하여 우리 나라 농촌의 훌륭한 본보기로 되었다.

참관단 성원들과 함께 사진을 남긴 필자(뒤줄 오른쪽 첫번째)

위대한 령수 모주석께서는 “공업은 대경을 따라배우고 농업은 대채를 따라 배우라”고 전국에 호소하였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는 1967년부터 대채 참관 열풍이 불었다. 당시 연길현 광신향 광신대대 책임자로 있은 나는 광신대대의 락후한 면모를 개변시키기 위해 대채대대 참관학습을 조직하였다. 대대 간부들과 생산대 간부 빈하중농 대표들로 참관단을 무었는데 참관단 성원들로는 리철호, 김상순, 림창학, 심호일, 최길자, 최용주, 김숙자, 남광일, 허천, 김북만, 김삼철, 림봉석, 김창식, 김광석 등 15명이였다.

참관단 일행은 조양천 기차역에서 북경까지 가는 직행 렬차표를 떼였다. 좌석표였는데 한장에 21원 가량 되였다. 그 때 가난했던 우리는 침대표를 살 엄두도 못냈다. 하루 반 달려 북경에 도착한 우리는 내리자 마자 식사도 하지 않고 산서성 석양 현성까지 가는 차표를 샀다. 차표 사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북경역 앞은 대채를 참관하러 가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홍위병 완장을 팔에 낀 젊은이들도 많았다.점심까지 먹지 못한 우리 배 속에서 언녕부터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났다. 100여메터 되는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누구 하나 불만의 소리 없이 조용히 순서대로 표를 샀다. 그 때 사람들은 정말 각오가 높았다. 약 반시간 가량 기다려서 우리도 산서성 석양까지 가는 눅거리 저녁 기차표를 샀다. 모두 배고파서 북경역 부근의 간이식당을 찾아 아침이자, 점심, 저녁을 한꺼번에 먹었다. 눅거리 밀가루 빵에 좁쌀죽 그리고 무우 짠지에 두부볶음, 두부 말랭이 볶음을 저마끔 한그릇씩 비웠다. 그제서야 허기찬 배를 달래여서인지 껄ㅡ껄 하며 얼굴에 웃음빛이 어려있었다.

그 때 우리는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 이라는 말의 참 뜻을 진정 알게 되였다. 식당에서 나와 북경역 대합실로 오면서 보노라니 그 때 북경역은 지하철 건설로 땅을 깊게 파헤치고 그 안에서 중국인민해방군 공정병들이 큰 터미널 틀을 고정하고 그 우에 콩크리트를 씌우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 이렇게 큰 공사를 봤다. 저녁이 되여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다행이도 우리 참관단은 모두 걸상에 앉을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아마도 시발점이 여서인지 아니면 수만리 머나먼 연변 변강에서 온 조선민족에 대한 대우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편안히 앉아 갈 수 있게 되였다.

산서성 석양까지는 온밤 달려 이튿날 점심녁에야 도착하는 로정이다. 모두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 떨어졌다. 우리에겐 잃어버릴가봐 근심되는 물건 하나 없기에 태평스럽게 코를 곯았다. 기차는 기적소리를 울리며 계속 달렸다. 지금은 디젤유를 쓰는 신식 기관차가 아니면 태양에너지 고속기관차들이 달리지만 그 때는 석탄을 때는 증기관기차여서 속도가 늦다. 드디여 새 날이 밝아왔다. 기차는 석가장, 신화, 정경을 지나 산서성 경내의 양천을 지나 석양현에 도착하였다. 석양역 광장에는 숱한 뻐스들이 대채를 참관하려 가는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채를 참관하러 가는 손님들이 썰물처럼 기차에서 쏟아져 내렸다. 우리가 손님 접대를 책임진 총지휘자를 만나 길림성 연변 조선족이라는 신분을 밝히자 우리가 소지한 소개신을 보더니 제일 먼저 뻐스에 오르게 하였다. 우리 일행은 오매에도 그리던 대채대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생각으로 시장끼를 느끼지 못했다. 뻐스는 어느덧 대채에 도착하였다.

밖을 내다보니 참관하려 온 사람들이 바다 물결처럼 출렁이였다. 손님들을 실어나르는 수십대 뻐스가 길가에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나는 대채 참관 지휘부를 찾아 신분을 밝히고 소개신을 보이니 그들은 “멀고 먼 변강의 소수민족이 왔네”라고 하면서 우리 만을 우대하여 전문 인원을 파견하여 대채대대를 참관시켰다. 옛날에 살던 토굴집으로부터 지금의 벽돌주택과 2층 으로 된 주택 그리고 사무청사까지 구경시키고 또 우리들을 데리고 대채의 승냥이골과 호두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 옛날 승냥이가 살판치던 승냥이골은 식수조림과 과수재배로 나무가 우거졌다. 사과나무에는 사과가 달리기 시작하고 호두산 꼭대기에는 가물을 방지하기 위해 건설된 둥그런 저수지가 있었다. 이같은 성과에는 진영귀동지가 이끄는 대채대대 농민들이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대채에 다달은 우리는 점심이 지났지만 대채정신에 매혹되여 배고픈 감도 잊고 해설원들의 설명을 들으며 큰힘을 얻었다.

사진도 찍었다. 이전에 대채 사람들이 아침을 먹으며 회의를 했다는 곳도 찾아보았다. 바로 2층 청사 곁에 있었다. 그 때 해설원이 “좀 있으면 진영귀동지가 참관단 동지들을 만나러 온다” 고 알렸다. 우리는 안내원이 시키는 대로 길 옆에 서있는데 마침 진영귀동지가 흰색 적삼에 검정색 바지, 머리에는 횐색 수건을 쓰고 등장하였다. 기록영화에서 보던 것과 꼭 같았다. 그의 곁에는 대채 부련회 곽봉련 주임도 수행하였다. 진영귀는 “동무들! 안녕하십니까? 대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하고 말하자 “농업은 대채를 따라배우자!”, “진영귀동지를 따라배우자!”, “진영귀동지에게 경의를 드린다!” 는 구호소리가 참관자들 속에서 련이어 울려퍼졌다. 우리도 그들과 함께 웨쳤다. 진영귀동지는 잠간 있다가 인차 자리를 떴다.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진영귀동지를 보고 악수까지 하는 행운을 가지게 되였다. 진영귀동지는 우리가 소수민족이라고 하니 매우 반가와 하시며 나의 손을 꼭 잡고 힘 주어 흔들었다. 이는 내 일생의 최대의 영광이였다.

그 때 나의 손을 흔들어주던 진영귀동지의 장알 박힌 손의 힘은 지금도 나의 가슴 속에서 요동치는 듯 하다. 대채 참관학습을 끝낸 우리는 인차 현성에 와서 식사를 하고 나서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집에 돌아온 우리 일행은 대채정신을 우리 지방에서도 꽃피우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은 끝에 선진단위로 표창까지 받았다.

대채의 간고분투 혁명정신은 한세대를 감동시켰고 영원히 잊지 못 할 일이다. 그 세월 대채 정신은 전국 인민들을 더욱 분발노력하도록 고무격려했다. / 김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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