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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26]‘어미지향’ 연화향서 물고기 잡던 그 시절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22 08:50:06 ] 클릭: [ ]

‘어미지향(鱼米之乡)'이란 물고기가 쌀 처럼 많은 고장이라는 뜻이다. 물고기가 그리 흔치 않은 연변에서 나서 자란 나는 다행이도‘어미지향'에서의 생활을 체험하게 되였다. 1980년대까지만 하여도‘어미지향'이라 불리우는 고장은 바로 길림성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이다.

필자 김삼철과 그의 안해 임혜란. 

‘어미지향'으로 소문 난  20세기 70, 80년대를 생각하면 지금 그 곳에서 물고기잡이를 하던 랑만의 나날들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1948년도에 연변의 연길현과 화룡현의 이주민들로 무어진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에는 물고기가 대단히 많았다. 이주초기에는 물고기가 너무 많아 물반 고기반이라고 했다. 그 물고기들이 당시 이주민들의 생활에 큰 보탬이 되였다. 송화강 지류인 라림강을 끼고 있는 연화조선족향에는 호수가 많고 물고기 번식조건이 좋아 잉어, 메기, 가물치, 붕어 등 어류들 천지였다. 여기에는 벼라별 희귀한 이야기들이 깃들어있다.

내가 연화조선족향 장안툰에서 농사를 지을 때의 일이다. 1971년 5월 초순의 어느날 나는 아침 4시 쯤 모내기를 할 논포전을 위해 모래산 근처의 논밭으로 삽을 메고 갔다. 밭머리에 이르자 깜짝 놀랐다. 약 100메터 거리를 둔 논에서 무언가 요동치고 물보라가 세찼다. 무슨 짐승이 저렇게 논물 속에서 야단치는가고 경계하며 삽을 들고 달려가보니 큰 메기 한마리가 물이 옅어 헤염치기 바쁘니 발악하고 있었다. 제꺽 삽으로 메기를 때려눕혔다. 큰 메기였다. 쇠줄로 메기 아가리를 꿰여드니 한메터는 잘 되였다.

삽자루에 꿰고 집에 와서 손저울에 떠보니 4근 6냥, 40세 되도록 처음 내 손으로 잡아보는 물고기다. 아이들은 이렇게 큰 메기를 처음 본다며 무서워했고 식구들은 메기탕으로 맛 있는 아침을 먹었다.

2, 3일이 지난 오후 모래산 논 모판관리를 책임진 강학범이라는 젊은이가 “홍화아버지,오늘 저녁 물고기 잡이를 갑시다”고 하면서 버들 발을 만들러가자고 하여 따라나섰다. 약 4리 밖에 있는 라림강변에는 수백헥타르를 헤아리는 버들숲이 일망무제하게 펼쳐져있었다. 그 속에서 2, 3메터씩 쭉쭉 잘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둘러메고 모래산 농막 곁에 옮겨다 쇠줄로 너비 2.5메터, 길이 3메터 가량 되는 고기발을 만들어 큰 도랑 락차에 고기발을 놓았다. 이깔나무 가지들로 기둥을 박고 가로세로 받쳐놓으니 든든한 버드나무 고기발이 만들어졌다.

나는 예정된 시간에 모래산 벼모기지 농막집으로 갔다. 학범이는 “오늘 밤중부터는 물고기가 고기발에 많이 내리겠는데 홍화아버지는 부지런히 물고기를 집으로 메고 가세요”고 했다. 마침 농막에 벼모판에서 쓰는 물통 두개와 멜대까지 있었다. 나는 “무슨 물고기가 그리 많겠는가?”하며 별로 믿지 않았다. 학범이는 물고기 전문가처럼 물고기에 관한 지식과 체험도 많기도 했다. 학범이는 연변 안도현에서 이사왔는데 벌써 10년이 된다고 하면서 여기는 정말 물고기가 많다고 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물고기를 잡아 말리우려고 연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온다고 했다. 학범이는 초저녁부터 꺼낸 물고기이야기를 밤 11시까지 계속 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던 학범이는 “인제부터는 물고기가 무리를 지어 다닐 때다”고 하면서 물통을 가지고 고기발로 향해 걸어갔다. 나도 따라나섰다. 농막집 바로 뒤에 큰도랑이 있는데 이 도랑 물은 라림강에서 직접 흘러내린다. 먼저 나간 학범이가 소리 질렀다. “홍화아버지, 빨리 오시오. 물고기가 많이 내렸습니다!”큰 버들발에 잉어, 붕어, 메기들이 많이 내렸다. 모두 반근 이상 되는 큰 놈들이였는데 펄쩍펄쩍 뛰는 모습이 장관이였다. 학범이가 “빨리 물고기를 물통에 담아 집으로 가져 가시요”고 하자 내가 “학범이 먼저 가져가오. 학범의 덕인데 난 마지막에 좀 가져가겠소”고 하니 “우리 집에는 말리운 물고기가 많으니 걱정 말고 빨리 가져 가십시오”고 소리치면서 독촉하였다. 나는 학범이가 시키는 대로 물고기를 두 물통에 담고 집으로 향하였다.

“어디서 이리 큰 물고기를 이렇게 많이 잡았습니까?”물고기를 보던 안해는 놀란나머지 환성을 올리면서 큰 대야를 가져왔다. 물고기가 큰 대야에 차넘쳤다. 나는 또 모래산 농막으로 향했다. 안해는 잠도 못 자고 고기 밸을 따느나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 나는 날이 밝을 무렵까지 세번이나 물고기를 집으로 메고 갔다.

소학교 교원인 안해는 새벽부터 물고기 밸을 따고 다섯 살 난 큰딸도 언제 일어났는지 어머니의 일손을 도왔다. 새벽 4시가 되자 라림 시내에서 물고기를 되넘겨 파는 장사군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수백근 되는 물고기를 모두 사서 참대바구니에 담고 라림 시내로 수송했다. 장사군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연화향에 와 있으면서 물고기를 사갔다. 우리는 그날 잡은 물고기를 지붕우에 널었는데 온 지붕이 물고기 천지였다.

연화라는 고장은 5월말까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물고기를 말리우는 데는 제격이였다. 점심에 나는 물고기 반찬을 해놓고 마을 친구들을 청하여 술놀이를 하고 나머지 수십근은 연변에 있는 처가집, 형님네 집에 부쳐보냈다.

하루 밤새에 고기발로 천근을 헤아리는 물고기를 잡아보기는 평생 처음 있은 일이다. 모두 반근이상되는 고기라 정말 희한했다. 어디 그 뿐인가 모내기를 끝내고 손 기음을 맬 때는 누구나 비닐봉지를 허리에 차고 다녔다. 논판에 물고기가 많아 잡는 족족 비닐봉지에 넣었다.

오전에 두근, 오후에 두근, 정말 물고기풍년이 따로 없는 고장이다. 소학교에 다니는 코흘리개 아이들도 여름철에 매일 메기 2,3근씩은 식은죽 먹기였다. 아이들은 한메터 길이의 막대기, 한메터 반 되는 낚시줄에 ‘떰벙낚시'를 달고 1,000여메터 되는 길옆 관개수로를 따라 학교를 가면서 1근 푼한 메기새끼들을 잡는다. 집으로 올때 또 한근 정도 잡아 오면 집식구들이 먹기에는 충분했다. 학교를 가며 잡은 메기는 학교 근처의 다리밑 물속에 감추어두었다가 방과 후 가지고 온다.

‘떰벙낚시'는 낚시줄 끝머리에 작은 라사못을 달고 그 바로 밑 낚시에 청개구리 새끼를 잡아꿰맨 것인데 그것을 물속에 던지면 떰벙 소리가 난다. 그래서 ‘떰벙낚시'라 한다. 떰벙소리에 도랑물 속에 있는 메기, 개구리 새끼가 덥썩 물어챈다. 그 시각 아이들은 낚시대를 잡아채는 데 메기는 청개구리를 먹지도 못하고 길옆에 떨어져 나뒹군다.

1975년 여름 무더운 삼복철, 장안북툰 농민들이 점심을 먹고 마을 복판으로 흐르는 큰 대돌 다리목 백양나무 아래에 빙 둘러앉아 부채질하며 한담을 하는데 별안간 난데없이 가물치 한마리가 물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남정들이 앉아있는 한복판에 떨어졌다. 와뜰 놀란 남정들이다. 가물치는 남정들의 술안주로 제발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연화향의 고기잡는 도구도 가지각색이다.  화란즈(花篮子)를 호수 풀숲 물속에 놓으면 물고기들이 꽃바구니에 들어가는데 다시 나오지 못했다. 적어서 20, 30근, 많이 잡힐 때는 100여근도 된다. 모두 3냥 이상 되는 잉어, 붕어, 가물치들이다. 작은 물고기는 아예 잡지도 않았다. 합수목에 사방 2, 3메터 되게 한어로 빤떵이라는 그물을 늘여놓고 고기가 모이기를 기다렸다가 그물을 잡아당겨 고기를 잡는 도구도 있다.

연변에서는 그런 도구로 온 하루 한 마리도 잡지 못할 것이다. 나도 처음 볼 때에는 헤염치는 물고기를 어떻게 잡을 수 있는가고‘한심한 도구'라고 생각했다.

당시 연화향의 조선족들은 여름철이면 매일 물고기탕을 먹었다. 뿐만 아니라 연화에 친척이 있는 연변사람들까지 8, 9월에 연화향에 가 한두달 눌러있으면서 물고기를 잡거나 사서는 말리워서 연변에 보내 팔군했다. 수백근씩 파는 사람도 있었다.

연화향을 에돌아 흐르는 라림강에도 물고기가 많았다. 수심이 깊고 수폭이 넓어 반두치기는 안되고 그물을 치지 않으면 낚시로 물고기를 잡았다. 운이 좋은날에는 10여근, 헛탕을 칠 때가 많아 모두 하천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겨울에는 언 호수에 구멍을 뚫고 그물을 늘이는데 한번에 100, 200근씩 잡을 수 있다.

연화향 조선족들은 “물고기를 먹는 맛도 좋지만 잡는 멋이 더 좋다”고들 말한다. 연화향에 물고기가 많다보니 라림강 건너 흑룡강성의 라림, 배음하 지역의 물고기 장사군들이 새벽부터 연화향에 몰려와 한해에 수천원, 수만원씩 돈을 벌어갔다.

그런데 20세기 90년대부터 많은 호수를 논으로 개간하고 물도랑을 세멘트로 건설하는 바람에 물고기 번식환경이 엄중히 파괴되고 농민들이 화학비료와 농약을 많이 사용하면서‘어미지향'이 물고기를 잡기 힘든 고장으로 되였다.

손기음을 매며 벼농사를 짓고 개구쟁이 이이들까지‘떰벙낚시'로 메기를 잡던 그 시절은 “호랑이가 담배 피운다”는 옛 이야기처럼 점점 추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어미지향'으로 소문났던 그 시절의 연화조선족향은 입쌀이 좋아 소문이 났지만 더우기는 물고기가 많아 지명도가 더 높았었다.

10여근 되는 메기를 가슴에 안고 좋아하던 그 시절이 언제면 다시 올가?

 / 김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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