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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23] 엄마의 온돌 (1)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08 16:52:22 ] 클릭: [ ]

“온 힘을 다해 이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던 그 눈빛”, “어느 구석을 봐도 엄마가 보이는데 어디에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생소해 미칠 것 같았다”,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본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엄마만 떠올리면 억장이 무너진다”, “따뜻한 밥 한술 떠넣어드린 적 없다. 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은데 엄마는 기회를 주지 않아 후회가 된다”…

이는 현재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현철(1986년 도문 출생)이 펴낸 《엄마의 온돌》이라는 책중의 몇구절이다.

《엄마의 온돌》은 취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9개월 투병생활을 한 엄마, 평생 헌신적으로 살아왔건만 투병중에도 남편을 걱정하고 자식들을 생각하고 손자를 돌봐주지 못해 안타까와하는 엄마, 53세 젊은 나이에 아들 곁을 떠난 엄마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책 읽는 사람마다 눈물을 쏟으며 읽었다는 이 책, 현재 출판발행자 민족출판사의 인기도서로 꼽는 이 책의 일부 내용을 본지는 민족출판사 관련 부문과 지은이 김현철의 허락을 받고 기를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

 

김현철의 아들 라빈이의 출생은 온 가족에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책 머리에

엄마는 오늘 가시지만 나는 엄마를 보낼 수 없다

2017년 7월 1일, 엄마는 처음으로 건강검진이라는 것을 받았다

2017년 7월 7일, 엄마는 취장암 말기라는 확진을 받았다

2018년 3월 27일, 그 사람이 내 곁을 조용히 떠나갔다

53세, 두살배기 손자를 둔 할머니

그러나 할머니가 되지 못했다

상상할 수 없는 통증을 강다짐으로 버티다가

서서히 찾아드는 절망 속에서

흐트러짐 없이 생을 마무리했다

운명하던 순간

온 힘을 다해 이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던 그 눈빛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본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엄마만 떠올리면 억장이 무너진다

따뜻한 밥 한술 떠넣어드린 적 없다

부둥켜안고 실컷 울어보지도 못했다

갈 준비도, 보낼 준비도 되지 못한 우리에게

때이른 영별은 무참하게 찾아왔다

해드리지 못한 것이 너무 많은데

엄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받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은데

엄마는 더 이상 줄 수 없다

평범하고 수수해서 들판의 달래, 민들레를 닮은 우리 엄마

그 사람의 이야기를 적으며 마지막 시간들을 함께 했다

위대하지 않은, 화려하지 않은, 잘나지 않은

그러나 ‘누군가의 엄마’ 라는 이름 하나로

대체 불가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

나중에 그 사람의 손자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또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읽는 누군가가 잠간이라도 진지하게 귀 기울여준다면

그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조금이나마 해소가 될는지

후회,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그 말

사실이였네…

2018년 8월 26일

병원치료 포기

2017년 7월 7일, 엄마는 취장암 말기라는 확진을 받았다. …사실 MRI 검사 당일 즉 7일날 오후에 박교수님은 이미 MRI 결과를 미리 확인하고 여러 전문가들에게까지 문의하여 진단을 내리였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 길어야 1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몇달 이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수술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항암화학료법이나 기타 보수적인 치료가 방법이라 하면 방법인데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 했다. 엄마는 병원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가지고 계신다. 아니, 무서워하는 것 같다. 나는 엄마를 모시고 려행이나 다녀오고 고향 량수 집에서 음식을 조절하면서 될 수록 편하게 지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박교수님에게 문의해봤더니 그래도 여기저기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는 것이 이후에 후회가 덜 될 것이라 했다.

…그래서 바로 한국 병원 예약중이고 확정되면 며칠내로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다. 아버지는 북경의 큰 병원에 가서 진단받았는데 비슷한 결과가 나올 터이니 불필요하지 않겠냐며 하루라도 일찍 고향에 돌아가 료양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결국 이번 한국행은 엄마 말대로 ‘사형선고’를 확인하러 간 셈이 되고 말았다. 아침 8시 반경, 담당교수님께서 직접 병실에 찾아오셔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엄마를 설복하였다. 내시경조직검사를 마저 하고 항암치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마음을 이미 굳힌 엄마는 풀이 죽은 채 “아니예요, 중국에 가서 살 거예요.” 하며 거절했다. 나는 의사를 따라나갔다. 지금 상태로는 항암치료를 결부하면 6개월 정도 예산이고 아예 치료를 포기하면 3개월 정도 밖에 못살 것이라고 했다…

2017년 7월 19일

어제 아침엔 엄마의 흐느낌소리에 눈을 떴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먼저 엄마의 기척이 들리는가부터 확인한다. 그 시간이면 엄마는 항상 주방에서 밥을 짓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제 아침에는 주방이 아닌 침실에서 엄마의 흐느낌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는 뭐라 말하고 계셨고 엄마도 흐느끼면서 뭐라고 말하고 계셨다. 정확히 무슨 얘기들이 오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고향에 내려갈 얘기를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한 15분 가량 지속되더니 조용해졌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못 들은듯 거실에 나가서는 밥을 먹자고 했다. 엄마 역시 아무렇지 않은듯 밥상을 차려주었다.

안해랑 상의하여 엄마를 량수보다는 연길에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단 량수는 세탁기부터 시작하여 여기저기 집에 손댈 곳이 많았고 마을사람들이 엄마의 초췌해지는 모습을 보며 마음대로 추측하여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엄마는 두려워했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특히 몸이 안 좋으신 할머니가 알면 크게 타격받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연길 모아산 기슭에 집을 두개 세맡아 아버지와 엄마 그리고 장인, 장모에 라빈이까지 보내기로 했다. 한시라도 손자를 못 보면 초조해하는 엄마다. 혼자서 료양을 한다고 해도 손자를 못 보면 무슨 락이 있겠냐며 자꾸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가 없어 내린 결정이다. 친구한테 부탁하여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반대 립장이였다. 하나는 엄마를 어찌 자기 집도 아닌 다른 곳에서 마지막을 맞게 하겠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만에 하나라도 엄마가 그 집에서 돌아가거나 하면 그 집주인한테는 또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고 했다. 아버지 얘기에는 물론 일리가 있었고 나도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였다. 그래서 일부러 의사선생님에게 묻기도 했다. 마지막 단계에는 어떤 상황이 나타나게 되는가를.

어느 날 갑자기 예고없이 가는 병이 아니라고 했다. 특히 마지막에는 통증이 심해지고 여러 고통들이 몰려와서 병원에 입원해 진통제라도 맞으며 버텨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정은 지금부터 모든 것을 엄마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는 것이였다. 내 설명을 듣고 아버지는 마지 못해 묵인하는 태도였지만 속으로는 썩 내켜하는 것 같지 않았다.

점심 때, 거실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는데 엄마가 내 옆에 와 앉더니 락루하기 시작했다. 그냥 연길이 아니고 량수에 가 있겠다는 것이였다. 남이야 알든 말든 그게 뭐 대수로울 게 있냐고 한다. 자식들한테 티끌 만치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했는데 왜 본의아니게 자꾸 부담을 주게 되는지 너무 속상하다며 락루하셨다. 이렇게 앓다가 어느 날 갑자기 훌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만약 그렇지 못하면 자식한테 부담을 주는 게 너무 싫다고 했다. 손자 보러 와 있는 동안만은 며느리 손에 물도 안 묻히게 할 생각으로 왔는데 왜 이렇게 사람 일이 뜻대로 안되는지 모르겠다며 울었다. 내가 이런저런 말들을 하며 위로를 해서야 엄마는 좀 진정이 되는듯 싶었다.

엄마의 얼굴은 더 수척해졌고 눈빛에는 정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거동도 병원에 가기전보다 많이 불편해보였다. 그렇지만 엄마는 하루에 몇번씩 저울에 올라서는 일만은 잊지 않고 있었다. 엄마는 이 병의 증상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른다. 급격한 체중감소가 본인이 실행한 다이어트 때문이라고 하며 저울에 올라서서 체중감소를 확인할 때마다 즐겁게 웃군 한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에 밥을 먹고 나서 엄마는 답답한지 아버지랑 같이 라빈이를 데리고 시장에 다녀왔다. 집 근처에 재래시장이 있는데 거기서 파는 채소가 슈퍼에서 파는 것보다 많이 싸다. 엄마는 아직까지도 슈퍼보다는 재래시장을 한바퀴 쭉 돌면서 가격을 일일이 확인하고 가장 저렴한 가격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가끔 가게주인이 시들어가는 채소를 써비스로 주면 집에 와서 꼭 자랑하군 한다. 시들어가는 채소이지만 엄마의 손을 거치면 싱싱한 채소와 차이 없이 맛갈스러운 반찬으로 변신하군 한다.

한참 뒤 엄마가 돌아왔다. 채소를 잔뜩 들고 왔는데 총 합해서 7원어치라고 했다. 가지 얼마얼마를 써비스로 가졌고 고추 얼마얼마를 써비스로 주더라는 얘기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때 만큼은 자신의 몸 속에서 멈추지 않고 자라고 있는 암세포들에 대한 공포감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많이도 가져왔네요. 이제는 그냥 이 시간대에 가서 채소를 사오세요.”하며 내가 받아넘겼다.

엄마가 바라는 삶, 그저 하루에 한번 시장에 가서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가장 싱싱한 채소를 사오는 것, 손자녀석에게 맛 있는 죽을 만들어 떠먹이는 것, 아들, 며느리와 남편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게 그렇게 높은 요구는 아니라고 본다 나는.

2017년 7월 20일

엄마가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엄마 특유의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가 귀맛 좋게 들려온다. 엄마의 식사속도는 줄곧 빨랐다. 랭수에 밥을 말아드시기 좋아하는 엄마는 식사가 시작되면 얼마 안 지나 바로 끝내고는 설겆이를 시작하군 했다. 습관도 습관이겠지만 항상 가족을 위해 상을 차리고 치워야 했으므로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하고 빨리 끝내야 하는 엄마만의 습관이 형성되였을 수도 있다. 엄마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생마늘, 오이, 곰취, 상추, 양배추, 고추 등 풋 남새들을 즐겨드신다. 양념을 무쳐 료리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대로 간장이나 된장에 푹 찍어 드시기를 즐겼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그 누구보다고 건강할 것이라며 장담을 했었고 엄마 또한 본인의 건강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걱정하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가면서부터 엄마의 식습관은 변하게 되였다.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아침 겸 점심을 드시고 저녁 9시가 넘어 저녁을 드시니 일이 바쁜 데다 제때에 드시지 않으니 어떤 끼니는 약간만 드시고 저녁은 과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음식이 남는 것을 못 봐주는 엄마는 배가 부른 상황에서도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와 더 드셨다고 한다. 게다가 엄마는 특별히 짠 음식을 좋아한다. 끼니마다 짠 반찬이 있어야 밥맛이 좋다는 엄마였다. 그렇게 5년을 지내오다 나니 탈이 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기도 했다.

며칠전에도 엄마는 자기 건강만 믿고 너무 무리했다고 맥없이 얘기했다. 집세를 절약한다고 옷이며 이불이며 곰팡이 냄새가 푹 배여 아무리 씻어도 빠지지 않는 창고같은 세집에서 3년을 지냈고 하루라도 일을 더한다고 쉬는 날에도 출근을 신청해서 뼈 빠지게 일했다. 일에 있어서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엄마다.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너무 미안해서 엄마를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티는 안 내시지만 진단을 받은 뒤로 단 한순간도 엄마는 자신의 배속의 종양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을 것이다. 불안과 걱정과 실망과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초조함과 기대와 무기력함이 푹 배여 엄마의 두 눈은 너무 가엾어보인다. 가족들 앞에서 애써 아무렇지 않게 보이려는 엄마의 노력이 너무 가슴 아프다.

지금 엄마는 라빈이를 재우고 빨래를 개이고 있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싫어할 엄마임을 잘 알기에 엄마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기척이 너무 소중하다. 평범하고 평범했던 그 기척이 이제 나에게는 마지막 몇번째로 손꼽아야 할 엄마의 흔적과 기억들이다.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거짓말 같아보이는 이 현실이 아직도 너무 당황스럽다. 믿을 수가 없다.

 / 김현철 (다음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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