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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22]나의 정든 북대황 기러기섬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18 11:08:25 ] 클릭: [ ]

지난 8월 29일, 나는 흑룡강성 계서시 계동현 계림조선족향에서 펼쳐진 약선(药膳)강습행사를 마치고 50년 만에 다시 그리운 북대황 기러기섬(雁窝岛)으로 향했다.

기러기섬은 바로 50년전인 1969년 3월에 가서 1973년 3월까지 내가 청춘열정을 쏟아부어 벼농사를 개척한 정든 고장이다.

1962년 6월 22일, 국무원 총리 주은래께서 전국 로동모범이며 중국농업과학원 특별 연구원인 연길시 장백인민공사 신풍대대 최죽송동지네 집을 방문, 북방 벼생산에 대해 담론하셨다(자료사진). 

북대황이라 하면 흑룡강성 지도에서 밀산과 가목사를 잇는, 금을 그으면 그 동쪽에 펼쳐진 광활한 삼강평원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러기섬은 보청현 경내의 초원과 조택지 한폭판에서 잠자고 있었던 섬이였다. 그래서 그 섬은 수천마리 기러기들의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1961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주덕해동지가 연길현 세린하공사 세린대대 리춘근 등 농민들과 농업생산 발전조치를 담론하고 있다(자료사진). 

1956년부터 왕진(王震) 장군의 지휘하에 10만 복원군인들이 북대황을 개간, 건설하는 서막을 열었다. 그 때로부터 기러기섬은 깊은 잠에서 깨여났고 많은 전설을 남겼다. 1960년대초, 왕진 장군의 지시하에 기러기섬 개간과정에 있었던 수많은 놀라운 이야기들을 소재로 화극 <기러기섬>이 창작되였고 이어서 화극 <기러기섬>을 재창작해 촬영한 영화 《북대황사람들》은 당시 전국을 진감했었다. 그 때 그 영화를 본 기억이 아직도 나의 머리 속에 생생하다.

1972년, 북경, 녕파에서 온 두 지식청년들과 함께 벼모상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김희관(중간)  

1968년 2월 12일(월요일), 연변대학 농학원을 졸업한 나와 나의 동창생 리성춘, 김강자, 리혜옥은 기차편으로 가목사에 도착, 동북농업개간총국 인사처를 찾아 부임을 알렸다. 며칠 후 우리는 2일간 뻐스를 타고 북대황 허허벌판에서 불어치는 ‘눈폭풍(烟儿炮)’을 무릅쓰고 국영853농장에 도착했다. 며칠 동안 초대소에서 쉬면서 우리는 반가운 선배들을 만났다. 그들은 간호원으로 항미원조에 참가해 사선을 넘나들다 전업하여 남편을 따라 이곳에서 살고 있는 연변의 누님들이였다.

지난 8월 말 북대황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김희관

며칠 후, 우리는 다시 853농장 산하 제3농장 3대에 갔다. 1년간의 실습과정을 거쳐 우리는 기계화농업 과정을 거의 익혔다. 1969년 봄, 우리는 1,2,3,4농장에 각자 배치되여 벼농사 개척사업을 주관하는 농업기술원으로 발탁되고 기러기섬의 첫 벼농사 개척자로 되였다.

우리가 탄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질주했다. 어제저녁까지 퍼붓던 소낙비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에 햇솜같은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여오르고 있었다. 옛날 북대황의 진흙탕 길은 온데 간데 없고 현대화 고속도로가 저 멀리 지평선까지 쭉 뻗어있었다.

고속도로 량쪽에는 방풍림에 둘러 쌓인 그림같은 논과 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줄줄이 뻗은 방풍림은 하늘을 떠이고 높이 자라서 병영을 지키는 무사들을 방불케 했다.

전국 로동모범이며 중국농업과학원 특별 연구원  연길시 장백인민공사 신풍대대의 최죽송(우)

50년 만에 다시 찾은 기러기섬이다. 나의 가슴은 울렁거리다가 벅차오른다.

누구부터 만날가? 길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옛날 하련장을 아십니까?” 그러자 키꼴이 장대한 허씨 아저씨가 “당신은 누구요?”하고 되묻기에 “나는 50년전 여기서 벼농사를 개척하던 김기술원이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아! 50년 만이라구요! 하련장은 지금 할빈에 계시지요. 올해 83세인데…그 분은 나의 매형이예요…”. 그와 옆에 있는 아저씨들이 큰소리로 나를 반긴다. 그런데 모두 낯 모를 사람들이였다. 그럴 리도 있었다. 50년 만이니까! 당시 북경, 상해, 녕파, 할빈에서 온 나어린 지식청년들도 떠나간지 오래되고 당지의 지식청년들도 이제는 도시로, 남방으로 떠나고 하니 나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리 만무했다.

북대황 기러기섬에서 

허씨 아저씨가 우리를 뜨락또르 트레일러(拖斗)에 앉으라고 했다. 우리는 홍수가 지나간 침수지역을 지나 제4농장 사무실 부근에 도착했다. 허씨는 씽하니 아빠트로 달려가더니 나와 함께 있었던 제2련대의 로종업원 류씨와 그의 부인을 불러냈다. 류씨는 나를 보자마자 “김희관, 김기술원, 반갑소!”라고 웨치면서 반긴다. 그 순간 나는 울컥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당시 그들 부부는 모두 콤바인(收割机) 운전기사여서 7월말부터 시작되는 밀, 보리 수확철이거나 10월의 옥수수, 콩 수확철이면 애들에게 밥 해줄 겨를도 없이 바삐 돌았다. 이들 부부는 나를 부둥켜안고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고 물어와 대충 얘기를 해드리고는 더 많은 시간을 우리 련대의 오랜 종업원들이 모두 어디에 갔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러던중 내가 1972년에 촬영한 비닐박막 벼모온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더니 나를 따라 벼농사를 배우던 전위라고 부르는 녕파청년이 그동안 몇번 왔다갔다고 말한다. 참으로 반가왔다. 나중에 또 오게 되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나는 제4농장 선전과에 초대되였다. 전강이라는 선전과장은 나를 반갑게 맞으며 “김국장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벼농사를 개척할 때 저는 세살 밖에 안되는 아기였어요. 내가 우리 농장의 벼농사 대사기를 정리하는 업무를 선배님으로부터 물려받았는데 김국장님께서 벼농사를 개척했다는 기록은 한글자도 없고 대사기에는 80년대부터 기록되여 있어요. 오늘 김국장님께서 이렇게 상세한 회고록을 써주셔서 우리 농장의 벼농사 개척력사가 10여년은 앞당겨졌네요! 정말 기러기섬의 벼농사개척 1인자예요!”하면서 환성을 올렸다. 그러면서 곧 국영853농장 당위 선전부에 내가 쓴 《안녕, 기러기섬!》이라는 장편회고록과 사진들을 교부하겠다고 말했다.

오후에 제2련대와 논을 돌아보았다. 내가 벼농사 실험을 하던 1호지의 벼이삭들이 검엽(剑叶)의 보호하에 벌써 누릇누릇 익어가고 있었다.

과거 우리는 <벼씨 기계화 직파기술>을 기획했었다. 뜨락또르와 밀보리파종기를 조합하여 벼씨를 직파하고 물은 조심스럽게 천천히 대여 벼씨가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릴 때 논물을 끊었다. 약 10여일간 ‘논의 해빛쪼임(晒田)’ 과정을 거치면 벼모가 자라는 한편 돌피도 새파랗게 자라났다. 그 때면 바람이 없는 날자를 선택해 <안-2> 농업용비행기를 날려 농약 ‘적패제(敌稗剂)’를 살포한다. 며칠 후 돌피가 모두 새빨갛게 말라버린 후에 다시 논물을 대여 벼모를 키웠다. 이듬해에는 비닐모상판에서 벼모를 키울 수 있어서 생장기가 더 긴 벼품종을 도입할 수 있었다.

1995년부터 국영853농장에서는 밀과 보리농사 면적을 줄이고 벼농사 면적을 크게 늘였다. 지금 국영853농장의 총 경작지면적은 102만무인데 그 중 논 면적이 74만무이다. 연변의 논 면적(2013년 통계에 따라 52만 5천무)보다 많다. 벼 한무당 수확고는 600여키로그람에 달했다. 밀 한무당 수확고 300여키로그람에 비하면 배 이상 더 나오는 셈이다.

《신당서(新唐书)》에는 ‘로성지도(卢城之稻)’라는 기록이 있다. 연변대학 발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로성’은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서성진의 서고성 일대라고 한다. 그렇다면 발해국시대에 지금의 평강벌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지금 평강벌은 벼농사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런데 발해국이 멸망한 후에는 근 천년 동안 동북에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은 없다.

국영853농장 본부에서 동쪽으로 약 20여키로메터를 가면 대화진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이번에 가보니 마을은 없어지고 대화진 림장이 새로 개척되여있었다. 1969년 봄, 내가 기러기섬에 부임되여 갔을 때 대화진에 조선족들이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마을에는 10여호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 함경도 말투였다. 그래서 한 아저씨에게 “당신들은 혹시 연변에서 이사오셨습니까?” 고 묻자 그 아저씨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아이, 우리 할아버지, 할마이가 ‘마우재’ 있는데서 왔소!”라고 대답했다. ‘마우재’는 로씨야 사람을 말하는 사투리이다. 나는 벼농사는 어떻게 짓는가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저기 습지에 벼씨를 마구 뿌리고(산종) 벼씨가 뿌리를 내린 다음에는 낫으로 물에 뜬 돌피를 휘휘 거두어내면서 벼농사를 하지비…”고 대답했다.

 

100년전, 피땀으로 개척한 땅에  새해 농사를 지으려고 가대기와 파종용 농기구를 검사하고 있는 농민(자료사진). 

몇년전 나는 한 문헌에서 ‘1880년 요하현 대화진에 로씨야에서 이사 온 조선인들이 마을을 앉히고 벼농사를 개척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조선인들이 로씨야에서 이사왔다면 우선 그들은 일찍 두만강을 건너 로씨야 원동지역으로 이사갔던 까레이스끼(조선인)들의 후예들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내가 이번에 일부러 대화진을 찾았는데 그들을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우연이 필연을 불러오는가 본다. 며칠전 우리 약선강습팀이 함께 흥개호에 갔을 때 계림향 부향장 김화자가 자기 할머니께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마우재 란리’을 피해 한밤중에 로씨야마차를 타고 흥개호 얼음강판을 넘어 계림으로 피난왔다고 한다.

그 당시 밤중에 수많은 까레이스끼들이 로씨야마차를 타고 흥개호의 얼음강판을 건너 동북땅으로 왔다. 어느 한 로씨야마차를 탄 한 가족은 잠시 잠들었는데 흥개호 한복판의 얼음이 얼지 않는 것을 모르고 소가 직진하다가 로씨야마차가 통채로 물에 빠져 까레이스끼 가족들이 몰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력사기록과 대조해 보면 바로 1937년 쏘련정부가 씨비리 원동지역에서 벼농사를 하면서 살아온 까레이스끼들을 ‘일본첩자’라고 의심하면서 밤중에 강제로 기차에 실어 중앙아시아의 우즈베끼스탄, 까자흐스탄의 허허벌판에 내동댕이 치는 강제이주를 감행했다. 몇년전 우즈베끼스탄과 까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는 까레이스끼들의 영상을 보았는데 그들은 모두 함경도 말투를 쓰고 있었다.

그 때 수많은 조선인들은 강제이주를 피해 야반도주하여 흥개호, 우쑤리강, 흑룡강(아무르)을 넘어 동북으로 넘어와서 밀산, 계림, 대화진, 라북, 무원, 흑하 등지에서 논 농사를 개척했다. 사실 그들도 먼 옛날에는 모두 두만강을 넘어 로씨야로 이주했던 까레이스끼 후예들이였다.

이번에 계림향에서 조선족농민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니 역시 다수가 함경도 말투를 구사하고 있고 ‘마우재’ 라는 말을 흔하게 하는 것을 보면 먼 옛날에 두만강을 넘어 로씨야 원동지역으로 이주했던 까레이스끼들의 후예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력사문헌에는 조선인들이 동북 도처에서 벼농사를 개척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중에서 몇 곳의 선색만 적는다. 1845년 평안북도 초산군의 80여호 조선인들이 압록강을 건너와 훈하 하류에서 벼농사를 시작했으며 1888년에는 조선인들이 오상현에 이주해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1897년에는 조선의 갑오농민전쟁에 참가했던 패잔병들이 흑룡강성 녕안현 발해진에 몰려와서 벼농사를 개척했다는 기록도 있다. 1890년 좌우에는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인들이 연변의 개산툰지역에서 벼농사를 개척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력사기록들은 조선, 로씨야로부터 가난한 조선인 농민들이 극심한 재해, 중대한 사변을 당할 때마다 자발적으로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 압록강, 흑룡강, 흥개호 등을 넘어와 동북에서 논을 개발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1931년 ‘9.18’사변을 일으켜 동북을 완전히 점령한 일본제국주의는 계획적인 조선인 이민정책을 실시하였다. 연변 안도현의 무주마을, 정읍마을은 일제의 집단이민 실시 당시 고향을 떠나 안도현에 이주해 와 정착하면서 마을 이름을 아예 고향의 이름 그대로 쓰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부르고 있다. 연변 훈춘시 량수진의 정암마을에는 충청북도 청주에서 집단이민한 농민들이 정착한 마을인데 그들이 지금까지 불러온 <청주아리랑>은 고향 청주에서는 이미 잊혀진지 오래된 노래이다.

지난 세기 70년대말, 연변의 저명한 중국조선족민요 연구가 고 김봉관선생이 <청주아리랑>을 발견하여 기보하고 널리 알리면서 청주사람들이 달려와 고향에서 잊혀진지 오래된 <청주아리랑>을 베껴가는 진풍경이 일기도 했다. 고 김봉관선생은 생전에 자기의 저서 《중국조선족아리랑》에는 중국에서 발굴된 <아리랑>이 50여수가 된다고 썼다. 그것은 바로 우리 조상들은 동북과 내몽골에서 벼농사를 개척하는 세월 동안 옛날 고향의 민요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생을 달래왔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1938년 겨울, 저희 어머님은 14세에 부모님을 따라 일제의 집단이민 행렬을 따라 흑룡강성 상지현 하동으로 이주하였다. 어머니는 다행히도 평안북도 정주가 고향인 아버지와 앞뒤집으로 살게 되면서 부부가 되였고 나는 상지에서 태여났다.

1956년 7월10일, 《인민일보》는 <북방에서 대규모로 벼농사를 할 수 있는가?( 北方能大量种水稻吗?)>라는 사론을 발표하였다. 사론은 “오늘 본보에 발표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벼풍작경험>은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유력한 답안이다. 결단하건대 우리 나라에서 적당한 조치를 대기만 하면 그 어디에서나 벼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고 썼다.

1964년 11월 16일, 《인민일보》는 <풍작경험을 과학적으로 총화해야 한다>라는 사설을 발표하였다. 사론은 “오늘 본보는 중국농업과학원 공작조가 작성한 최죽송의 벼풍작경험을 총화할 데 관한 조사보고를 발표하였다. 이 조사보고는 농업과학공작자들이 농촌에 심입하여 군중들의 증산경험을 잘 총화하는 것은 농업생산을 추진하고 농업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1962년 6월 22일, 국무원 총리 주은래께서 연길시 신풍촌을 찾아 최죽송농민과 한구들에 마주앉아 벼풍작 경험에 대해 대화를 나누시고 벼농사를 격려해주셨다. 그 때로부터 국내에서 벼농사의 장원은 ‘남진북최(南陈北崔)’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조선족 력사에 불후의 한페지를 남겨놓았다. 그런데 지금 연길시 신풍대대 최죽송농민의 벼농사 옥답에는 아빠트들이 빼곡이 들어서서 참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그 곳에 주은래 총리와 최죽송농민이 함께 환하게 웃으시면서 풍년든 황금논을 바라보는 동상을 세웠으면 좋으련만.

나는 50여년전부터 직접 벼농사를 배우고 벼농사를 해보고 벼농사 관련 뉴스를 써보고 벼농사 력사문헌들을 뒤지면서 몇가지 체득을 얻어냈다.

첫째, 중국 조선족은 중국 북방 벼농사의 선구자이다.

둘째, 이밥은 형제민족들의 밥상에서 수수밥과 강냉이떡을 밀어낸 ‘일등공신’이다.

셋째, 벼농사는 우리 나라 북방의 곡창을 가득 채우는데 대공을 세웠다.

넷째, 우리는 현대화한 논농사를 발전시켜야 한다.

다섯째, 입쌀은 중국조선족의 약선문화(药膳文化)를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할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을 경축하는 나날에 나는 중국조선족의 문화방송인으로서 자부감을 느낀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의 ‘고난의 아리랑’은 영원히 지나갔고 ‘행복 아리랑’은 한창이며 앞으로 우리 민족의 후예들이 ‘천년 아리랑’을 부르며 ‘중국의 꿈’을 실현할 것임을 믿어마지 않는다.

흥개호에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2,000키로메터 장거리 탐방을 하면서 나는 아직도 달릴 수 있다는 신심을 얻었다. 그리고 나의 정든 기러기섬의 천지개벽으로 인해 흐뭇하기만 하다. / 김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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