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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120]북경병원에서 쏟았던 안해의 눈물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02 12:55:44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수기 응모작품 (48)

▩김동화(안도)

수술치료를 마친 후 천안문광장에서 박물관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부부

살다 보니 가끔씩 지난날에 있었던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머리에 떠올려볼 때가 많다. 언젠부터인가 이 일만은 한번 주위 분들께 알리고 싶었던 차라 오늘 적어본다.

1987년 12월 27일 저녁, 나는 가까스로 안해의 부축을 받으며 북경행 비행기 편으로 제2차 심장판막 이식수술을 받으러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니 겨울이라 날씨는 매서웠고 날은 어두웠다. 키가 1메터 50센치도 되나마나한 왜소한 안해는 나의 오른팔을 어깨에 메고 한손으로 20~30근이나 되는 짐보따리를 질질 끌며 비행장을 벗어나왔다. 차를 서너번씩 갈아타며 힘겨웁게 북경 심혈관전문병원인 부외병원까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넘었다.

급진실에서 접수해 의사들이 서둘러 치료에 들어가게 되여서야 안해는 땀을 훔치며 흐트러진 머리를 추어올리는 것이였다. 좀 숨통이 열리는 양 싶었다.

사실 연변병원에서 포기하는 것을 안해는 단 백분의 일의 희망이라도 바라고 급기야 서둘러 혼자서 중환자인 나를 데리고 북경으로 떠난 것이다.

당시 병실 침대는 강관으로 만든 덩실침대로 심장박동에 따라 춤을 췄고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하는 나에게는 그 밤이 무섭고 싫었다. 숨이 턱까지 차 가쁠 때면 죽는 약이라도 있으면 먹고 편히 죽고 싶은 생각도 없은 것이 아니다.

밤낮 나의 간호로 힘이 딸린 안해는 밤이면 쪽걸상에 앉아 침대에 엎드려 눈을 붙였다가도 내가 움직이면 소스라쳐 깨여나군 했다. 모든 것을 혼자서 도맡아야 하는 안해에겐 처음 겪어보는, 몸과 마음을 갈아내리는 고된 일이였을 것이다.

하루는 원장의 병실 검사 날이였다. 20명에 달하는 의사들을 거느리고 들어선 허원장은 나의 화험, 기계 검사표를 보고 진찰하더니 “수술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술대에서 내려올는지? 이제 연구해봅시다.”라고 했다.

그 날 오후 퇴근 무렵 책임의사인 장선생이 찾아와 안해에게 환자가 몸이 너무 허약하니 좋은 음식 섭취로 몸을 좀 춰세워야겠다는 것이였다. 몸무게가 50키로를 넘던 내가 35키로까지 떨어졌으니 말이다.

이튿날부터 안해는 되지 않는 한어 때문에 반은 손시늉을 해가며 간단히 끓일수 있는 남비에 알콜곤로를 사다 닭고기며 어죽 등을 번갈아가며 공대했다. 하지만 한주, 두주, 날은 자꾸만 가도 몸 상태는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못해만 갔다.

하루는 장선생이 찾아와 환자가 간도 나쁘고 수술환자들이 많이 밀려있는 상태라 자기네 병원에서 수술하기가 힘들 것 같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가정에서 동의만 한다면 병원에서 책임지고 심장수술을 잘하는 부대병원으로 보내주겠다는 것이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안해의 눈에서 눈물이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말도 없던 무슨 간염, 전문병원에서 못하는 걸 다른 병원에서 할 수 있다는 건 왠지 믿을 수가 없어요.” 이는 구실이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였다. 그 후 안해는 책임의사며 주임의사를 한번, 두번, 세번 찾았다. 이들은 강경한 안해를 더는 막기 어렵게 되자 허원장에게로 밀었다.

이튿날 출근시간을 맞춰 원장실을 찾아갔다. 허원장은 나젊은 소수민족 녀성(김복희, 당시 38살)이 혼자의 힘으로 중환자인 남편을 살려보려고 자기 병원을 찾은 데도 마음이 얼마간 움직였겠지만 완정치 못한 한어말에 손시늉을 해가며 안타까이 흘리는 눈물에 감동을 받았던지 “알았습니다. 다시 연구해봅시다.”라고 했다.

오후 퇴근 무렵 책임의사 장선생이 병실을 찾아왔다. “우리 병원에서 수술하기로 다시 결정이 되였습니다. 날자는 2월 18일입니다.” 안해는 또 눈굽을 찍었다. 이는 아마 어렵게 얻은 기회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였을 것이다.

드디여 수술날자가 돌아왔다. 너무나 허약한 몸이라 의사들의 말대로 별일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수술하는 날 단위에서 보낸 공회주석인 림해옥선생님이 함께 있는 데서 얼마간 위안과 힘이 됐다. 수술을 받고 있는 나는 몰라도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바질바질 탔을 것이다.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손에 땀을 쥐고 십년 사는 속을 다 태우며 기다렸을 것이다.

수술을 시작하여 9시간이 넘어서야 방송에서 “김동화 가족에 알립니다. 환자의 수술을 순조롭게 마치고 관찰실로 옮겼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안해는 림선생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성공했습니다!”라며 애들처럼 퐁퐁 뛰며 기뻐했다. 안해는 100근짜리 짐보따리를 내려놓은 양 한시름이 놓이자 림선생님을 려관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관찰실로 옮긴 지 3시간도 안되여 수술의사가 찾아왔다. 환자가 갑자기 혈압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는데 어느 부위에 출혈이 있다면서 당장 재수술이 필요하니 빨리 가족이 서명을 해달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놀라운 소리에 손이 떨려 이름자도 바로 쓰지 못하여 겨우 오려놓았다. 림선생님께 련계를 하자고 하니 피뜩 들은 려관 이름도 생각나지 않았다. 당시 지금 같은 우월한 통신수단이였으면 림선생님을 불러 얼마간 마음의 힘이 될 수도 있었으련만. 오늘만은 함께 동무를 해주겠다는 림선생님을 굳이 보낸 것이 후회되였다.

한밤에 혼자 수술실 밖에서 그것도 재수술을 들어간 환자를 기다리는 마음은 무엇이라 형용할가. 당황하고 무섭고 눈물겹고. 수술실에서 의사가 나오면 혹시 무서운 소식이나 아닐가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면서. 6시간이 걸려서야 재수술이 끝나고 다시 관찰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젠 괜찮겠지요?” “허원장, 주임의사들이 직접 수술을 주도했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의사의 신심 있는 답복이다. 안해는 천근같이 무거웠던 마음보따리를 내려놓은 심정이였다.

그 후 안해는 매일 관찰실 옆 대기실에서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쪽잠을 자면서 수요되는 환자의 용품들을 수시로 사다가 들여보내군 하였다. 관찰실에서는 보통 7일이면 일반병실로 옮겼지만 나는 8일이 되여서야 옮겨졌다. 이는 후에 안해한테서 자초지종을 들어서야 알게 된 것이다.‘내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마다 안해는 얼마나 아찔했고 쏟은 눈물은 또 얼마였을가?’

병근이 해결되니 잠도 잘 수 있고 몸도 하루 다르게 좋아짐을 감촉할 수 있었다. 안해도 긴장이 얼마간 해소됨에 따라 그간 맘속에만 넣고 있던 좋고 궂은 이야기들을 나에게 옛말삼아 하나 둘씩 털어놓았다.

북경병원으로 중환자를 데리고 급히 떠나는데 동반할 일가친척이 없다는 것에 슬픔과 함께 눈물이 앞서더라는 것, 그리고 길에서 혹은 치료도중에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너무 당황스럽고 겁이 나 자꾸 눈물이 앞서더라는 것이였다.

안해는 “이제 와서 보면 수술 실패로 병원의 지명도에 영향을 받을가봐 타병원으로 옮기려 했던 병원측의 의도에 대해서 리해가 가요. 그러나 이로 하여 의사, 간호장, 주임의사, 원장을 찾으며 쏟은 눈물이 얼마인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라며 눈굽을 찍는 것이였다. 나는 안해의 천금같은 고마운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희망이 없다던 사람이 살아돌아오니 단위의 선생님들 뿐만 아니라 학부모들 그리고 만나는 분들마다 “천명입니다”, “참 수고 많았어요”, “힘들었지요?” 라며 여간만 놀라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물론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오늘 이날까지 살아올 수 있는 것도, 또한 사업에서 사회에서 일정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안해가 쏟은 눈물과 나에게 받친 정성의 결실이라고 말이다.

70을 바라보면서 나의 남은 인생에는 안해가 쏟은 눈물 흔적을 말끔히 닦아주고 그에게 환한 웃음을 찾아주는 일만 남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방문 시의 필자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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